바른가치세미나 “일상의 철학”

–  일시 : 2018년 6월 16일 오후 3:00~4:30
–  장소 : 서울영동교회 교육관 5층

일상의 철학

강영안 (기윤실 이사・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일상의 철학’이란 주제로 작년 6월에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인문강좌에서 강의했습니다. 그 원고가 올해 여름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또 같은 주제로 작년 12월 미국 칼빈 칼리지 철학과에서 강의를 했고, 올해 지난학기 칼빈 세미너리 Th.M 과정에서 강의했습니다. 일상의 철학은 제게 아주 생생한 주제입니다.

시간과 공간, 나와 타인

레비나스의 친구였던 소설가 모리스 블랑쇼는 “일상은 도망간다. 일상은 손에 쥐려고 하면 빠져나간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지평선이나 수평선에 다가가려 해도 자꾸 멀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일상은 정확하게 정의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일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일상이 도대체 무엇인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삼각형을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과 의미가 다릅니다. 다만 일상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일상을 이루는 삶의 조건과 계기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삶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시간의 축에 놓여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다. 세계 안에 사는 존재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두고 인간을 ‘피투성의 존재’, 즉 던져짐을 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죠. 우리가 스스로 태어나겠다고 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이데거도 던져진 근거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던져짐 받은 존재로서 다시 자기 삶을 되던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삶이 종결되는 순간을 ‘불가능의 가능성’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모든 가능성을 종결시키지만, 그것이 다시 가능성이 되어서 자기 존재를 던질 수 있게 한다고 했죠.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죽음은 자유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시간 축 뿐만 아니라 공간 축에서 살고 있습니다. 태속부터 시작해서 가정, 학교, 교회, 나아가 세계라는 공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되 누구의 삶을 살아갑니까?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갑니다. 한 마디로 시간 축과 공간 축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일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당연히 시간, 공간, 나 자신과 타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각해보십시오. 어제 잠을 잤기 때문에 눈을 떴습니다. 계속 숨을 쉬고 있습니다. 씻고, 밥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의 철학의 대상이 됩니다.

일상의 특징 – 반복성, 필연성, 유사성, 평범성, 일시성

일상이 가진 특성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반복성’입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등 우리가 하고 있는 삶은 대부분 반복되는 것입니다. 반복해왔기 때문에 그 일들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반복성이 없다면 너무 어렵게 살게 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필연성’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상관없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권력이 있든 없든 잠을 자야 합니다. 누구도 이 필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의 내용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채워진다 하더라고, 자고 먹고 만나고 일하는 등 필연성에 종속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여기서 세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일상의 ‘유사성’입니다. 삶의 질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누구나 비슷합니다. 네 번째 특징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상의 ‘평범성’입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삶은 평범합니다. 평범하다고 해서 의미 없거나 무질서한 것은 아니고 질서 속에서 이뤄집니다.

또 일상의 ‘일시성’이 있습니다. 저는 연구하고 글을 쓰느라 밤을 오래 지새웠습니다. 그 결과 17권 책을 썼고 100편 이상의 논문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연구자들이 인용하거나 도서관에 꽂혀 있는 것을 빼고는 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입니다. 모든 삶은 한 때 쏟았던 정열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전도서의 말씀(전1:2)이 맞습니다.

일상의 철학을 전개하는 방식 – 현상학, 해석학, 윤리학

제가 일상의 철학을 전개하는 방식은 세 단계입니다. 이 세 단계를 밟아가며 묻습니다. 첫 번째, 일상의 현상학입니다. 그냥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생각하지 말고 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일상의 해석학입니다. 일상의 의미, 구조 등을 파악하려는 노력하는 것입니다. 뭐 먹는다면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 세 번째. 일상의 윤리학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제가 시도하는 일상의 철학은 이렇게 현상학, 해석학, 윤리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탁에 한식 밥상이 차려져 있다고 해봅시다. 생각하지 말고 보십시오. 밥이 있고 국이 있고 반찬이 있습니다. 우선 먹을 마음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무엇을 먹을지 선택한다고 합시다. 국을 먹기로 했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국그릇으로 가서, 숟가락을 넣고, 뜨고, 들어서, 입까지 가져와서, 입을 벌리고, 넣고, 입을 닫고, 씹고, 맛보고, 삼켜야 합니다. 영어 ‘eat’라는 동사는 하나의 동작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을 먹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는 먹을 수 있는 것, 즉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을 먹습니다. 두 번째는 먹어도 되는 것, 즉 문화나 종교적으로 허용되는 것을 먹고 금기시되는 것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먹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까? 자신이 아닙니까? 누구도 제 살을 먹지 않습니다. 모두 자신이 아닌 것, 즉 타자를 먹습니다.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밥상에 올라오는 것들이 언제 자기를 먹으라고 스스로 내어줬습니까? 어떤 경우든 타자를 먹습니다. 타자의 죽음을 바탕으로 우리 삶이 유지됩니다. 삶은 죽음의 터 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은 선물입니다. 물론 우리의 폭력과 탐욕이 개입될 위험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타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는 것이 제대로 먹는 걸까요? 우리 자신이 먹는 존재라는 인식은, 다른 사람 역시도 먹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내가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듯 다른 사람도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대신 먹고 마시고 잠을 자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 나의 나됨과 관련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을 통해 나와 네가 구분됩니다. 타인이 배고프다고 내가 대신 먹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먹을 것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먹고 마셔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은 동시에 타인도 먹고 마셔야 하는 존재라는 인정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나의 나됨의 기본조건이라면, 역시 먹고 마시는 것이 타인의 타인됨의 기본 조건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정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의에 대해서 먼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가 억울함을 풀어주라고 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자국과 타국을 구분하는 사회, 빈부의 차별이 있는 사회에서 이들 네 부류가 억울함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둘째 부자나 가난한 자나 외모로 취하지 말고 공정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일상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무시되기 쉽습니다. 만일 우리가 먹고 자는 등 가장 기본적인 일상의 삶을 받아들인다면 정의의 문제를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의 밥상 있다면 타인의 밥상도 있어야 합니다.

일상, 주어진 선물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결국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전도서 이야기를 두 가지 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죠. 하지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려 누리라고 합니다. 선물을 받으면 어떤가요? 기뻐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감사해하죠. 그리고 잘 사용하면 됩니다. 일상도 그렇습니다.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뜻대로 사용하는 아닐까요?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일상에 대해서 강의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강영안)

1995년에 서강대 철학과에서 일상의 철학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또 오늘 사회를 보는 목광수 교수님가 학생일 때 서울대에서 손봉호 선생님이 안식년이셔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학기 칼빈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요.

일상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상당히 오래 됐습니다. 세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후설,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 현상학에 대해 공부한 것이고요. 둘째는 암스테르담자유대학 도예베르트 같은 기독교철학을 공부하면서입니다. 셋째는 일상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개혁신학의 전통 때문입니다.

(질문)

일상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사람이다 보니 반복되는 삶에서 늘 기뻐하고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만의 극복방법이 있으신지요?

(강영안)

행복과 불행이 어디서 오느냐 묻는다면, 행복은 우리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알고 누리면 행복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불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즘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저는 진짜 ‘소확행’의 의미는 우리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누리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지속적인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광수)

제 방식대로 이해하면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일상이 어쩔 수 없이 줄 수밖에 없는 속도감과 평범함을 깨어 있음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중요하지 않나 이해를 했습니다.

(강영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말씀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가장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원천입니다. 하나님 인도하심에 달려 있다고 믿고 나에게 주어진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면 행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일상의 철학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현상학, 해석학, 윤리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상학적 이야기는 일반인들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해석학이나 윤리학으로 들어가면 철학적 지식 없이 가능할까요?

(강영안)

나의 나됨과 너의 너 됨, ‘자’와 ‘타자’ 관점만 취할 수 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묻는 연습을 자주 해보면 좋겠습니다. 묻되, 나와 관련해서 묻는 것입니다. <맹자>에 보면 ‘반구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되돌아와서 자기에게 되물어 본다는 뜻입니다. 그게 철학을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철학을 공부한다고 그러면 칸트, 후스, 하이데거를 읽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나간 철학의 사유를 익히는 것이죠. 저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물어보고 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죠.

요약하자면 어떻게 현상을 보고, 의미를 찾아내고, 삶으로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할 때 출발점은 묻고, 또 묻고, 또 묻는 것입니다. 묻되, 남 이야기 하듯 하지 말고 자기에게 돌아와서 자기 삶에서 묻는다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문)

삶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제가 나쁜 사람인가요?

(강영안)

우리 삶에 불행은 비교하는데 있습니다. 자기와 화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자족함을 배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로 채우면 채울수록 나는 비워지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관계는 타자를 타자로 두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소확행’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행복일 수 있으려면 전체적인 삶의 틀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확행’은 삶의 전체적인 관점을 잃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도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전체적 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선하게 이끌어나가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불행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감사한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견디면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삶은 지금 여기에만 제한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려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

 


관련 글들

2019.05.22

[평신도의 상상력] #02. 평신도 점ㅡ프

자세히 보기
2019.04.12

[긴급토론회] 낙태죄 헌법불합치,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자세히 보기
2019.04.08

[평신도의 상상력] #01. 기독교는 왜 욕을 먹을까?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