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는 단순히 글로 적은 어떤 것을 넘어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을 포괄하는 일종의 ‘콘텍스트’로서,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곧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결국 해석의 문제라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데리다는 텍스트 자체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저자의 의도 역시 고려할 필요도 없고 그걸 파악할 방법도 없다고 주장합니다.(본문 중)

권수경(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Jacques Derrida(1930~2004)

 

해체와 텍스트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포스트모던 저자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사람입니다. 알제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대학 때부터 프랑스에서 공부한 데리다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대학 강의, 강연, 저술 등으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사상은 ‘해체’(deconstruction)라는 한 낱말로 압축됩니다. 텍스트의 구조적 통일성과 반대되는 것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언어의 복잡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독법인데 쉽게 말해 기존의 모든 의미를 흩어버리는 방식입니다. 그런 독법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데리다가 이 결론을 통해 바깥 물질세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텍스트를 지나 그 텍스트가 가리키는 대상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데리다는 인간이 언어라는 매개체 때문에 자연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는 루소(J. J. Rousseau, 1712-1778)의 한탄을 순진하다고 비판하면서 텍스트의 매개가 없는 실재 경험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습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는 단순히 글로 적은 어떤 것을 넘어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을 포괄하는 일종의 ‘콘텍스트’로서,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곧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결국 해석의 문제라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데리다는 텍스트 자체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저자의 의도 역시 고려할 필요도 없고 그걸 파악할 방법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인식의 이런 한계는 데리다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20세기 초 프랑스, 독일 등에서 발전한 지식사회학도 지식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 경험, 역사, 그리고 그 지식이 제기되는 맥락 등의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다만 데리다는 티슬턴(Anthony Thiselton, 1937-)의 지적처럼 지식이 상황에 의존한다는 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따라서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 소위 객관적 지식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사상가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1] 데리다가 언어 및 해석의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것은 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입니다. 복음주의 철학자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1932-)는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데리다의 해석학을 비판하면서 정작 데리다 자신은 자신의 의도를 바로 이해해 달라고 거듭 요구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습니다.[2]

 

새문안교회에서 강연하는 월터스토프.

 

모든 것이 해석이라면?

모든 것이 해석이라는 데리다의 입장은 곧바로 기독교 복음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 역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십자가와 부활 등 성경 텍스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사건의 객관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모든 것이 해석이라는 데리다의 입장이 기독교 복음과 공존할 수 없는 것임을 거듭 천명하였습니다. 또 텍스트 읽기에서 저자의 의도가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텍스트의 객관적인 의미 또한 언제나 저자의 의도에 따라 확보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사상가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는 제임스 스미스는 데리다의 입장이 기독교와 잘 조화되며 기독교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이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사실상 근대 사람들처럼 객관성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기독교 복음이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 해도 얼마든지 진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일종의 사고실험을 시도합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의 한 불신자와 나중에 예수를 믿은 백부장이 완전히 다른 내용의 보고를 한다는 사고실험입니다.[3]

둘 다 동일한 사건을 말하지만 보고서의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스미스는 둘 가운데 더 나은, 나아가 진리인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둘 다 해석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해석되지 않은 사건 자체에는 다가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객관성 대신 성령께서 주시는 주관적 확신이 있으면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해석학이 외면하고자 하는 사건 곧 십자가와 부활의 객관적인 역사성 자체가 기독교 복음의 진리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해석이라 해도 그 해석의 바탕을 이루는 사건의 객관적인 사실성이 먼저 확보되지 않으면 그 해석은 절대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고린도전서 15:14-15).

 

성경과 공동체

스미스는 데리다의 텍스트 이론이 기독교와 잘 맞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익을 준다고 봅니다. 모두가 자기 나름의 해석을 갖고 사는 세상이라면 기독교인 역시 자신의 기독교적 해석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틀은 언제나 종교적인 것이고 또 그리스도인의 해석은 언제나 성경에 근거해야 하므로 데리다의 해석학은 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성경’과 통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텍스트도 이미 하나의 해석이고, 그 해석에 대한 해석들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데리다의 입장을 고려할 때 성경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부터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해석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는 교회의 입장과 도저히 조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스미스는 또 데리다의 해석학이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고 주장합니다. 텍스트가 여러 상황과 조건과 전제의 결합인 콘텍스트라면 기독교에서는 교회가 그 콘텍스트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지배를 받고 성경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만 합당하게 작동하게 되며,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은 오직 성령이 다스리시는 교회 공동체에서만 텍스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주장 또한 개인의 무분별한 해석을 방지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현실 가운데서 그 공동체가 특정 지역교회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교단 또는 문화공동체를 가리키는지 불확실하므로 누가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또 저마다 성령의 역사를 주장할 경우 잘못된 교리나 이단의 발흥 가능성도 커질 것입니다.

스미스가 데리다에 호의적인 이유는 데리다가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구도를 스미스 자신이 이미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전제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끼워 맞추려고 애쓴다는 인상을 줍니다. 기본 구도만이 아닙니다. 제국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소외된 것들에게 관심을 두겠다는 데리다의 정치적 동기까지 스미스는 십분 수용하고 있습니다. 소외된 것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성경적인 태도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오랜 세월 많은 것들을 소외시켜 온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만이 구주이심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본질 자체까지 공격하게 됩니다. 기독교적 원리를 기독교를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카멜레온을 닮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입니다.

 

데리다와 교회

스미스는 데리다를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교회가 전통을 존중하고 지역적 편협성을 극복하며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교회가 인간 이성의 힘을 맹신하였던 근대성을 뛰어넘어 수천 년의 역사와 호흡하는 일, 지역적인 소외를 극복하여 지구촌의 전 교회가 성령 안에서 연합하는 일, 진리의 복음을 세상에 담대하게 외치는 일 등은 모두 아름답고 보람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장과 왜곡을 담은 언어학과 해석학에 휘둘려 성경이 전하는 역사의 객관적 사실성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참 뜻을 파악하는 일을 등한히 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 나 개인의 콘텍스트를 넘어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나 말씀의 객관적인 의미 못지않게 그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주관적으로 확신하며 그 확신대로 실천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교회가 항상 가르쳐 왔던 점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 해석학의 등장과 무관하게 앞으로도 더욱 힘써 가르쳐야 할 요소일 것입니다.

[1]Thiselton, Interpreting God and the Postmodern Self, Eerdmans, 1995.

[2]Wolterstorff, Divine Discourse, Cambridge Univ. Press, 1995), pp. 153-170.

[3]제임스 K. A. 스미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박삼종 외 옮김(살림, 2009)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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