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중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2:28)” (중략)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구약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래 히브리어 어법으로는 이 둘을 동의어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고대교회 이래 ‘형상’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그리고 ‘모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후자는 상실되었으나, 전자는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내용적으로는 상실되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남아있다고 말했다. 브루너에 따르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사회적 규범과 국가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인격적 주체로서 응답할 수 있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응답의 가능성을 “접촉점”(contact point)으로 표현했다. 접촉점은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말의 뜻은 “죄인인 인간들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으로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책임성을 가진 인격성(Humanitas)이란 뜻이다.” 브루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인간이 들을 수 있는(거부할 수도 있는) 형식적 가능성으로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용성(receptivity)을 인정했다.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2장 27절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창세기 2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구절 바로 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뒤따르는 것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구약학자인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 1909-2000)은 창세기 본문에서 여자의 창조가 단지 인간의 성적 분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바르트도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의미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즉 바르트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세 위격의 관계성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관계유비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고대 교부들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육체가 아닌 이성적 영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오늘날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창세기 2장 27절에 기초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는 특히 오늘날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관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특히 양자 물리학)은 실재를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또는 구조를 서로 고립된 자기충족적인 실체(입자)로가 아니라 장(場, field)과 같은 관계의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생활세계(Lebenswelt)라는 장으로부터 분리된 근대의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 개념은 오늘날 허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웃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한다. 이웃과 타자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953~)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본능적 충동”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나온 물질적 질서 속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위쪽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 욕구는 하나님을 향한 숨겨진 갈망을 나타낸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공유하는 육체적 실존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실존의 본질은, 인간이 육체와 구별되는 영이란 불멸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적 관계성 안에 존재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안에서 친교적 연합(communion)을 이룬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주, 상호 침투, 상호 의존, 상호 순환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됨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고 아들의 아들 됨과 성령의 성령 됨도 각기 다른 두 위격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페리코레시스는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 위격 사이의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신다.

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우리 인간은 이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이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롬 8:29; 고전 15:49; 고후 3:18).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운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하나님 형상의 역사적 현현으로서, 죄로 인해 손상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키고 완성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새롭게 하고 완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내적 구조 안에 닫혀있지 않고 본유적으로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만 인식 가능하다. 따라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분리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동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1]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이와 같은 관계성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세 위격 사이의 페리코레시스 즉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이해되어야 한다.

 

Andrei Rublev. The Old Testament Trinity.(1410s)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완성되어야 할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만일 아담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운명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타락하기 전의 완전한 원의(原義) 상태란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적이 없으며, 최초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상실되었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과 양립하기 어렵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또는 교제로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불멸성에 참여하도록 되어있다는 데 있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영화롭게 하려는 자연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성향, 즉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실현은 인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연적 실존 너머가 아닌 자연적 실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운명으로 부여받은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완결적이고 불변적인 본성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의 운명을 향해 개방된 역사적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질은 종말론적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역사적 개방성에 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운명 실현의 역사 자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에 근거해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본질을 인간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의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란 인간이 하나님, 세상(이웃), 미래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자기초월적 개방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믿음이다. 세상(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사랑이다. 미래와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소망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세상(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구현해야 할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다.

[1] 경세적 삼위일체란 아들과 성령을 통해 시간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내재적 삼위일체란 세 위격의 영원한 내적 사귐 속에 있는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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