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 교회사에 등장한 수많은 보석들 가운데 목회자들이 특별히 선망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초기 교부 크리소스토무스입니다. (중략) 그가 기독교의 가장 완벽한 규칙, 기독교의 가장 정확한 정의, 기독교의 최고점, 즉 클라이맥스로 무엇을 꼽았는지를 아는 이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정답은 ‘공동선’입니다. 왜 ‘황금의 입’에서 그런 답이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이웃을 돌보는 것만큼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일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본문 중)

[따듯한 사회를 위한 공동선①]

기독교의 클라이맥스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이천 년 교회사에 등장한 수많은 보석들 가운데 목회자들이 특별히 선망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초기 교부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 349?-407)입니다. 이유는 그가 소위 ‘황금의 입’으로 불리던 기독교 최고의 설교가인 까닭이지요. 하지만 정작 그가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메시지를 전했는지는 아는 이가 드문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과연 그가 기독교의 가장 완벽한 규칙, 기독교의 가장 정확한 정의, 기독교의 최고점, 즉 클라이맥스로 무엇을 꼽았는지를 아는 이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정답은 ‘공동선’(Common Good)입니다. 왜 ‘황금의 입’에서 그런 답이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이웃을 돌보는 것만큼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일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말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온 주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아니었던가!”라고 반문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종교개혁가 칼뱅이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The Union with Christ)으로 정의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리얼리티, 즉 실재는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지요. 만약 구원받은 어떤 사람이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결된 가지와 같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지정의를 온전히 공유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얼마나 공감(empathy)하는 삶을 사는지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정말 연합된 존재인지, 다시 말해 구원받은 존재인지를 확증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화는 참된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 이유에서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님처럼 타자를 위한 공동선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구원을 보여주는 최상의 척도라고 본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즈음해서 한국교회에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실재했던 그 근원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인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황금의 입이라 불리던 초기 교부에게서 ‘공동선’이란 단어가 공연히 나오지 않았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선언이 나오게 된 신학적, 성경적, 역사적, 학문적, 시대적, 일상적 연원은 실로 풍성합니다. 기독교 렌즈로 보면 공동선 드라마는 창조-타락-이스라엘-그리스도-교회의 다섯 막으로 구성된 ‘큰 이야기’입니다. 공동선 드라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약성경과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약성경을 관통하며 그 안에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아우르며 재구성하는 큰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공동선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시대정신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날마다 씨름하던 공통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는 어찌 보면 세속 사회 한복판에서 영적 차원의 씨줄과 사회적 차원의 날줄로 공동선의 양탄자를 짜던 로컬 내러티브들의 모음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조차 공동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순행하는 이야기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역행하는 이야기가 쉴 새 없이 끼어들었지요.

이제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고 인류 전체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번영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공동선’이라는 주제도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역사의 대격변기를 통과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기독교 최고의 가치가 ‘공동선’에 있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가운데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 대한민국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30-50클럽[1]에 가입했다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소득은 증가했지만 삶의 만족도는 떨어졌습니다. 특히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느냐’는 설문 항목에서 대한민국은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종교 인구 중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다는 나라의 ‘선한 사마리아인’ 지수가 꼴찌인 것입니다.

공동선의 핵심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나란히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휴대폰을 만들면 뭐합니까? 그 휴대폰으로 도움 청할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기적 개인주의라는 악성 미세먼지의 공습에 속수무책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각 분야에서 시대를 분별하고 그 시대를 이끄는 최고의 정신을 찾아내며 공동선에 주목하는 데 반해, 교회는 한참 뒤떨어진 현실을 보니 주님의 음성이 귓전에 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

하지만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전히 기독교 공동선의 삶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며 희망을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 곳곳에서 일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공동선을 위한 삶의 진면목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시는 분에게 소개하고픈 분으로서, 100세 나이에도 왕성하게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는 김형석 교수를 꼽고 싶습니다. 얼마 전 장애 어린이의 재활과 자립을 위해 설립된 한 재단 모임에 참여한 자리에서 그는, ‘사람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여행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짐만 챙겨야 하듯, 인생도 멀리 나아가려면 최소한만 남기고 나머지는 타인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크게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소한 일에서도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되라’고 조언합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사회가 행복해지면 그 안에 있는 나도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사회가 불행한데 나만 혼자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사회 지도자들이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잘 살게 되지요.” 김형석 교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던 때와 같은 연배입니다. 그의 유지가 담긴 듯한 이 잠언은 삼일운동 이후 100년이라는 이 땅의 험악한 세월을 통과한 정금과 같은 것으로서, 노년의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서 꺼내던 추억에 비길만합니다.

60살이 돼서야 비로소 철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는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1980년대 신자유주의 물결을 몰고 왔던 영국의 수상 마가렛 대처가 자신만만하게 꺼내든 말이 오버랩됩니다. “애초에 공동체나 사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개인들과 그 가족들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은 공동선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들 간에 무한 경쟁을 하면서 각자 알아서 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야 전체 파이가 커지고 각자의 몫도 커질 것이라고 하면서요. 개인의 선을 각자 알아서 늘리면 사회의 선이 늘어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의 역사는 설사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서로 무관심하고 경멸하는 각자도생의 삶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상황과도 유사합니다. 교단이 분열하고 개교회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외양적으로는 초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성장을 이룬 것 같지만, 정작 개교회들 사이에 풋풋한 온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pixabay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세계화로 전 세계가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더 많이 교류하고 소득이 증가했지만, 그 이상으로 상호 갈등과 배제가 증폭되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예일대에서 조직신학과 공공신학을 가르치는 미로슬라브 볼프 식으로 말하자면 잠깐 눈에 보이는 번영(prosperity)이 증가한 것 같지만, 그로 인해서 오래도록 우리들과 같이 있어야 할 또 다른 번영(flourishing)은 감소했다는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와 대처 총리가 생각이 다른 것은 교육자와 정치가라는 직업의 차이, 그리고 각자 직면한 숙제가 다르다는 점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주, 세계, 역사,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와 성찰, 그에 따른 일상의 삶을 사는 태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물결이 몰아친 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유럽의 영국교회나 독일교회에는 교회가 사회공익을 위한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이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영국교회는 반세기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최대 기독교 축제인 ‘그린벨트’의 주제를 ‘공동선’(Common Good)으로 정했습니다. 사람을 기능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보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바탕 위에서 유럽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의 선과 사회의 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자리로 삼은 것이지요. 독일교회는 수십만 난민을 독일사회로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른바 ‘Germany Decides!’입니다. 이는 중세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전 세계로 흩어진 종교 난민들의 신앙고백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되살린 것입니다. 독일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방식은 시의적절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공동의 선을 위해 기독교, 불교, 천도교 당시 3대 종교가 힘을 합쳐 온 백성과 함께 제국주의 세력에 항거했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새로운 500년의 길목에서 영국교회와 독일교회가 유럽의 공생과 번영을 위한 ‘공동선’ 가치를 시대정신으로 붙든 것처럼, 한국교회도 한반도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기독교의 클라이맥스인 ‘공동선’의 검을 꺼내들어야 할 때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공동선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야기를 통해 공동선 존재양식의 신적 기원을 살펴보겠습니다.

 


[1] 국민소득 3만 불, 인구 5천만 명 이상의 국가들로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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