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직업>의 악인들은 도무지 무서워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진짜로 싸우는 대상은, 우스꽝스러운 악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깟 악인 몇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임을 <극한직업>은 간파하고 있다. 허상의 승리감을 맛보게 하려는 비장함 대신 현실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느라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유머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쪽을 택한다.(본문 중)
삶이라는 ‘극한직업’에 나선 이들을 위한 응원가
영화 <극한직업>에 대한 하나의 시선
성현(기독교영화관 필름포럼 대표, 창조의정원교회 담임목사)
어른이 되면서 점점 사라지는 게 있다. ‘웃음’이다. 조그만 일에도 아이들은 잘 웃는다(물론 울기도 잘한다). 어른들은 잘 웃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이 목적인 코미디(comedy)는 어른에게 필요한 장르다. 그런데, ‘웃음’을 준다는 장르적 특성과 달리 코미디 영화를 통해 크게 웃어본 어른은 드물다. 유쾌함을 위해 만든 영화적 장치들이 유치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19년 연초, 그 쉽지 않은 일을 영화 <극한직업>이 해냈다. 1,6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극한직업>이 주는 유쾌함을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영화관을 향했다.
해체 위기에 처해 있던 마약반 형사들이 범죄조직을 소탕하려고 잠복근무를 하던 치킨집을 인수한다. 치킨집 운영은 흉내만 내고, 범인을 잡는 데 주력할 계획이었다.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팀원 중 마형사(진선규)가 만든 왕갈비치킨의 맛이 뛰어나면서부터다. 손님이 없어야 잠복근무를 하는데, 손님이 줄을 서며 북적였다. 얼굴이 드러나면 안 되는데, 맛집으로 전국에 소문이 나 버렸다. 그러다 보니 임무에 충실하여 범인 추적에 나섰던 형사가 치킨집 장사시간에 자리를 비워 일손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순발력 있게 이어져 웃음을 유발한다. 경찰 반장으로 번번이 승진이 누락되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한다. “동네 반장도 세월 지나면 통장 되더라. 나는 최불암 아저씨도 보기 싫어. 볼 때마다 수사‘반장’이 생각나서.” 그때, 딸이 문을 열고 외친다. “엄마! 나 우리 반 반장 됐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른들이 현실에서 웃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현실이 고단하기 때문이다. <극한직업> 속 상황은 2019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범행 현장에 멋지게 유리창을 깨고 침투하지 못한 채 어설프게 로프에 매달리는 이유가 유리창이 깨지면 형사들이 배상해야하기 때문이라는 설정은 오늘도 소방관을 비롯해 각종 재난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의 열악한 처우를 떠올리게 한다. 어차피 조직에서 밀려나면 퇴직금으로 치킨집 차릴 일밖에 없으니 미리 당겨썼다고 생각한다며 임무완수를 위해 자신의 퇴직금으로 치킨집 인수에 나서는 고반장(류승룡)의 모습은 어떤가?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도 노후가 준비되지 않아 사지처럼 보이는 자영업자의 길로 들어서는 무수한 가장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여기에 치킨집이 전국적인 프렌차이즈화가 되면서 벌어지는 촌극은 구조적인 병폐가 개인의 역량과 무관하게 벌어지며 희생자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과 중첩된 영화 속 상황은 차곡차곡 쌓여가 마지막 결투장면에서 고반장의 외침이 된다. “대한민국 소상공인들, 전부 목숨 걸고 해!” 과연 이 싸움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일까? <극한직업>의 악인들은 도무지 무서워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진짜로 싸우는 대상은, 우스꽝스러운 악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깟 악인 몇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임을 <극한직업>은 간파하고 있다. 허상의 승리감을 맛보게 하려는 비장함 대신 현실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느라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유머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쪽을 택한다.
기독교 사상가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노동의 가치를 논하며 예술가가 작품에 있어서 고결함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인생관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온정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작품에 스며든 부패의 씨앗이 작품을 받아 든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리면, 수확의 계절에 두려운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한국영화가 예상과 달리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영화적 만듦새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마치 대중의 욕구를 알고 있다는 듯이 흥행공식에 짜 맞춘 영화들의 연속이었다. 전반부에 웃음을 주다가 후반부에는 어김없이 울게 만든다. 역사물, 멜로물, 액션물 등 장르는 다양한데, 비슷한 영화 같고, 이미 예측 가능한 캐릭터와 플롯이 전개되면서 분명 처음 보는 영화인데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旣視感)이 든다. <극한직업> 역시 그런 요소들이 많다. 한국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조폭과 경찰, 인물의 성장 서사까지 준비된 재료는 비슷했다. 그런데 이런 재료들로 흥행공식을 버무리는 대신 <극한직업>은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하며 끝까지 웃음으로 일관한다. ‘이쯤에서 대중들은 이런 걸 원해!’라며 다른 영화에서도 통했던 법칙들이 흘러들어올 여지를 <극한직업>은 허락하지 않는다. 실제 상황이었으면 울며 포기했을 상황들, 남 탓하며 제 살길 찾아가는 게 상책일 순간들에 어김없이 웃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뭘 먹었는지도 모르고 포만감만 가득한 뷔페가 아니라 코미디라는 단품 요리를 제대로 먹은 느낌을 준다.
이성복 시인은 일상에서 사소한 것으로 밀려난 것들이 문학 판을 짤 때는 제일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에 쓰레기통을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시를 통해 자기 안에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것은 찬란한 무대 위에서 모두의 동경을 받기 마련이다. 거기에 상찬의 언어 하나를 보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무대 뒤 커튼을 젖혀줘야 한다. 무대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자리를 지켜주고, 채워주는 일이 일상인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맙고 가치 있는 일인가를 누군가는 일깨워줘야 한다. 그게 예술이 할 일이고, 신앙이 해야 할 일이다.
영화 <극한직업>은 그렇게 무한경쟁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생존과 생의 의미를 찾아 애쓰는 이들에게 당신의 자리가 극한 곳이 맞다며 위로해 준다. 열심히 살았지만,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능하다며 타박하는 대신 우리의 내일이 괜찮을 수도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준다. 영화 <극한직업>의 웃음이 고마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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