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오늘날의 좌우 프레임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하는 한국의 ‘양심적’ 우익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민국을 만들어간 선조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중략) 무엇보다도, 이 책에 등장하는 학병세대의 다수는 기독교인들이다.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이끌어간 기독교의 역사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독교 하면 떠올리는 혐오와 배제의 종교, 극우보수의 이미지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본문 중)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청년들(홍종락)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서평

김건우 | 느티나무책방 | 296면 | 17,000원 | 2017.3.31

 

홍종락(번역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은 온전히 공화당 정권의 전유물일까? 밑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누구인가?” “1970년대 농촌사회를 바꾸어나간 ‘새마을 운동’은 어디에서 누구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진보와 좌파, 보수와 우파를 동일시하는 생각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은 모두 좌파인가? 같은 맥락에서 우파는 다 보수 진영에 속하는가?” “1950년대 후반 자유당의 독재에 자유와 민권을 내세우며 대항 진영을 구축한 이들은 이념적으로 어디에 속한 그룹인가?” “1970년대 유신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화 진영’을 구축한 중심인물은 누구인가. 이들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이 모두가 저자가 서장에서 던지는 도발적 질문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1960-1970년대에 걸친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사람들이나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나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11쪽)이라고 답한다.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건설한 이들, 정치 경제를 넘어 매우 폭넓은 영역에 걸쳐 아주 많은 것들을 기획하고 실행한 이들로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바로 1920년 전후의 다섯 해 사이에 태어난 ‘학병세대’다. 이들은 친일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남북대결의 장에서 남한을 선택한 월남 지식인들로 반공 문제에서도 부담이 없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학병세대의 명단은 화려하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 그리고 이들의 선배격인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등과 후배격인 천관우, 이기백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기도 했다.

 

(상)-좌측부터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중)-좌측부터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하)-좌측부터 조지훈, 김수영,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이기백.

 

기본적으로 서구 지향의 세계주의자였던 이들은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는데, 그들은 총체적 근대화를 지향했다. 경제적 근대화가 산업화, 정치적 근대화가 민주화, 문화적 근대화가 새문화 창조였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산업화의 밑그림을 박정희 세력에게 제공했고, 군사독재정권이 산업화를 빌미로 삼아 정치적 문화적 근대화를 거부하고 정치사회적 자유를 억압하자 정권에 맞서 싸웠다.

이렇게 보면, 경제성장은 우파가, 민주화 운동은 (종북)좌파가 했다는 식의 구분은 설 자리가 없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등을 필두로 196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 사상의 집적체와 같았던 <사상계> 그룹을 보자. 그들에게 “근대화는 반공과 ‘논리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침투를 막으려면 사회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논리”(66쪽)였는데, 김수환 추기경에게서도 동일한 논리를 볼 수 있다.

경제민주화와 경제정의를 촉구할 때마다 등장하는 좌파, 빨갱이라는 매도도 현대사를 들여다보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46년 여름 미군정청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나라 만들기’의 과제와 관련하여 선호하는 체제로 14%가 자본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꼽은 반면, 절대다수인 70%가 사회주의를 꼽았다. 이 시기 대중이 이처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를 지지했기에, 보수 우익 정당 한민당조차 사민주의적 정책을 일부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해방기의 이념적 분위기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제정된 제헌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1940년 임정이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 헌법에 담긴 ‘계획 경제’, ‘대규모 주요공업의 국영’, ‘토지 사유의 제한’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런 제헌헌법을 가능하게 한 그 많은 중도파의 정신은 또한 학병세대를 통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마지막 장에 담겨 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에서 좌익이 집권한 적은 없다. 1950년대 후반 한국 근대화의 플랜을 제시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 <사상계> 그룹의 성향은 분명히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 해방 후 제도권 정치의 역사에서 중도 노선 정당조차 살아남은 적이 없다.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의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말하면서 보수 우익 일부에서 틀 지은 ‘좌우 프레임’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념의 스펙트럼은 넓고 우익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은 ‘우익’을 독점하려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좌우 프레임’으로 득을 얻는 이는 누구인지, 따져보아야 할 이유도 이런 역사에 있다. (274쪽)

이렇게 이 책은 오늘날의 좌우 프레임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하는 한국의 ‘양심적’ 우익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민국을 만들어간 선조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묘미는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는, 설계자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인물 열전, 세대 평전으로서의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등장하는 학병세대의 다수는 기독교인들이다.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이끌어간 기독교의 역사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독교 하면 떠올리는 혐오와 배제의 종교, 극우보수의 이미지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 책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기독교인들의 기개와 희생, 원대한 꿈 등을 복기하게 만들고, 지금 한국 기독교의 모습 또는 이미지가 원래 그랬던 것도 아니고 불가피한 것도 아님을 기억하게 해준다. 좌우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 위치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서평을 마치기 전에, 이 책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한 기독교인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고 싶다. 잊고 살다가도 그 이름과 삶의 궤적을 떠올릴 때마다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 이름. 김교신 선생에 대한 기록은 이 책에서도 영롱하게 빛난다. 그의 제자 류달영을 통해 이어진 농촌 운동의 꿈은 새마을 운동의 밑그림으로 이어졌고, 그의 영향을 받은 장기려가 의료보험 제도의 모델이 된 청십자 의료보험을 만든 것도 다시금 떠올리게 해준다. 김교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평한다.

평교사로 마흔네 살 짧은 삶을 살았고 수백 명 구독자가 있던 잡지를 발간했을 뿐이지만 류달영, 장기려, 이춘갑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육성함으로써 그는 교육자 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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