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기독교는 유전자 기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과학의 발전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출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순응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자들을 비난하며 꼰대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진 논리로 소리 높여 반대만 할 것인가? 어쩌면 과학자들은 신학자와 철학자의 목소리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질주하는 과학의 발전에 윤리적 가이드를 해 줄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
생명과학에 비전을 제시하는 기독교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서평
김응빈 외 지음 |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 | 292쪽, 15,000원
최경환 (과학과신학의대화 기획실장)
생체실험이나 유전자 조작은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요즘 인기를 끄는 마블(MARVEL) 영화의 주인공들도 알고 보면 대부분 유전적 돌연변이나 생체실험 때문에 탄생한 슈퍼 히어로들이다. 무병장수는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이며, 내 자식을 좀 더 건강하고 똑똑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모든 부모의 공통된 욕망이다. 현대 과학이 이렇게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켜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만 사용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마는, 이와 전혀 다른 미래도 상상할 수 있다. 슈퍼 히어로 영화만큼이나 꾸준하게 나오는 좀비 영화를 보라.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이 좀비로 변해 도시를 지배하는 이야기는 테크노 유토피아의 반대면이다(139쪽).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실험실에서는 과학자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무서운 실험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계의 혁명으로 불리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은 생명과학의 영역을 넘어 이제는 곤충, 동식물, 사람에 이르기까지 널리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이 기술을 이용해 말라리아 모기가 병원충을 옮기지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돼지의 수정란에서 사람에게 해로운 바이러스 유전자를 유전자 가위로 제거한 후, 그것을 성체로 키워 인간에게 안전하게 장기를 이식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103-109쪽).
장차는 부모의 유전자 중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사전에 제거하거나 교체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에이즈부터 암, 각종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린다. 유전자 가위 기술의 효과를 예측한 벤처 기업들이 이런 유전자 치료법을 상용화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들을 제어할 길은 없어 보인다. 더 나아가 인간 배아 유전자를 편집하는 시도들이 2015년부터 은밀하게 시도되고 있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송기원 교수는 과학자들조차 현대 유전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고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기술과 정보는 지금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게 인간에게 주어진 이 막강한 기술과 능력이 과연 인류에게 재앙이 될지 축복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윤리적 논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지금은 논쟁이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송기원 교수가 제기하는 몇 가지 이슈에 덧붙여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18-122쪽).
첫째, 현재 과학자들은 ‘유전자 편집’ 혹은 ‘유전자 교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이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정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건강하고 튼튼한 유전자는 좋고, 약하고 병든 유전자는 나쁜 것인가? 과연 유전자 자체에 좋고 나쁨, 혹은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둘째, 이런 유전자 교정에 대한 결정 권한은 누가 가져야 하는가? 국가? 기업? 개인?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유전자 진단 비용을 지불해 건강한 인간을 선별하고 우수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가 이런 생체권력을 가지는 것은 지난 세기 인간을 차별하고 분리하고 살상하게 했던 집단적 광기의 우생학을 떠올리게 한다.
셋째, 만약 우리가 유전체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생로병사의 조건을 넘어 더욱 아름답고 강하고 똑똑한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이 기술을 단지 질병 치료에만 사용한다고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장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성형외과술은 이제 아름다움을 위한 시술로 변해버렸다. 필요와 욕망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유전자 교정을 통해 건강한 신체를 얻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은 윤리적으로 뭔가 께름직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수는 없는 영역처럼 보인다.
넷째,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 야채, 과일, 돼지, 소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유전정보를 인간이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다면, 인간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 기술을 적용할 것인가? 자연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 낸 생명체를 유전자 가위를 통해 순식간에 변경, 조작, 추가한다면, 과연 이런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인간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자연세계의 다양한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성, 소멸, 진화의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공생과 공멸을 해왔다. 인간이 생명체의 속도를 갑자기 조절해도 되는 것일까?
다섯째, 앞으로 유전자를 분석하고 편집하는 기술에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고 많은 기업들이 달려들 것이다. 생명을 다루는 신중한 기술이 자본의 압력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다. 경제적 부의 차등에 따라 유전자 정보가 한쪽으로 편중될 수 있고, 자연히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정보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예전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몸뚱이 하나는 공평하게 신에게 부여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앞으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유전자 기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과학의 발전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출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순응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자들을 비난하며 꼰대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진 논리로 소리 높여 반대만 할 것인가? 어쩌면 과학자들은 신학자와 철학자의 목소리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질주하는 과학의 발전에 윤리적 가이드를 해 줄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여러 집단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합의를 도출해야 할 때다. 생명과학이 가져올 미래가 불안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이에겐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방향을 정하지 않고 진보한다. 과학은 자체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기독교가 해야만 한다.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당장은 모른다 할지라도, 인류가 나아갈 큰 그림을 제시하고 희망과 비전의 청사진을 그려주면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기독교인 과학자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우리 사회를 위한 공동선 추구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분별하며 감시하고 참여하고 변혁하는 창조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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