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5일, 기윤실 바른가치운동본부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긴급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패널로 참여한 세 분(정종욱 변호사, 홍순철 박사, 백소영 교수)의 글을 3회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정종욱(기독법률가회 연구위원장, 변호사)
“변호사님의 의견이 과연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 전 기윤실에서 주최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관련 긴급 토론회에 발표자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기윤실 측의 요구는 토론회를 개최하기 전에 해당 판결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을 요약하고 해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발표 마지막 부분에 낙태죄 위헌 판결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는 “여성 인권 차원에서 보면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판결이고, 헌법불합치 판결의 의미는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관련법이 시대에 맞지 않는 문제가 있으니 사회적 합의를 통해 수정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청중 질의 시간에 목사 한 분이 필자에게 위의 질문을 던지셨다. 그분은 필자의 의견이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확신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낙태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기독교적’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일부 교계에서는 큰 반발이 일어났다. 반발의 요지는 헌법재판소가 아무런 제한 없이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역설하며, 태아를 인위적으로 소멸시키는 행위는 살인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생명을 존중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세상에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지만, 이번 헌재 판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법률과 같은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적 시각이라고 가정했을 때, 부득이한 사유로 임신중절을 한 교인을 교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해야 할까?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낙태 행위를 한 교인에 대해 교회가 권징을 해야 할까? 아니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용서해줘야 할까? 답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교회의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권징을 해야 한다고 할 것이고, 죄에 대한 용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교인을 용서하고 교회가 그들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처럼 낙태 문제는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며,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내부에는 합의된 견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낙태죄와 관련된 문제는 다양한 쟁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입장만 가지고는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법률, 철학, 신학, 종교, 의학, 생명 윤리, 생명 공학, 경제학 등 여러 방면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동일한 사안이라도 법률적인 판단, 철학적인 판단, 과학적인 판단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 낙태죄가 위헌이 되었다고 해서 낙태 행위를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낙태죄와 관련된 사안이 가지는 복잡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인들의 교리적인 잣대만을 가지고 복잡한 사안을 단순하게 재단하려고 한다. 낙태죄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이 일반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도 크게 작용한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에 관하여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이유는 일부 기독교인이 비판하는 것처럼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낙태죄 폐지가 곧 낙태에 대한 전면적 허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헌법재판소 판결의 의미는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전에 제정된 현행법이 오늘날의 복잡한 현실을 규율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적절하게 국민적 합의를 거쳐서 관련법을 수정해보자는 의미이다.
헌법재판소가 판결을 내릴 때 ‘단순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로 판결을 내린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헌법불합치’는 변형 결정 중의 하나인데, 해당 법률을 즉시 무효로 하는 ‘단순 위헌’ 결정과는 달리, 법적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유예기간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헌재가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에 따라서 2020. 12. 31.까지 관련법을 개정할 책임이 국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지속적으로 형법상의 낙태죄 조항이 실효성 없는 주장임을 지적해왔다. 한 해에 낙태가 이루어지는 횟수는 10만여 건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기소가 되는 횟수는 한해에 10여 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 판단했다. 형벌은 위하력을 발현하여 범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는데, 낙태죄 조항은 해당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는 것이다.
또한 형벌의 위하력이 제대로 발현된다고 하더라도, 저소득층은 이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음성적인 방법으로 낙태를 해 생활에 더 큰 곤란을 겪게 된다고 헌법재판소는 말한다. 임신, 출산, 양육은 개인의 결정이지만, 산모가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사회 환경은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헌법재판소는 산모의 자기결정권 보장과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개선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임신한 여성을 처벌하고 있다고 국가를 강하게 비판한다.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대립적인 구도를 넘어서, 두 주체의 기본권이 적절하게 조화되는 방향으로 관련법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모와 태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주체들인데, 이 둘을 대립적인 구도로 보아 한 주체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산모와 태아의 관계를 ‘가해자 대 피해자’의 관계로 고정시켜서는 낙태에 대한 바람직한 해법을 찾기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와 위헌 판단을 한 7인의 헌법재판관들 누구도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으며,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하고 있지 않다.
모자보건법에서 5가지 예외 사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기에는 법 자체가 오래되었고, 형벌 조항이 사문화되는 등 그 실효성 자체가 의문스럽기 때문에 법률을 개정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낙태를 억제하겠다는 초기 입법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낙태는 음성적으로 만연하게 되었고, 낙태죄 조항이 여성들에 대한 상대 남성들의 보복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었다. 법률은 현재의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낙태에 관한 조항은 사실상 그 능력을 상실하고 있으니 국민들의 합의를 거쳐서 적절한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헌법재판소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낙태죄에 관해 기독교계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을 보고 있자면, 목회자와 교인들이 지나친 ‘법 만능주의’ 혹은 ‘형벌 만능주의’에 빠져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의 생활에서 법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법은 결코 인간 생활 전부를 규율할 수 없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보다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도덕성과 윤리적 능력을 발휘해 풀어야 할 문제들을 법을 의존해 해결하다 보면 오히려 인간의 자율성을 축소시키고, 생활 세계를 법의 통제 아래 가두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성경도 법조문의 강제력이 아닌 은혜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던가?
형법에 낙태죄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낙태를 막는 데는 늘 실패해 왔다. 이번 헌법불합치 판결로 최후의 방어선이 해체된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위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기독교는 낙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 형법의 실패는 곧 교회의 실패이기도 했다. 기독교는 낙태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 입장을 전혀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약자를 보호해야 할 교회의 책임을 저버리고 형법 조항에만 그 책임을 미뤄왔던 것은 아닌가. 철저히 반성을 해야 한다. 이번 판결을 통해 기독교는 ‘형벌의 종교’를 넘어 ‘사랑과 용서의 종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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