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어떤 명령들부터 실천해 보아야 할까요? 출발점은 당연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들이므로, 진지하게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말씀들을 천천히 익히고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아래에서 산상수훈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내용을 언급하고자 합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하나님의 나라,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라의 실재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3).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령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요 3:8).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그것을 별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약속하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신 성령님을 알지 못하니 신앙생활의 가장 좋은 부분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자녀들이 거지 옷을 입고 사는 것이고, 차려준 잔칫상을 앞에 두고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 목자를 곁에 두고도 스스로 목자 없는 양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먼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잘 배워야 하며 또 진지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이를 가르치려고 애써야 합니다.[1]
한편,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 중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빛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에게 속기에 딱 좋은 상태입니다. 신비한 것이 다 영적인(즉, 성령님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름과 직접 관련된 것이라야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체험들을 분별하지 않고 좇아가다가 어리석은 선택에 빠지고, 환멸감을 느끼며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2]
그러면 예수님의 어떤 명령들부터 실천해 보아야 할까요? 출발점은 당연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3]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들이므로, 진지하게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말씀들을 천천히 익히고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아래에서 산상수훈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내용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산상수훈 말씀들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상과 세계관입니다. 사상은 ‘생각의 체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배우지 않은 사람을 그분의 제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알아야 예수님이 하신 개개의 말씀들을 의미 있게 관련지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의 전체 체계를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여러 번 반복하여 읽으며 전모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 시리즈의 글들도 그런 작업의 결과이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전체 구도를 간략히 제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사상’이 하나의 건축물이라면 ‘세계관’은 그 건축물의 기둥들입니다. 세계관이란 우리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기본적인 신념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감추어진 신념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다른 이질적인 세계관과 충돌하는 순간에만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세계관과 나 자신의 세계관이 충돌할 때라야, 예수님의 세계관에 비추어 나의 세계관을 검토해 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예수님을 믿은 신자라고 해서 우리의 세계관이 예수님과 일치하리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헬, 메타노이아: 생각을 돌이킴)는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변화 과정인데,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는 최초의 회개(예수님께로 돌아옴) 이후에도 평생 계속해서 회개를 반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이런 세계관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드러나는 나의 뿌리 깊은 신념들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며 뜯어내고 고쳐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세계관과 충돌하게 하려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부적절한 느낌이 들 수도 있고 때로는 거부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세계관이나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세계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세계관에 따른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통해 ‘나는 예수님과 어떻게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서, 직장 상사나 직원에 대해서 어떤 기본적인 신념들(즉, 세계관의 요소들)을 갖고 있고, 그런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과 충돌할 경우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곤란함과 거리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네 오른쪽 눈이 너를 덫에 걸리게 하거든 그것을 빼내어 너에게서 멀리 던져버려라. 네 지체 중 하나를 잃어버리고 네 몸 전체가 게헨나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너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마 5:29)라는 말씀을 읽을 때, 마음에 어떤 거리낌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일으키는 두려움과 거리낌을 회피하기 위해, ‘이건 너무 심한 말씀 아니야? 비현실적이야’라고 생각하거나, ‘이 표현은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돼. 다른 걸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일 뿐이야’라고 이해하면서 빨리 지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빨리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나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시 머물러 그 감정의 뿌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어떤 기본적인 신념(즉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에 어떤 새로운 신념을 주시려고 하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를 들면, ‘나는 죄를 어쩔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반면에, 예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죄와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구나. 나는 죄가 사소한 문제라고 믿고 있지만, 예수님은 죄를 짓는 것이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중대한 문제라고 보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글로 적어볼 수도 있고, 하나님과 기도하며 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나려면, 일단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순종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눈을 빼내기 전에’ 즉,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나의 문제를 발견해야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말씀을 여러 번 실천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실제로 행동으로 순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동을 반복해야만 세계관이 바뀌게 됩니다. 자전거를 실제로 타 보아야만 자전거 타는 법이 우리 뇌에 형성되는 것처럼, 몸이 움직여야만 뇌 속의 오래 고착된 영역이 변화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상과 세계관을 배울 때 우리의 변화가 온전하고 지속적인 변화가 되며, 삶의 양식 자체의 변화를 낳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게 만듭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읽을 때, 성경공부 시간과 묵상의 시간을 따로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공부는 기록된 본문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참고자료를 가지고 본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최초 기록 당시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온전히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인도자의 도움을 받거나, 신뢰할 만한 참고 자료들을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4] 이렇게 공부를 마친 본문을 가지고 묵상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묵상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본문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고, 직접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고,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나는지 성찰하고, 그 내용을 주제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입니다. 이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경 본문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심층적인 적용이 일어납니다. 이미 성경공부를 끝낸 본문을 일주일이나 그 이상 충분히 반복하여 묵상하기를 추천합니다. 묵상의 목표는 새로운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을 지배하는 세계관의 깊이까지 스며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나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스스로 성찰해보고 그 내용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어리석은 방향으로 나갈 때, 형제자매들이 우리를 바로잡아 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과정에서는 영적인 지도자를 포함한 공동체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성령은 개인의 영이 아니라 교회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시는 영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소유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교회가 함께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로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경험해 본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시작하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 전체 그림으로 돌아가 요약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는 소식이 전파되었고,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 각자에게는 성령님이 개인적으로 내주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하나님 자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 삶의 가장 복된 부분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 각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고자 하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들은 하나하나가 성령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활짝 열어젖히는 열쇠들입니다. 그 말씀들을 통해 성령님이 일하시며 우리의 사상과 세계관을 예수님의 사상과 세계관으로 바꾸어 나가십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모두 예수님의 사상과 세계관을 마음에 품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공동체가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소명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음성』, 윤종석 옮김(IVP, 2016)이다.
[2]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행위의 중요성과 그 실천이 일반적인 계율을 율법주의적으로 실천하는 것과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지는 지난번 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제자도”에서 다루었다.
[3] 산상수훈이란 ‘산 위에서 베풀어주신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서, 마태복음 5-7장에 담긴 내용이다.
[4] 추천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스캇 맥나이트, 『산상수훈』, 최현만 옮김(에클레시아북스, 2016)와 존 스토트,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 정옥배 옮김(생명의말씀사, 201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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