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갈망하고, 서로에게 열려 있으며, 함께 활동하십니다. 삼위일체 안에 내재한 공동의 선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신적 경륜으로 주관하시는 공동 활동을 통해 일관되고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속성이 일치하시고, 내재적 공동선과 경륜적 공동선도 일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공동선은 이처럼 성부-성자-성령의 삼중 관계가 하나님-나-이웃의 삼중 관계에 반영(reflection)이 되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본문 중)
[따듯한 사회를 위한 공동선②]
셋이 하나 될 때 시작되는 좋음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C.S. 루이스, 제럴드 싯처, 이 세 사람은 모두 불후의 명작을 남긴 기독교 저술가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극한의 고통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 박완서 선생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하나님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라고 절규를 토해냈습니다.[1] 가족이 셋이었다가 둘이 되고, 둘이었다가 홀로 남겨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면, 이 세상에 좋은 것이라고는 어느 구석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마치 차갑고 거대한 빙벽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감미로움이나 기쁨 대신 구역질 나는 슬픔이 되고 맙니다.
만약 이러한 고통을 겪은 어머니 앞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었다면 그는 어떤 말을 건넸을까요?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생성과 소멸의 운명에는 예외가 없는 법이라고. 그래서 고통이 있는 것이라고. 기가 막힌 어머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렇게 되묻겠지요. 그러면 신은 나의 아픔을 느끼고 계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어머니에게 유감스럽지만 신은 세상의 모든 운동의 원인이지만 정작 자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이기에 그 어떤 고통에도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머니에게 무슨 위로나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월의 따사로운 태양 아래 무참히 쓰러져 간 자식들을 40년 가까이 가슴에 묻어온 어머니들에게 철학자의 하나님은 무정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증언합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 하나님은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는 분이시다’라고. ‘어머니들의 아픔을 체휼하시며 하나님은 지금 함께 울고 계시다’라고. ‘하나님은 거대한 악으로부터도 우리가 지금은 알 수 없는 선을 장차 만들어내실 것이다’라고. 요한이 들었듯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 것이다’라고. 성서가 이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단순한 일자(Monad: 홀로 존재하며 나뉠 수 없는 궁극적 실체)로서 냉정한 ‘부동의 동자’같은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시며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프랑스 작곡가 자끄 베르띠에(Jacques Berthier, 1923-1994)가 지은 떼제 공동체의 찬미 가사입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 노래에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이 노래를 읊조리고 있으면 중세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성 빅토르의 리샤르(Richard de Saint-Victor, 1110-1173)가 떠오릅니다.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와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이 있고, 그 사랑은 둘의 관계를 넘어 흘러넘쳐서 풍성해지는 제 3자가 있을 때 완전한 사랑이 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사랑으로 계시되었으며 그 사랑은 나눔을 통해 완성되는 완전한 연합이다.’[2]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좋은 것을 상대에게 베푸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고의 선을 가지신 세 위격의 풍성한 교제에 본래의 온전한 사랑이 있습니다. 좋으심을 나누는 것이 삼위 하나님이 일체로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성부의 좋으심, 성자의 좋으심, 성령의 좋으심을 나누는 가운데 흘러넘치는 좋으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흘러넘치는 좋으심은 사랑의 대상을 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좋으심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 하나님의 흔적을 지닌 만물에 반영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갈망하고, 서로에게 열려 있으며, 함께 활동하십니다. 삼위일체 안에 내재한 공동의 선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신적 경륜으로 주관하시는 공동 활동을 통해 일관되고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속성이 일치하시고, 내재적 공동선과 경륜적 공동선도 일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공동선은 이처럼 성부-성자-성령의 삼중 관계가 하나님-나-이웃의 삼중 관계에 반영(reflection)이 되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의 첫 부분에서 ‘모든 선한 것으로 가득한 풍부함’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 형상을 ‘모든 선함의 원천이자 출처’라고 말하면서 선함이라는 개념을 씁니다.[3] 선하심은 온전한 하나님 형상을 구성하는 특성들 중 하나라는 것이지요. 칼뱅이 볼 때,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을 인간에게 주는 ‘수여자’(giver)이시고, 인간은 그 선을 받는 ‘수령자’(receiver)입니다.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나님 형상을 반영하고 확장합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해서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기에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영국의 조직신학자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는 칼뱅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에드워즈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좋으심’(goodness)에 관한 고전적 표현까지 죄다 삼위일체라는 관계적, 공동체적 렌즈로 설명했습니다. 삼위일체를 ‘선하심’(goodness)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지요. 먼저 리브스는 선하기 위해서는 선을 베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신이 영원토록, 그리고 본질적으로 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위에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을 아래와 같이 꺼냅니다.
신은 영원토록 그 자신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 피조물들의 영원한 원인이어야 하고, 이는 우주가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분은 영원히 자신의 선함을 우주에 내어주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은 영원토록 자기를 내주는 선한 존재다. 영원토록 우주에 자신을 내주고 선을 베풀기 때문이다.[4]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선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선을 베풀 대상인 세상을 전능하게 창조하고 사랑으로 섭리하는 존재는 되지 못합니다. 이에 반해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하나님은 무언가를 취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존재와 생명과 선하심을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보았습니다.[5]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위한 공동선의 원천이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생명과 선함을 나누기 원하시는 분이고, 피조물에게 베푸시면서 기쁨을 찾습니다. 또한 창조는 성자를 위한 성부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성부는 성자와 함께 머물기를 기뻐하시고 선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신학자 리브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상호성, 관계성이 좋음의 전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보시고 좋다고 외치신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되살린 이슬람 철학자 아부 하미드 알 가잘리(Abu Hamid al-Ghazali, 1058-1111)는 “신은 정말로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존재의 총화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슬람의 알라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기에 “우주는 그림자요 불확실한 존재”라는 것이지요.[6]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신학자인 자끄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은 절대 초월자 알라에게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관계적 사랑의 부재 혹은 결핍을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는 알라가 “아주 높은 곳에서 완전한 독단 속에서 신자를 위해 자비를 나타내는 주권자”일 수는 있지만 “약함과 고통을 나누려고 자신이 자비를 베푸는 자의 삶 자체에 관여하는” 성서의 하나님일 수는 없다고 적시합니다.[7]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이나 이슬람에서 말하듯이,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다른 존재를 성가신 존재, 귀찮은 존재, 경쟁적 존재로 보지 않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인식합니다.
초기 기독교를 위협했던 영지주의는 처음에 악으로의 타락이 있고, 창조는 그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일자 혹은 절대자 외의 모든 존재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세계는 공동선의 시공간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영지주의자는 아담이 혼자일 때가 좋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두 가지 성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악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성을 악한 존재라고 보았으니까요. 이러한 영지주의의 주장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돌봄의 관계가 사회적 공동선의 토대를 구성한다는 종교개혁가 칼뱅의 입장과 대조됩니다. 신학자 리스브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무슬림과 같이, 유일하고 고립된 존재를 선한 것으로 보고 관계적이고 상호적인 존재를 좋지 않은 상태, 악한 것 내지 타락으로 인식합니다. 좋음에서 점점 덜 좋음이 나오고, 나아가 더 나쁨이 나오는 것이 창조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창조의 과정은 공동의 선이 아니라 그저 공동의 악이 배양되었던 것이라고 치부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최고선이자 공동선이신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강조합니다. 리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충만하시고 흘러넘치시고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누군가의 곁에 있기를 기뻐하시고 사랑을 충만하게 쏟아 내시는 가운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신다. 창조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퍼뜨리고 발산하고 외부로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은 탐욕스럽고 굶주리고 이기적인 존재와는 정반대다. 하나님은 자기를 주심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명과 선하심을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시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들을 선한 것들 가운데서 누리는 행복을 떠나 하나님 자신에게로 오도록 불러들이시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만 선함과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8]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풍성히 주시고 아름다운 인격적인 존재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생명과 인격을 허용하시는 사랑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등질 가능성도 열어 두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여기에 악의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지는 않았지만, 피조물이 하나님을 거역할 자유를 허용하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악에 맞서면서,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서로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이 더불어 좋은 삶입니다. 이처럼 공동선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신적 존재에 온전한 토대를 둘 수 있는 삶의 양식입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1563년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보는 ‘좋은 삶’(good life)의 방식에 대한 요약입니다. 그런 삶은 또한 ‘더불어 좋은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자기 현시(self-manifestation)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 철학이나 이슬람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에게 더불어 좋은 삶을 적극적으로 형성해주는 존재라기보다는 냉엄한 심판자에 가깝습니다. 공동선의 바탕이 되는 사랑과 교제의 삼위일체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지요.
이와 같은 인식에서 옥스포드의 조직신학자 폴 피디스(Paul Fiddes)는 삼위일체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목회와도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지적하며, ‘삼위일체는 고립된 자아의 존재 양식이 아니라, 관계 속의 자아로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9] 상호 작용하며 열려 있는 존재만이 고난을 겪는 자들과 단단히 묶이는 연대로 악에 대항하며 인간의 번영(human flourishing)을 이루는 공동선의 삶을 가능케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프린스턴의 조직신학자 다니엘 밀리오리(Daniel Migliore)도 인간과 세계의 근원, 즉 원형이 되시는 하나님은 소통하고 타자를 긍정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랑 가운데 이미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10]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을 공유하는 분이시고, 타자를 창조하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누어준 것을 공유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창조세계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세계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교제 방식을 반영할 때, 하나님의 선함을 오롯이 공유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 우주는 공동선으로 곱게 물들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보여주는 춤, 드라마, 또는 양식(pattern) 전체는 우리 각자의 생명 속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각 사람은 그 양식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 춤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외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쁜 것뿐 아니라 좋은 것도 전염됩니다. 따뜻해지려면 불 가까이 가야 합니다. 몸을 적시려면 물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 제 표현대로라면 ‘좋은 전염’을 시키기 위해 –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11]
[1]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04), 36.
[2] 성 빅토르의 리샤르, 『삼위일체론』, 3.11.
[3] 장 칼뱅, 『기독교강요』(1559), 1.1.1; 1.2.2.
[4] 마이클 리브스, 『선하신 하나님』 (복있는사람, 2015), 65-66.
[5] Jonathan Edwards, Works of Jonathan Edwards (Yale University Press, 1957-2008), vol. 8, 448-459.
[6] 마이클 리브스, 『선하신 하나님』(복있는사람, 2015), 82-83.
[7] 자끄 엘륄, 『이슬람과 기독교』(대장간, 2009), 87-105, 118-121.
[8] 마이클 리브스, 『선하신 하나님』(복있는사람, 2015), 88.
[9] Paul Fiddes, Participating in God (Westminster John Knox, 2000), 15-28.
[10]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개론』(새물결플러스, 2014), 128-173.
[11]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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