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종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 U2가 믿고 바라보는 장차 임할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실 ‘시작’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자 몰트만은 기독교 종말론은 ‘희망학’이라고 말했다. 즉, ‘종말’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 또는 묵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시작된 선취적 사건이며, 파멸과 소멸의 끝(finis)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며 목적(telos)이다.(본문 중)
윤영훈(성결대학교 신학부 교수, 『윤영훈의 명곡 묵상』 저자)
이 노래는 어쩌면 ‘믿음’보다는 ‘의심’에 대한 노래인지 모른다. (Bono)
1987년에 발매된 앨범 <Joshua Tree>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반으로 기억된다. 음악적으로도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냈지만, 기독교적 측면에서도 앨범 전체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기독교 영성의 진수들이 담겨있고, 또한 신의 나라라고 자칭하는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도 나타난다. 한 인터뷰에서 보노는 자신들의 노래가 신앙고백에 기초하기 보다는 삶의 실존 속에서 지속될 수밖에 없는 갈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보노가 위에 언급한 ‘이 노래’는 <Joshua Tree>의 타이틀곡이며 U2의 최고의 히트곡인 “당신이 있든 없든”(With or without you)이다.
당신과 함께이든 당신 없이든, 난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With or without you, I can’t live with or without you.
(U2, “With or Without You”)
언뜻 보면 남녀 사이의 사랑과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속뜻은 인간이란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고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인간의 무신론적 욕망은 신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신 없는 자유를 꿈꾸지만, 또한 동시에 신 부재의 삶에 닥쳐올 혼란과 무질서를 두려워한다. 이 노래는 그 고뇌에 대해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노래의 화자는 이 고뇌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것을 다짐할 뿐이다. 이처럼 U2의 노래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와 신앙과 회의 사이의 영적 순례를 미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심, 두려움, 분노, 이런 단어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말들이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문들이 마음에 가득하지만 애써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성서와 그 안의 인물들에게 이 문제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U2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노래가 “나는 내가 구하는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이다. 이 노래는 <Joshua Tree>에 삽입된 곡이며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명곡으로서, U2가 스스로 밝힌 대로 가사와 음악 모두에서 가스펠송임을 표방한 곡이다. 하지만 다른 복음성가와 달리 이 노래는 결코 상투적인 종교적 확신과 신앙고백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제목처럼 그들은 “갈구하는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라고 노래하며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표현만 나타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일부 기독교인들은 U2가 이전의 신앙을 상실했다는 비평과 함께 실망을 표현했고,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매일의 삶 속에서 끝없이 신의 존재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고뇌하는 나약한 인간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높은 산을 오르고, 저 들판을 달려 왔습니다.
오직 당신과 함께 하기 위하여.
나는 달리고, 뒹굴며, 이 도시의 담을 해매며 다녔습니다.
오직 당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러나 나는 내가 구하는 것들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꿀 같은 입술에 키스하며, 그녀는 나를 치유했습니다.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내 마음의 타오른 격정으로
나는 천사의 말을 하기도 하고, 악마와 손을 잡기도 합니다.
그 밤은 몹시 따뜻했지만, 또한 돌같이 차가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구하는 것들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1절에서 노래 속의 구도자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는 높은 산을 넘고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고, 각박한 도시의 담들을 헤매고 다니며 신을 찾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신의 부재와 허무감이 있고 답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2절에서 그는 때론 천사의 말을 하며 경건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내 악마와 손잡고 거짓과 쾌락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쾌락도 그에겐 궁극적 만족을 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뜨겁게 타오르다가 이내 차갑게 변해버리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의심하고,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는, 모든 영적 구도자들의 솔직한 고백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의심은 믿음의 반대말이 아니다. 진지하게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당연히 의심하며 신 앞에 질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믿음과 의심은 ‘궁극적 관심’의 양면이며, “믿음의 역동성은 인간이 가진 궁극적 관심의 역동성”이라고 말했다. 즉 의심은 건강한 믿음을 향해 나가는 ‘위험’하지만 ‘용기’있는 과정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삶은 부조리한 삶과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신의 뜻을 찾아가는 영적 순례이다. 의심을 딛고 일어선 믿음이 단순히 확신의 언어로만 채색된 신앙고백보다 더 견고하며 고결한 것이 아닐까?
나는 장차 임할 왕국을 믿습니다.
그 때에 모든 인종들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여전히 달려갑니다.
당신은 모든 속박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죠, 내 부끄러움의 십자가를.
당신은 나의 이 믿음을 아시지요.
그러나 나는 내가 구하는 것들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3절에서 화자는 이러한 의문과 고민 속에서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중요한 확신의 근거를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사 속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다. 그것은 수치와 고통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이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희망할 수 있는 근거다.
이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나는 계속 달려갑니다”(I’m still running)라는 가사에 있다.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I still haven’t found)는 부정적 고백은, ‘그래서 난 포기하고 말았다’는 허무와 좌절이 아니라, 나는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향한 여정을 계속 달려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모든 인종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 U2가 믿고 바라보는 장차 임할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실 ‘시작’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자 몰트만은 기독교 종말론은 ‘희망학’이라고 말했다. 즉, ‘종말’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 또는 묵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시작된 선취적 사건이며, 파멸과 소멸의 끝(finis)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며 목적(telos)이다. 또한 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금 이 자리로 당겨올 때, 그것은 현재를 진단하고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를 현재화 한다.
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U2는 이상적 희망과 현실적 절망, 믿음과 회의의 이중성을 노래하며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음악 여정을 지속해 가고 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과 조화가 U2가 노래한 사회적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며 성격이다.
U2는 유럽의 변방 아일랜드의 언더그라운드 스쿨밴드로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밴드로 성장해가는 놀라운 여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당대의 문화적 트렌드의 적극 수용이나 상업적 기획과 홍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았고, 끊임없이 삶의 길을 고민했다. 그들이 성취는 한결같은 우정, 공동체적 협업, 창의적 실험과 연습의 결과였다. 그들은 당대의 흐름을 역행하며 록큰롤이 잃어버린 원초적 정신을 재발견했고 새로운 스타일로 음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음악 평론가들은 U2를 고전적 록큰롤의 회복이며 동시에 모던록의 선구로 평가한다.
그들은 또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순수한 배움과 진지한 영적 묵상을 통해, 세상 안에서 그들을 향한 신의 소명을 발견했다. 여기에 기독교 문화의 진정한 방향성이 있다. 성경은 타락한 세상의 실상을 정직하게 증언하며 비판한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는 공동체성의 회복, 인류애적 격려와 나눔을 노래하되, 탐욕과 방종의 시대에 대한 비판과 그 안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픔과 고민을 진솔하게 담아 예술적 수사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주류 대중음악계에는 결여되어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U2는 과거의 명성을 재활용하지 않고 파격적인 음악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U2를 “80년대 최고의 밴드”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전성기는 오히려 16개의 그래미상을 획득한 2000년대(2001-2006, 2014)인지 모른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U2의 메시지에는 여전히 신앙과 세상을 향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들은 여전히 “나는 내가 구하는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영적인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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