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이런 공통적 양상에 유교적 스승 개념의 왜곡이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이 ‘보스’ 기질의 특징인 권위주의적 태도를 내면화했고, 이 영향으로 그릇된 목회자관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본문 중)

송인규(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조직신학)

 

오늘날 ‘목회자’는 안수 받은 지도자 개인이나 계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평신도’는 목회자가 아닌 일반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평신도’라는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지칭의 효용성을 감안하여 그냥 사용하고자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목회자와 평신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거의 500년 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교황, 사제, 군주, 농부 등]은 참으로 영적 신분의 보유자들이요 직분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1]라고 말했다. 루터에 의하면 교황이나 농부나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신분에 있어서는 동등하고(만인 제사장 원리),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직분과 관련해서라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설명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목회자와 평신도는 신분(state)에 있어서는 동등하고, 직분(office)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좀 더 알기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동등한 신분: 목회자나 평신도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신분을 갖는다.

① 목회자나 평신도나 함께 그리스도인이다.

② 목회자나 평신도나 함께 하나님의 자녀이다.

③ 목회자나 평신도나 함께 성도이다.

④ 목회자나 평신도나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⑤ 목회자나 평신도나 함께 제사장이다.

 

직분상의 차이: 목회자는 평신도와 달리 목회 사역자로서의 은사들을 부여 받았고, 이로써 평신도와 다른 직분을 수행한다.

① 목회자로서의 은사: 리더십(롬 12:8; 고전 12:28), 말씀 가르침(엡 4:11), 목양(엡 4:11).

② 목회자는 이상의 세 가지 은사를 보유한 그리스도인이다.

③ 목회자는 이러한 은사의 보유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 다른 지체들과 구별되는 직분을 수행한다.

 

그릇된 목회자관의 유행

목회자가 평신도와 같은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는데, 한국교회 안에서는 주로 후자가 강조되어 왔다. 이런 강조의 분위기가 바람직하지 않은 다른 풍조와 결합하면서 목회자는 직분에서뿐 아니라 심지어 신분상으로도 평신도와 다르다는 견해가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바람직하지 않은 다른 풍조”란 무엇인가? 한국교회 내 어떤 흐름이 그릇된 목회자관의 유행에 기여했을까? 크게 세 가지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목회자를 은연중에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다. 만일 이러한 동일시가 성경적으로 타당하다면, 목회자의 신분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그릇된” 목회자관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분명코 신분에 있어서도 일반 백성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출 28:41; 민 3:2-3).

그러나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신분상 특권의 면에서 신약 시대의 목회자와 다르다. 신약 시대에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목회자나 평신도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제사장 신분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목회자를 샤먼(shaman) 식의 중개적 존재로 의식하곤 한다. 이 점은 한국교회가 겉보기보다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인식하면 쉽게 납득이 간다. 샤먼은 신과 일반인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복과 재앙을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는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교우들에게 현세적 복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것처럼 행세하거나, 그런 존재로 간주되곤 한다. 심지어는 복뿐만 아니라 저주까지도 발화(發話)하고, 이와 관련하여 축복권·저주권을 운운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결코 샤먼과 같은 중개자도 아니며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도 없다. 우선,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와 달리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보자이시고(딤전 2:5),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한 분이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중보자가 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중보기도[도고(禱告), 딤전 2:1]가 가능한 것(엡 1:16; 6:19; 약 5:16)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신약 시대에는 누구나 상대방을 위해 축복할 수 있으며(롬 12:14; 벧 3:8-9), 복을 비는 것이 목회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저주에 대한 간원(고전 16:22; 갈 1:8, 9) 역시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권세라고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희박하다.

 

셋째, 목회자를 ‘보스’로 간주해야 한다고 여긴다. 한편,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린다”(막 10:4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관계는 타락한 세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이런 공통적 양상에 유교적 스승 개념의 왜곡이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이 ‘보스’ 기질의 특징인 권위주의적 태도를 내면화했고, 이 영향으로 그릇된 목회자관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2005년 5월, 서울 모 교회가 18,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목회자, 권위, 권위주의

일부 목회자에게서 권위주의적 태도가 발견된다고 해서, 목회자에게 ‘권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부인해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는 권위를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이기에 거부해야 하지만, ‘권위’는 부당한 것이 아니다. 어떤 조직에서도 리더가 권위가 없으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목회자에게도 권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권위’(權威, authority)란 무엇인가? 권위는 “방해 없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권리/능력”(the right/freedom to do something without any hindrances)[2]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치철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권위의 두 가지 유형, 곧 인식적 권위(epistemic authority)와 당연적 권위(deontic authority)를 구별한다.[3] 전자는 어떤 특정 분야에서 남보다 지식·경험·기술이 뛰어나서 갖게 되는 권위이다. 반면 후자는 어떤 직위나 위치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권위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권위 개념은 목회자의 목회 사역과 연관해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단지 의미를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 “당연적 권위”를 ‘표면적 권위’로, “인식적 권위”를 ‘실질적 권위’로 부르고자 한다. 권위가 “방해 없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권리/능력”이라면, 표면적 권위란 목회자가 외형상 획득하거나 부여받은 것으로서, 목회 사역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게 해 주는 조건(직분, 학위, 첫 인상 등)에서 나오는 권위를 말한다. 이와 반대로 실질적 권위는 목회 사역에서 요구되는 리더십·말씀·목양의 은사에 대한 지식, 경험, 기술과 관련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야말로 방해 받지 않고 목회 사역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목회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두 가지 권위가 다 필요하지만, 그래도 실질적 권위가 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한국 문화는 실질적 권위보다도 표면적 권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짙다.) 즉, 교우들을 이끌어 가고 말씀을 가르치며 양떼를 돌보는 ‘기술’과 ‘실력’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에게는 이 두 유형의 권위 외에도 ‘성품적 권위’라 칭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권위가 필요하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목회자들(장로들)을 권면하면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라고 한 말씀에 암시된 내용이다. 목회자가 진정으로 방해 받지 않고 목회 사역을 수행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목회자에게 확보되어야 할 권위의 유형 세 가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어떤 목회자가 표면적 권위만 중시한다면 권위주의적 태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질적 권위의 중요성을 알면 알수록 권위주의적 자세와 태도는 멀리하고자 할 것이다. 하물며 성품적 권위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목회자는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태도를 갖춤으로써 권위주의의 편견과 권위의 오용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1] Martin Luther, “Address to the Nobility,” in Basic Luther (Springfield, IL: Templegate Publishers, 1994), p. 24.

[2] Cyril H. Powell, The Biblical Concept of Power (London: The Epworth Press, 1963), p. 101, 각주 3.

[3] Richard T. DeGeorge, “The Nature and Function of Epistemic Authority,” in Authority: A Philosophical Analysis, ed. R. Baine Harris (University, Alabama: The University of Alabama Press, 1976), 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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