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의 복음전도 설교들을 살펴보면, 복음전도를 이신칭의론이나 형벌대속론, 즉 구원론 교리의 설명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의 설교들을 분석해 보면, 이 두 교리의 싹을 간신히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그들의 주된 선포 내용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교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도의 복음 전파 내용과 방식에서 멀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전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실행되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지난 세기의 전도 이해를 간략히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에 대한 20세기의 이해를 돌아보면 내용과 방법에서 몇 가지 교정되어야 할 부분이 드러납니다.

첫째로, 복음의 내용 측면입니다. 지난 세기의 전도에서 복음은 종종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개인이 사후에 천국에 가는 것’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예수님 자신을 통해 지금 도래한 천국(=하나님 나라), 즉 성령님을 통해 지금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복은 죽은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하심을 통해 지금 여기서 새 생명과 제자도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도 방법의 측면에서, 지난 세기의 전도에서는 개인 전도와 대중 집회의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만인에게 적용될 한 가지 탁월한 방법’을 찾고자 추구했고,[1] 그 과정에서 복음은 몇 가지 핵심 사항으로 축소되었습니다.[2] 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의 복음 전파 내용을 살펴보면 대중 설교에서도 몇 가지 전형적인 명제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이야기의 일부를 청중의 상황과 선이해에 맞추어 해설하고, 청중의 반응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였고(행 2:38), 때로는 복음 선포 후 일부 관심자를 더 온전한 복음 소개와 대화의 자리로 초대하였습니다(행 14:43).

셋째로, 지난 세기의 복음전도 설교들을 살펴보면, 복음전도를 이신칭의론이나 형벌대속론, 즉 구원론 교리의 설명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의 설교들을 분석해 보면, 이 두 교리의 싹을 간신히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그들의 주된 선포 내용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교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도의 복음 전파 내용과 방식에서 멀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의 설교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점이 있었습니다.[3]

(1)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우상 숭배에 빠진 인류를 향해 그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2)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이야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지만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 계획을 진행시키셨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며 만유를 회복하신다.

(3)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와 사탄으로부터 해방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4) 마지막 때의 심판: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 얻게 하는 복음이 전파되는 관대한 초대의 시기이지만,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된다.

사도는 매 설교마다 이 네 가지 요점을 빠짐없이 말하려고 하기보다는, 청중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네 가지 요점 중 한두 가지를 자세히 설명한 후, 그들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길’로 초대합니다.

넷째로, 복음을 구원 얻는 방법(이신칭의)이나 원리(형벌대속)를 기술하는 교리와 동일시하면서,[4] 복음전도는 하나님 나라 실현의 제자도라는 맥락과 분리되었고, 칭의는 성화와 분리되었습니다. 또한 복음전도 방법론도 믿음의 결단을 유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나 기술의 추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말로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인데, 전도의 내용과 목표는 예수의 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사도들의 전도에 내포된 그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사도에게 주신 사명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마 28:18-20)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목표는 예수님의 말씀들(대표적으로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제자들의 공동체,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단지 개인 구원이나 사후 천국행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 바꾸어 말하면 (1)개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2)예수님과 연합하여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3)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만유회복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전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복음이나 전도라는 말이 제자도 전체와 관련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에서는 특히 불신자에게 복음을 처음 소개하는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5] 20세기 전도에서 개인전도와 대중집회 전도 방법이 가진 공통의 전제 ‘만인에게 효과적인 한 가지 탁월한 방법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점인 비인격성과 일방성을 보완하기 위해, 보다 인격적인 양방향 소통과 온전한 복음 소개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 불신자 이웃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따듯한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전도와 관련해서도 성령님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불신자 이웃을 잘 초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님 환대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를 통해 유쾌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온전히 소개하고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보기도를 통해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임 비용을 충당하도록 물질을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적절히 기획하고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은사에 따른 역할 분담을 통해 전도를 위한 최적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임에 초대된 불신자 이웃은 몇 번에 걸쳐 복음을 인격적으로 소개받을 수 있고,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간의 상호 존중과 섬김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용적인 분위기에서 자신의 지적인 의심을 표현하고,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현재 직면한 삶의 문제가 걸림돌이나 계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 문제를 위해 함께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로운 생각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신 성령님은 교회에게 이런 공간을 만들 은사를 나누어 주시고, 이 공간을 통해 각 사람을 만나시며 그들을 변화시키십니다. 이런 전도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온전히 소개하는 제자 양육과 연결됩니다.

전도를 받은 모든 사람이 믿음과 제자도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신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진실한 섬김과 사랑의 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입니다. 전도란 확실한 결과를 유도하는 효과적인 기술이 아니며, 개인의 회심은 개인의 결단과 성령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을 겸손히 따르며 의지해야 합니다.

 

영화 스틸컷.

 


[1] 이런 전도 방식에는 지난 세기의 주류 인간관인 모더니즘의 인간관이 반영되어 있다. 모더니즘의 인간관에서는 개인의 고유성과 관계성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2]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 “왜 하나님 나라 복음이 필요한가?” 참조.

[3] 다음 본문들을 참조. 베드로: 행 1:22; 2:14-41; 3:12-26; 4:8-12; 5:29-32; 5:42; 10:34-43; 스데반: 7:2-53, 56; 빌립: 8:4-5, 12, 35; 바울: 9:20, 22; 13:16-41; 14:15-17; 16:31-32; 17:2-3, 22-31; 19:2-12; 24:25; 26:2-23; 28:23-31.

[4] 이신칭의는 본래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인데, 교리 논쟁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빠지고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 후에 중심이 ‘예수님’에게서 나 자신의 ‘믿음’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 믿는 것’ 즉, ‘예수님 따르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5] 릭 리처드슨,『스타벅스 세대를 위한 전도』, 노종문 옮김 (IVP, 2008), 3장 “공동체를 통한 복음 증거” 참조. 유사한 전도 방식이 ‘가정교회 운동’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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