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러에 의하면, “사회 정의와 복음에 관한 달라스 선언”이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i) 사회 정의와 복음의 분리이며, ii)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분리된 복음이 사회 정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켈러가 이에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그에게는 ‘복음을 믿는다’는 말과 ‘사회 정의를 위해서 일한다’는 말이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믿으면 정의를 위해서 일하게 되며 정의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은, 켈러에게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본문 중)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⑥: 『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
칭의 교리는 사회 정의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김상일(보스턴 대학교, 실천신학 박사과정)
지난 해 미국의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인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를 비롯한 복음주의 인사들이 “사회 정의와 복음에 관한 달라스 선언”(The Dallas Statement on Social Justice and the Gospel)(2018. 9. 4)을 발표하였는데,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와 같이 복음이 가진 함의나 적용에 해당하는 것들은, 비록 그 자체로 합당하며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정의하는 요소는 아니다.[1]
2019년 7월 현재, 이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은 11,000명을 넘어섰습니다. 비록 이 선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 정의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복음 안에 사회 정의에 관한 본질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미묘하게 사회 정의를 복음 전도나 영혼 구원보다는 신앙생활에서 부차적인 사명으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점은, 많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이 선언이 보여주는 사회 정의에 관한 태도에 찬동한다는 점입니다. 즉 인종 차별이나 소득 수준의 양극화, 타자를 향한 혐오 등을 없애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복음 전도나 영혼 구원과는 별개의 일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복음주의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 선언이 나오자마자 즉시 반박했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팀 켈러입니다. 켈러가 맥아더와 이 선언에 찬동한 사람들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은 선언 자체라기보다는, 그 선언이 가진 함의 혹은 그 선언이 하는 일입니다. 특히 켈러는 화행론(speech-act theory: 언어가 전달하는 메시지 자체보다는 그 메시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는 이론)[2]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선언이 하는 말보다는, 그 선언이 하는 일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그 선언은 인종과 정의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부로 밀어내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요. “당신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그 선언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 만약 누군가가 “이것에(이 선언에) 동의하시죠? 이것에 동의하시는 거죠?”라고 하면서 제 의견을 자세히 캐물으려 한다면, 저는 “당신은 그 선언이 말하는 것만 보고, 그 선언이 하는 일은 보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선언이 하는 일이 사실 그 선언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쪽으로 강조하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마세요. 불의를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이 그 선언이 정말로 하는 말입니다. 비록 그 선언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 내가 좋게 보지 않는 부분은 그 선언이 하는 일입니다.[3]
켈러에 의하면, “사회 정의와 복음에 관한 달라스 선언”이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i) 사회 정의와 복음의 분리이며, ii)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분리된 복음이 사회 정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켈러가 이에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그에게는 ‘복음을 믿는다’는 말과 ‘사회 정의를 위해서 일한다’는 말이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믿으면 정의를 위해서 일하게 되며 정의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은, 켈러에게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을 파악하는 실마리는 그가 이해하는 칭의 교리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존 맥아더 목사를 비롯한 달라스 선언의 지지자들이 “의로운 삶은 복음을 정의하는 요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켈러는 의로운 삶이 복음을 정의하는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칭의 교리의 어떤 면이 그로 하여금 이런 주장을 하게 하는 걸까요?
우선, 칭의 교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롬 1:17; 합 2:4), 종교 개혁의 근간이 되었던 교리입니다. 종교 개혁의 기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 계기는 바로 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에 온전하게 순종하려는 사람의 노력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 교리를 두고 “교회를 세우거나 무너뜨리거나 할 수 있는 교리”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만 봐도 칭의 교리는 개신교회가 탄생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칭의 교리가 현대 교회에서 그 의미를 점점 잃어가는 데 있습니다. 비록 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논쟁이 칭의 교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는 하지만,[4] 정작 칭의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함의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침묵해 왔습니다. 그래서 켈러처럼 학문적 논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칭의 교리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 가지는 함의를 잘 해설하는 목회자가 우리에게는 정말로 필요합니다. 팀 켈러는 『당신을 위한 로마서 1』 말미에서 칭의 교리 논쟁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자신은 칭의 교리가 가지는 실천적인 함의에 초점을 맞추며 로마서를 다루었다고 밝힙니다.
최근 로마서 3장 20절과 28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혹은 ESV가 번역했듯이 “율법의 행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관련해서 ‘새 관점 학파’가 부상하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정결’ 의식을 지키기 위한 할례와 음식에 대한 규정, 그 외에 다른 법들은 모세의 제사법과만 관련 있는 것으로 바울이 말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율법의 행위”는 일반적인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 유대인의 문화적 관습과 종족적 경계의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바울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구원의 체계(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법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를 거론하거나 반박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바울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만의 표시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유대인과 같이 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새 관점 학파’에서 보면 바울이 로마서 2장과 3장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민족주의자들이다. 곧 바울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인종적이고 종족적인 배타성에 반대하였다. …
나는 긴 시간을 들여 ‘새 관점 학파’의 장점과 약점을 신중히 검토한 후에, 이것이 여러 측면에서 매우 유익하긴 하지만,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접근의 핵심을 뒤집지는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 궁극적으로 각기 다른 실체인양 민족주의와 율법주의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 율법의 행위에는 문화적 경계의 표시를 준수하는 것도 포함된다(예를 들면 할례에 대한 의존 :롬 2:25-29; 4:9-12). 명백히 이것은 교회의 분열과 복음의 훼손을 야기할 수 있을 만큼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갈 2:1-6). 사실 민족주의는 율법주의의 한 형태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되기 위한 도구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한다. 율법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나오는 도덕적 우월감은 같은 영적 뿌리에서 자란다. 복음이란 우리가 한 일이나 우리가 누구이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것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적인 정체성과 규범, 곧 자신의 유대인 됨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성취로 하나님 옆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한 로마서 1』, 293-294)
따라서 켈러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옛 관점이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서로 아주 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고 결론짓습니다. (물론 켈러는 옛 관점을 더 지지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켈러가 이해하는 칭의론은 어떤 것일까요? 2009년 3월 8일에 로마서 3:21-28을 주제로 했던 “믿음으로 의롭게 됨”(Justified by Faith)이라는 설교에서, 켈러는 바울이 이해하는 ‘의롭게 됨’(being justified)이 단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의 존재가 가치 있다고 검증해 줄 이력에 관한 기록’(validating performance record)이라고 정의합니다. 만약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노력, 성공과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칭의론의 메시지는 결국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뜻이며, 칭의론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존재를 스스로의 노력과 업적으로 입증하려는 모든 노력의 헛됨을 알고 계속해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입증되었음을 믿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규정된다는 것이 칭의 교리가 말하는 바라면, 칭의 교리는 저절로 사회 정의에 관한 함의를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칭의 교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나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하며 가치 있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고, 그것을 믿는다는 말은 다른 이들 또한 우리처럼 하나님께 사랑받은 존재로 대한다는 뜻인 반면, 이 사회는 권력, 돈, 피부색, 성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며 줄 세우기 때문입니다. 공익법센터 APIL의 이일 변호사는 난민 문제를 통해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병폐를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한 사회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을 때 집단적인 불만이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투사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서구에서는 사회적 불만이 인종적, 문화적 편견을 등에 업고 극우주의적 혐오와 차별로 표출되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도 젠더, 안전, 취업, 남북 문제 등 오래된 심각한 문제들로 인해 스트레스가 축적되어 있고, 난민들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사회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는 취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하여 근거 없는 편견과 공포감을 일으키는 가짜 뉴스들(‘난민들은 불법체류자이며, 잠재적 테러리스트이고, 범죄자들이며, 성폭력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이다’)이 나타나는 배후에 이와 유사한 역학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문제는 난민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있는데 비난의 화살은 누구도 옹호하지 않을 약자인 난민들에게 쏟아질 수 있습니다.[5]
한국 사회에 부조리가 넘칠 때 사람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들의 분노를 발산합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들은 모두 나와 타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나는 권력이 있고, 돈이 있고, 남자로 태어났지만, 그는 한국인이 아니고, 가난하며, 권력도 없기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은 특정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정체성 표지들(identity markers: 예를 들면, 남성, 상류층, 권력층에 속한다는 표지)을 기반으로 그런 표지들을 가지지 않은 다른 그룹(여성, 가난한 자, 힘없는 자)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반면, 칭의 교리를 믿는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근거한다고 믿으므로 경제적 차이, 인종적 차이, 성별의 차이, 세대 차이, 사회 계층적 차이에 따라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차이에 근거한 억압과 압제를 막으려 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즉 칭의 교리를 믿는 일은 곧 사회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에 직결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켈러는 자신의 『정의란 무엇인가』(Generous Justice)에서, 예일대학교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가 칭의 교리를 믿는 일과 사회 정의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설명하는 바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볼프의 에세이를 인용합니다.
빈곤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이 사회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고 있으며, 피부는 ‘부적절한’ 색깔인데다가, 그 어느 것도 바뀔 가망성이 없다고 상상해 보라. 사방을 둘러봐도 ‘성취’라는 철칙이 지배하는 사회뿐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번쩍거리는 상품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눈앞에 어른댄다. 세상은 오만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날이면 날마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으니 그대는 참으로 무능하다’고 속삭인다. ‘그대는 실패자다. 오늘 이루지 못한 걸 내일이라고 이뤄낼 방도가 없으니 계속 낙오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존엄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영혼은 절망의 흑암에 갇혔다. 하지만 복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권력으로 인간을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대는 그대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무얼 성취했든 상관없이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바로 그 복음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구현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세상이 만고의 진리로 여기는 ‘성취’의 법칙에 따라 ‘불의’하다는 선고를 받은 이들이, 순전히 은혜로 의로워지기를 추구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가 선포하고 구현해 내려는 메시지를, 정치 경제 제도를 포함하여 더 광범위한 문화 속에 주입하기로 작정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게 바로 은혜로 의로워지는 원리가 선포되고 실행되는 모습이다. 죽은 교리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162. 미로슬라브 볼프의 Against the Tide로부터 인용)
칭의 교리를 믿는 것은 우리가 은혜로 의롭게 되었음을 입으로만 고백하는 일이 아닙니다. 칭의 교리가 구체적으로 우리 삶의 어떤 정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도록 명령하는지를 이해하고 정말로 그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칭의 교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칭의 교리를 이렇게 보기 시작한다면, 존 맥아더를 비롯한 달라스 선언 동참자들의, “사회 정의가 복음을 규정짓는 요소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들은 칭의 교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걸 알면서도 그 메시지에 대해 눈을 감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칭의 교리가 말하는 대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특별한 정체성 표지로 사용하던 것들, 다른 이들을 깔보거나, 또 어떤 이들 앞에서는 스스로 위축되게 만들었던 그 모든 표지들을 포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창조세계와의 관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칭의 교리는 이 모든 관계를 하나로 꿰뚫으며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만 기반해 타자와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결국 칭의 교리가 말하는 바는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의로움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켈러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합니다.
[1] https://statementonsocialjustice.com/ 해당 부분은 the gospel 섹션에 대한 필자의 번역이다.
[2] https://ko.wikipedia.org/wiki/%EC%96%B8%EC%96%B4%ED%96%89%EC%9C%84
[3] https://pulpitandpen.org/2018/09/24/video-tim-keller-trashes-social-justice-and-the-gospel-statement/
[4] 1977년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의 출간과 함께 ‘바울에 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 호응을 얻게 되어, 전통적인 칭의 교리 이해[흔히 바울에 대한 옛 관점(The Old Perspective on Paul)이라고 불리는]를 옹호하는 학자들과 ‘새 관점’ 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5] 이일, “예멘 난민 문제와 한국 교회의 응답”, <좋은나무>(2018. 7. 11). https://cemk.org/8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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