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에 맞추어 설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지금껏 듣고 수용하기만 하던 청중이 이제는 권위를 가진 판단자가 되었으므로 청중이 적극 참여하는 설교를 하라고 주문합니다. 또 절대적인 진리라도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해야 사람들이 권위에 대한 반감 없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득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 중심의 설교를 적극 권장합니다.(본문 중)

권수경(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쉽지 않은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모든 것을 동등하게 여기는 상대주의, 보편 진리의 존재 및 인식 가능성에 대한 회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거부, 모든 것의 공존을 추구하는 다원주의, 개인 경험의 중시 및 그에 따르는 개인중심주의 등입니다. 이런 변화의 폭과 깊이가 이전 시대에 비해서 워낙 크고, 또 우리의 생각과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생활, 특히 그 중심에 있는 예배와 예배의 핵심 부분인 설교 역시 이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교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에 맞추어 설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지금껏 듣고 수용하기만 하던 청중이 이제는 권위를 가진 판단자가 되었으므로 청중이 적극 참여하는 설교를 하라고 주문합니다. 또 절대적인 진리라도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해야 사람들이 권위에 대한 반감 없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득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 중심의 설교를 적극 권장합니다.

이런 조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고려하다가 정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설교 방법론에 치중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불신이 아닌가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야기를 강조하다 보면 성경 본문 가운데서도 이야기로 된 본문만을 선호하게 되고, 나아가 교리나 윤리적 명령까지 억지로 이야기로 만들려다가 왜곡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변화가 복잡한 만큼 그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도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승부해야

복음을 거부하거나 공격하는 것이라면 크든 작든 잘 살펴 꾸짖고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부 곧 우리 시대 사상의 핵심 특징들과 정면승부를 벌여 복음의 능력을 입증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은 기독교 복음의 객관성 및 절대성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설교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복음의 능력을 확신케 함으로써 상대주의를 눌러 이기고 성도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작업을 위해서는 설교자가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에 매진함으로써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자신의 편견으로 말씀을 곡해하지 않도록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담론에 대한 의심’으로 규정하였다면 우리 시대 설교자는 기독교 복음이 온 우주를 포괄하는 세계관이요 진정한 거대담론임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성경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우주에 대한 지식도 갖추어야 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설교자가 말씀의 진리성을 확신한다면 그 확신은 성경과 학문과 사회를 배우려는 열정으로 나타나겠지요. 게다가 그렇게 확보된 세계관은 ‘힘이 곧 지식’이라 한 푸코의 주장과 달리, 억압이나 강요가 아닌 온유와 두려움 가운데 전파되고 구현될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한 방법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의 거대담론을 자신의 지역담론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는 첫 단계는 전하는 그 말씀을 설교자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입니다. 언제나 그래 왔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설교자의 말과 삶의 일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과 정신적인 방황을 체계적인 사상으로 만들었고 또 평생 그 사상을 실천하며 삶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살아내겠다는 절박함이 푸코만큼도 안 된다면 우리 시대의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현장 적용의 어려움

사실 오늘의 교회 현장을 보면 시대에 맞추어 설교하라는 조언이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장년, 노년층은 대개 중세 또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으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춘 새로운 설교 방식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젊은 층입니다. 신앙과 과학의 갈등 문제, 정치적 성향의 차이와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도 오늘날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밀어내는 주요한 원인입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젊은이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이들을 지킬 뿐 아니라 밖에 있는 이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에 맞는 설교 연구가 시급합니다.

신학교 교육은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기성세대에 속한 교수가 신세대를 가르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교회 현장에는 아직 이전 시대의 사고 틀에 익숙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 어느 쪽에 비중을 두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의 상황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을 간직한 이들이 교회를 주도하면서, 교회의 미래인 젊은이들은 몸에 맞지 않는 예배와 설교 때문에 이질감과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들을 품고자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면 기성세대가 불편해하고, 또 새로 시도하는 방법 역시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겪는 상황인 만큼 대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피하기 어려우므로 서로 머리를 맞대는 공동체적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좋은 방법을 발견했다면 얼른 나누어 검증도 받고 함께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방향은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주고 얼른 교회의 주체로 자라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청년을 지도하는 젊은 교역자에게도 더 많은 권위와 재량권을 주어야 할 겁니다. 어린이 교육 역시 젊은 세대가 맡으면 복음 전승 작업 역시 그만큼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 세대는 구세대가 보기에 많이 미숙하고 때로는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 같기도 해서 이들을 세우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복음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믿는다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약간의 모험을 감수하는 용기도 필요할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루터교회. 미국 모든 교회에서 성도 수 감소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영원한 복음의 능력

포스트모던 세대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사이버 세계, 가상현실, 비주얼 문화, 문란한 성, 스포츠, 소셜 네트워크 등 그 열망을 채울 잘못된 방법들이 더 많아져 그런 마음이 이전보다 더 깊은 곳으로 숨었을 따름입니다. 그 마음을 일깨워 참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가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사상부터 깊숙이 꿰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말씀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고 설교를 통해 그 말씀의 능력을 전함으로써 성도들을 승리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중세와 근대에 머물러 있는 교인들은 포스트모던을 발판 삼아 자라게 돕고, 이미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강해져 주님의 영광된 교회를 새 시대의 빛으로 세우도록 돕는 일입니다. 시대의 변화가 과격한 만큼 우리의 대응도 그만큼 급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진짜만이 살아남는 시대임을 고려할 때 우리가 바로 했느냐 하는 것은 아마도 몇 십 년 후에나 확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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