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사상을 간단히 줄이면 “힘이 지식이다”라는 것입니다. 근대 사상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를 뒤집은 것입니다. (중략) 근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소위 객관적, 중립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 사회, 경제의 권력 조직이 소위 ‘지식’을 만들어 내고 그 지식은 또 권력이 되어 소수자들을 억압하였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텍스트로 규정한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푸코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를 전부 ‘힘의 과시’로 본 셈입니다.(본문 중)

권수경(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권력이 지식이다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는 포스트모던 저자 가운데 한국에 가장 일찍, 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저서 『말과 사물』이 ‘인문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부제로 이미 1987년에 번역 출간되었고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서양 사상과 문화의 중심을 파헤치되 광기, 병원, 감옥, 성 등 독특한 주제를 대상으로 하였고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치밀한 분석과 호소력 있는 집필 및 강연활동을 통해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푸코의 사상을 간단히 줄이면 “힘이 지식이다”라는 것입니다. 근대 사상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를 뒤집은 것입니다. 베이컨이 지식의 축적을 통해 자연과 사회를 정복하겠다는 근대의 이상을 보여준 반면, 푸코는 학문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활동 이면에는 모종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소위 객관적, 중립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 사회, 경제의 권력 조직이 소위 ‘지식’을 만들어 내고 그 지식은 또 권력이 되어 소수자들을 억압하였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텍스트로 규정한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푸코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를 전부 ‘힘의 과시’로 본 셈입니다.

힘을 강조한 푸코의 입장은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 규정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ca. B.C. 459-400) 계보에 속해 있습니다. 지식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점과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을 믿는 점이 특히 같습니다. 가깝게는 “권력에의 의지”를 모든 활동의 동력으로 보았던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근대적 주체를 비판만 하고 그친 반면 푸코는 그 주체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사상가다운 면모를 보입니다.

 

Michel Foucault(1926~1984).

 

자아는 없다

자아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푸코의 인간관은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구조주의를 극단화시킨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을 사회 여러 요소의 종합인 거대한 구조의 산물로 보았다면 푸코는 인간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관계에 의해 형성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어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구조의 존재는 거부합니다. 인간은 권력이 낳은 개개인들일 뿐이며 고정된 자아 개념이나 인간의 고유의 본질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푸코의 인간관을 간단히 줄이면 결국 나는 나 아닌 것들이 모여 이룬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텍스트가 복잡하듯 자아 역시 무한한 복합성을 기본 특징으로 합니다.

푸코의 자아관은 인류의 지성사, 특히 근대 역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한때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는 푸코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광기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이른바 광기와 정상 사이의 구분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객관성을 가진 것이 아님을 주장합니다. 힘을 가진 다수가 정상의 조건을 규정하고 거기 해당되지 않는 소수를 미친 사람으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에 관해서도 같은 흐름의 분석을 전개합니다. 푸코는 평생을 동성애자로 살다가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답게 성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성에 관한 전통적 거대담론을 공격합니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보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권력이 출산과 무관한 성의 논의를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수가 힘으로 정한 조건은 결국 근대 이성주의의 산물이라는 푸코의 입장에서 보면 정상과 광기, 정상과 변태 사이의 구분 자체가 사라지고 맙니다. 이러한 푸코의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학문적 진리 이면에도 힘의 작용이 숨어있다고 한 푸코 자신의 이론입니다. 그런 비판을 시도해 보면 푸코의 활동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의 실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중심된 규범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주변을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이런 논리는 푸코의 정치적 활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감시와 훈육의 사회

푸코는 힘의 역학이 성이나 병원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이른바 계보학 또는 고고학 방법을 사용하여 밝히고자 합니다. 다수가 자신의 힘으로 모범의 틀을 정하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축출, 고문, 훈육 등의 방법으로 억압해 왔다는 기본 골격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푸코의 주장은 선험적, 추상적 주장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분석해 얻은 결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이론에 부합하는 사례들만 끼워 맞춘 주장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훈육(discipline)을 주제로 역사를 분석합니다. 중세의 무자비한 고문이 덜 폭력적인 근세의 처벌로 바뀌고 오늘에는 통제나 감시 같은 방식으로 바뀌게 된 과정을 추적하면서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으로 대체되었을 뿐 숨은 권력의 지배라는 사실 자체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도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학교, 병원, 회사 등을 포함하여 사회 전체가 어떤 권력의 그물망에 얽혀 있어 감시를 당하는 일종의 감옥과 같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입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 푸코가 공격하는 주 대상은 거대담론 즉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포괄적 이론들입니다. 역사의 이면에 숨은 모순과 갈등과 투쟁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관 곧 역사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이론들이 오류임을 밝히려 합니다. 그런 허구적인 편견 내지 선입견들이 소위 진리를 생산해 내어 그걸로 우리를 장악하면서 사회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은 제한하고 배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푸코 자신도 그런 허구적 대상들을 창안하여 그걸 우리 시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소위 진리는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푸코도 객관성이란 권력의 가면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사상가들도 모든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걸러낼 뿐 나름 주장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책을 쓰고 강연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좌)미셸 푸코가 1975년에 저작한 『감시와 처벌』, (우)한국어 번역본(2003년 개정판).

 

푸코와 교회

대다수 기독 학자들의 비판처럼 푸코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뒤집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처럼 권력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방향 제시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의 교회가 푸코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의 이면에서 작용해 온 힘의 역학 곧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독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거대담론이 언제나 억압 및 비인간적 행위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모습을 보여준 일이 있었음을 푸코의 글을 읽으며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푸코의 분석을 통해 교회는 우리 시대의 자아가 돈이라는 권력의 훈육을 받은 결과 자본주의적, 소비 중심적 자아로 형성되었음을 인식하고,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훈육을 시행하여 성령을 따르는 자아를 형성해야 할 사명감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창조 질서를 공격하고 난잡한 성생활을 옹호하는 등 문제도 적지 않지만 푸코의 주장에는 성경과 통하는 점도 사실 많습니다. 약자에 대한 관심 자체는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개혁신앙 노선의 철학자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이라 본 ‘가난하고 억눌린 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 ‘불의에 대한 분노와 항거’, ‘다양성에 대한 존중’ 등이 푸코의 글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교회가 푸코의 외침에 늦게나마 귀를 기울인다면 지금 겪고 있는 심각한 소통장애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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