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은 만능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성서를 보면 아버지 하나님의 힘은 병자를 치유하며 약한 자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힘은 자신을 종의 형체로 비워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는, 연약하게 될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중략) 보통 전능이라고 하면 제멋대로 하는 폭력적 힘을 생각하기 쉬운데,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은 다른 이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하는 힘입니다. 곧 사랑의 힘이며 약하게 됨으로써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본문 중)

박영식(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또 고통당하는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다스리시는데, 왜 이 세상엔 이런 불행과 고통, 부조리와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신의 전능과 선함,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관계에 대한 논리적인 의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에 살았던 에피쿠로스(주전 341-271)라는 철학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을 없앨 수 있고, 선하신 하나님은 악을 원하지 않을 텐데, 왜 이 세상엔 악이 존재하느냐’는 그의 물음에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답변해 왔습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로 대표되는 유형의 답변은 악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악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의 결핍(privatio boni)일 뿐이고 실체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따라서 악은 피조물일 수 없습니다. 마치 그림자처럼 실체에 기생하는 그 무엇으로, 양말에 난 구멍처럼 양말이라는 선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악은 없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여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행악자에게 내리는 벌로서 정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악들로 인해 하나님의 세상은 더 빛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악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장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두상(좌)과 기독교 신학과 서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우).

 

또 다른 유형의 대답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함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악(예컨대 살해당함)은 그것이 악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선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내셔도 선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우리 생각에 선하다는 것 사이엔 큰 간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앞의 두 유형을 따라 신의 옳음을 변증하고자 했던 철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는 ‘가능한 것 중에 최상의 세계’를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이 세상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최상의 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면, 만드실 수 있는 세계 중에 가장 좋은 세계를 만들지 않았겠냐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엄청난 재난과 불행에 대해 하나님께 면죄부를 줄 뿐, 실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되레 하나님이 잔인하고 자의적이며 폭력적인 존재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전능을 새롭게 정의하는 유형의 답변도 제시됩니다. 이미 13세기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전능을 비현실적이거나 비논리적인 것을 행하는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네모난 삼각형을 만드는 능력이나,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되돌리는 능력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과 무관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독교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좌),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분과 적분을 발명한 수학자이기도 한 라이프니츠(우).

 

전능은 만능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내는 힘을 전능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힘은 아버지로서의 힘이며, 창조주로서의 힘입니다. 성서를 보면 아버지 하나님의 힘은 병자를 치유하며 약한 자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힘은 자신을 종의 형체로 비워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는, 연약하게 될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하게 되심으로 연약한 우리가 힘을 얻게 합니다. 보통 전능이라고 하면 제멋대로 하는 폭력적 힘을 생각하기 쉬운데,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은 다른 이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하는 힘입니다. 곧 사랑의 힘이며 약하게 됨으로써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 아프고 힘들 때, 건강한 친구가 와서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와 같이 아픈 친구가 내 손을 잡아주고 곁에 있어 줄 때 힘이 나지요. 하나님의 전능은 이와 같이 약하게 될 수 있는 사랑의 힘,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이 세상의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서로 교제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서는 가장 가까운 부부와 형제 사이에 반목과 살육이 일어났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무력적인 방식으로 일순간 제압하거나, 피조물에게 주신 자유와 우연을 강탈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사랑의 힘으로 피조물을 돌보시며, 또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창조세계에 자유와 우연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프로그램화된 세계요, 사랑할 수 없는 복종과 필연의 세계일뿐이겠죠.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셨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엔 라이프니츠의 표현대로 도덕악과 자연악이 존재합니다. 도덕악은 자유를 남용하는 인간에 의해 발생합니다. 살인과 폭력이 이에 해당되겠죠. 자연악은 자연세계 속에 주어진 우연을 계기로 발생합니다. 재난과 질병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창조세계를 자동기계나 꼭두각시 인형의 세계로 만드시지 않으셨기에, 창조세계에 부여한 자유와 우연에 의존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악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순 없지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짊어지십니다.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십니다. 창조세계에는 허용된 우연과 자유의 남용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위험들이 발생합니다. 흑암과 혼돈과 심연의 위협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흑암을 뚫고 빛을 내시고, 혼돈 속에 질서를 창조하시며 심연 속에 주저앉지 않도록 다시 딛고 일어설 땅을 허락해 주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위험천만한 창조세계를 돌보시며 질서를 유지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시며,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regnum gloriae)에 상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이렇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겐 이런 식의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참혹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로고스의 세계가 무너진 부조리의 상태에 직면해 있기에, 말과 논리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침묵이 더 적합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묵묵부답이 아니라 함께 하는 공감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제일 처음 보여줬던 공감의 침묵,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에 함께 아파하며 동행하셨던 그 아버지의 침묵이야말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창조의 공간을 마련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 때,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조리한 고통 중에 신음할 때, 하나님도 함께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에 버림받는 고통,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이야말로 참으로 고통스런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고통당하는 자의 아픔을 아시고 그를 품어주십니다. 버림받고 저주받은 아들의 죽음을 감내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애통을 족히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희생된 자녀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자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계21:1-5).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사진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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