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나 다른 나라 상황을 보면 믿음이 너무 약화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중략) 이 가운데서도 아마 카카오톡을 통해 돌아다니는 수많은 ‘가짜뉴스’가 불신의 씨를 모든 곳에 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돌아다니는 거짓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하는 방송을 보면 거짓말이 너무 많습니다. 공영방송이나 종편이라는 방송들도 오십보백보일지도 모릅니다. (중략)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이 아주 깊게 파여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 중)

강영안(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이 글은 2019년 7월 11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웹진 <좋은나무> 1주년 기념 강연회 강연과 질의응답 내용을 박신호, 태동열, 정병오 님이 녹취한 것을 토대로 정리한 글로서 세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좋은나무>의 발간 일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사회가 의견이 양쪽으로 너무 많이 나눠져 있고 교회 안에서도 편이 심하게 갈라지고 있는 오늘의 양극화 상황에서 <좋은나무>가 성경 말씀에 좀 더 가까운 생각을 하도록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오후에 열렸던 기자 간담회에서도 <좋은나무>가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뿐 아니라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에도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식입니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식은 영어로 말하면 common sense, 곧 ‘상식’입니다. 누구나 ‘공통으로 가진 의식’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공통으로 누구나 가진 의식’을 the sense of community라고 이야기합니다. ‘공동체 의식’, ‘공동체 지각 능력’이란 의미이지요. <좋은나무>가 바로 이러한 ‘공동체 의식’ 또는 ‘상식’을 퍼뜨려서 우리 사회에 몸담고 있는 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의 삶의 질서를 세우고 공동의 행복과 복지를 지향하는 공동선을 이루는 데 기여하면 좋겠습니다.

 

지난 7월 11일, 기윤실은 <좋은나무> 발간 1주년 기념으로 강영안 교수를 모시고 “Post-truth: 거짓과 진실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강연을 개최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공자(孔子) 선생님과 관련된 일화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공자 선생님이 아니라 공(孔) 선생님이죠. 왜냐하면 여기서 자(子)는 ‘선생님’이란 뜻이니까요. 영어로는 Master Kong이라 쓰지요. 공 선생님에게 제자 자공(子貢)이 한번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정치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정치라는 것은 첫 번째로 사람들이 잘 먹고 살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먹는 것이 풍부하도록 하는 것, 족히 먹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것이죠.

자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중에 혹시라도 하나 없어도 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공 선생님은 “군대가 없어도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또 하나가 없어도 된다면 무엇이겠냐고 자공이 물었습니다. 공 선생님은 “식량이 없어도 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믿음을 꼽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군대가 쳐들어와서 혹은 굶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는 경우에도 나라는 보존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안보와 경제가 무너진다 해도 사람들 사이에 믿음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사자성어가 생겼습니다. 믿지 않으면 설 수 없다는 뜻이지요. 구약성경 이사야 7장 9절의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말씀도 동일한 성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아하스 왕에게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는 이 말씀입니다.

한국 사회나 다른 나라 상황을 보면 믿음이 너무 약화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거의 막말에 가까운 수준의 심한 말을 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아마 카카오톡을 통해 돌아다니는 수많은 ‘가짜뉴스’가 불신의 씨를 모든 곳에 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돌아다니는 거짓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하는 방송을 보면 거짓말이 너무 많습니다. 공영방송이나 종편이라는 방송들도 오십보백보일지도 모릅니다. 사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명백한 거짓말인데도 수많은 거짓말이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이 아주 깊게 파여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작년 고려대에서 열린 베리타스 포럼 강연 원고를 준비하다가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Truth is what my peers may let me get away with me saying.” 아마 여러분들도 이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문장을 읽다가 책을 덮어 두고 제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칼빈신학교 교무처장을 맡고 있는 로널드 핀스트라(Ronald Feenstra)라는 친구 방에 갔습니다. 조직신학이 전공인 학자입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제가 이 문장을 외웠습니다. 그랬더니 곧장 “도널드 트럼프!”라고 그 친구가 소리치더군요. 트럼프가 그런 사람이고, 트럼프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문장은 대충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진리는 나의 동료들이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옳다고 받아주는 것이다.” “내 동료들이 내가 말하는 편에 서서 그게 옳다고 해 주면 그게 진리가 된다”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진리’ 혹은 ‘진실’, ‘참’과 ‘거짓’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주고 옳다고 박수를 쳐주면 그것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진리나 보편적인 진리, 객관적인 ‘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습니다.

 

2018년 5월 23일과 24일, 고려대학교 베리타스포럼에서 강연하는 강영안 교수.(출처: 코람데오닷컴)

 

내 편에 선 사람들이 옳다고 동조해 주는 것만이 참이고 옳은 것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객관적인 사실이니 객관적인 진실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그럴까요? 모든 사람들이 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동조한다고 합시다. “암은 존재하지 않아, 암과 같은 건 없어!” 여기서 더 나아가서 “암은 없어. 의사들이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서 지어낸 병이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게 옳아, 옳아!”라고 말하면서 이 말을 따른다면 그게 진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고 암이라는 것이 사라질까요? 또 하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음모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것은 없었다!”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사건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음모라는 것입니다. 있었던 일이나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편드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있었던 일이 없어지고 존재하는 것이 정말 사라질까요? 지금까지 든 예는 존재와 관련된 것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곧 윤리와 관련된 문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내 편에 속한 사람이라면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도 될까요? 만일 이러한 방식의 사고와 행동이 통용된다면 참과 거짓뿐만 아니라 이제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은 사라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규합하고 동조하느냐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이 정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벌써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후의 철학 이론을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이 시대가, 오늘 제목으로 내세운 말, 포스트트루스(post-truth)와 관련됩니다. 이때 포스트라는 말은 예를 들어서 Post-War, ‘전쟁이 끝난 뒤’라고 시간적 의미에서 말하는 경우와는 구별됩니다. 이전에는 진리나 진실이 있었는데 이제는 진리나 진실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나 진실과 그것과 반대되는 것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때로는 거짓이 진실로 오인되는 현상과 관련 있는 말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 할 때의 ‘포스트’와 비슷합니다. ‘포스트모던’이 근대를 벗어난 시대로 이야기되지만 그럼에도 근대가 훨씬 더 강화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근대의 틀로 포착할 수 없는 시대의 특징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듯이, ‘포스트트루스’도 진리와 진실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으면서도 사실은 진리/진실과 허위/거짓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때로는 거짓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통용되는 시대 상황을 일컫는다고 하겠습니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는 옥스포드 사전이 ‘2017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단어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은 2016년에 사용 빈도수가 가장 많은 단어를 조사했고 앞의 해에 비해 근 2,000배나 사용 횟수가 늘어난 단어가 포스트트루스(post-truth)라고 발표했습니다. 2016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입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빠져나오는 ‘브렉시트’(Brexit)가 있었던 해입니다. 이 시기에 ‘포스트트루스’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은 포스트트루스를 “어떤 공공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오히려 감정에 대한 호소와 개인적 신념이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사전적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공적인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가진 주관적인 신념과 감정에 따라 하는 판단이 훨씬 더 잘 받아들여지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포스트트루스’라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의 사회와 정치 상황과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유포되고 있는 여러 의견에 이 정의를 적용해 보면,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말도 안 되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렇게 유포가 될까요? 유튜브를 통해서, 또는 카카오톡을 통해서, 심지어는 논문 형식을 통해서 사실의 근거가 없는 소식과 주장들이 유통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믿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면 가짜뉴스가 유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가짜뉴스이고 가짜 주장인데도 믿게 될까요? 믿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답은 아주 뻔합니다.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조금이라도 거짓이거나 거짓이 섞여 있거나 전체가 거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을 테고, 만일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전달하는 일은 없겠지요. 자신이 믿지 않는 가짜뉴스를 남에게 보낼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아, 이게 참이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받은 사람도 “아, 이게 참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참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믿습니다. 참에 대한 의식만 있을 뿐 아니라 참이라면, 그리고 그 참이 혼자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참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참인 것을 안다면 그것을 혼자 쥐고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혼자 자신의 독점적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가짜뉴스도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뉴스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퍼지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퍼진 가짜뉴스는 하나의 여론이 되어 버리고 여론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가짜뉴스를 생산한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당과 언론, 가짜 종교와 가짜 과학에 수없이 속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정현구 목사님이 유튜브를 통해서 떠도는 가짜뉴스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손봉호 선생님이 고정간첩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오늘 저녁 고정간첩과 식사 자리를 함께 한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 지가 46년이 넘었는데요, 선생님이 북한을 옹호하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찬성하거나 그렇게 사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북한을 공식으로 여러 인사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요. 얼마 전 한기총 전광훈 목사를 비판했기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그런데 손봉호 선생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아, 이게 참인가 보다!”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영상을 보라고 전달하겠지요. 그러면서 전혀 말도 안 되는 것이 마치 참인 것처럼 굳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말도 안 되는 것을 사람들이 참이라고 믿게 될까요? 이때 말하는 참이 무엇일까요? ‘참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인가’, ‘무엇을 일컬어 우리가 진실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은 오래전부터 철학이 다루어 온 물음입니다. 참에 대한 오래된 정의를 말해 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참’은 라틴어로는 베리타스(veritas)입니다. 우리말로는 ‘진리’라고 번역해서 쓰지요. 그런데 사실 ‘진리’(眞理)는 19세기 중후반 영어의 truth를 번역하면서 ‘참된 도리’, ‘참된 이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인데요, 저는 그렇게 썩 좋은 번역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성경책이다”라고 하면 “그게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진리다”라고 하는 건 이상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진리’라고 말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이치, 어떤 궁극적인 사물의 진상입니다. 그래서 우선 베리타스를 ‘진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잠시 잊고 그냥 ‘참’이라고 이해하고 말을 계속 해보겠습니다. 참에 대한 정의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은 사물과 지성의 일치이다”(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이것을 현대식으로는 ‘참이라는 것은 사실과 진술의 일치이다’라고 옮겨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전적인 방식과 현대적인 방식에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전제가 아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이것은 마이크다”라고 말을 했다면 “이게 마이크다”라고 하는 제 진술을 참이게 만드는 것이 뭡니까? 이게 마이크라는 ‘사실’입니다. ‘팩트’, 곧 ‘사실’이 제 진술이 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합니다. 영어로는 ‘참이 되게 하는 것’(truth maker)라고 합니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사실’을 정의할 때 이런 방식으로 했습니다. “나의 진술이 참이 되게 만드는 것, 즉 truth maker가 팩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과 관련해서 ‘사실’이 무척 중요합니다. 사실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면 온갖 거짓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중세로 올라가면 사정이 다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참이란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고 했지요. 여기에는 신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에는 지성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지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성을 얻은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하게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성으로 만든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과 지성이 일치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지으시고 인간과 미약하게나마 공유하는 지성, 곧 로고스가 됩니다. 우리가 뭘 알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로고스를 물려받았고 로고스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진술이 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단순히 사실도 아니고, 우리의 지각 능력도 아닙니다. 사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것에 부여한 인식 가능한 구조(로고스)를 바탕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성(로고스)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을 알 수 있고 사물에 관한 참된 진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은 단지 사실과 진술의 관계,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주관과 객관, 주관과 객관을 이어주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성령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과 역할이 여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와서는 진리의 개념에서 이런 형이상학적, 신학적 배경은 밀려나고 방금 제가 러셀을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진술과 사실의 일치에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이 정의에는 사물과 관련된 참이 단순히 나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팩트냐 팩트가 아니냐, 곧 사실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스트트루스는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이 내가 가진 생각이나 내가 믿는 믿음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힘을 잃어버린 상황을 그려줍니다. 포스트트루스를 옥스포드 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한다고 했습니까? 두 가지, 곧 하나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의 개인적 신념 또는 확신에 호소해서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팩트, 곧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편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라거나 원하는 바가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보증해주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사실 이런 생각이 형성된 것은 단지 최근에 와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객관적 지식이나 객관적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저 그리스 시대의 이른바 ‘소피스트들’이 이미 주장했던 것이니까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나 자신이 참과 거짓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런 사람들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현대에 와서 소피스트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람은 아마도 니체일 것입니다.

니체가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죠. 니체의 사상을 흔히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항상 어떤 한 측면이나 어떤 한 관점에서 보는 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이 테이블을 보실 때 이쪽에 앉아 있는 분과 저쪽에 앉아 있는 분이 사실 동일한 테이블을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같지 않습니다. 이쪽에 앉은 분은 지금 이 면을 이렇게 보고 있죠. 저는 지금 이 테이블을 보려고 하지만 테이블의 다리는 보지 못하고 테이블 위쪽의 이 판만 보고 있습니다. 조그만 모래알을 하나를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래알을 제 손에 얹으면 제가 모래알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제 쪽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고 뒷면은 뒤집어 봐야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고 할 때 보는 것은 항상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사물이 놓여 있는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뭘 볼 수 있습니다. 사물 전체를 보려면 둘러서 봐야 되고 돌아서 봐야 되고 이 경우는 또 뒤집어서 봐야 됩니다. 우리의 지각은 항상 어떤 관점을 가지고 혹은 어떤 한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죠. 우리는 늘 어떤 관점, 어떤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사물과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체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돌려서 보고, 둘러보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렇게 우리 앞에 주어진 것들을 종합하는 작용이 우리의 의식 활동입니다. 칸트 같은 사람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들을 전체로 종합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는 라이프니츠가 사용했던 용어를 빌려 통각(apperception)이라 불렀습니다. ‘자기의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칸트는 우리가 주어진 것들을 볼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곧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배후에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소위 ‘사물 자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볼 때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주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배경을 형성해 주고, 사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하는 ‘사물 자체’라는 것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어진 것들을 단순히 그냥 단편적으로 또는 파편적인 방식으로만 놔두지 않고 그것을 종합하는 우리 ‘통각의 종합 활동’이죠. 그런데 니체는 이 둘을 모두 배제했습니다. 사물 자체도 없고 통각의 작용도 없고 그냥 남아 있는 것은 파편화된 나의 지각 활동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중요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해석에 영향을 주는 것이 ‘힘을 향한 의지’라고 니체는 보았습니다.

칸트를 현대 관점주의의 선구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를 엄밀하게 읽으면 그를 관점주의자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주어지는 것’이 있고 그것을 종합하는 ‘통각’(자기의식)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결국 니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관점주의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니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이런 방식을 가지고 온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말하고, 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결국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게 되겠죠. 과거에 지식을 권력과 연관해서 본 사람으로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있습니다. 그는 “앎은 곧 힘”(Scientia est potentia)이라고 말했습니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말입니다. 미쉘 푸코는 우리의 앎의 추구가 사물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현실에 접근한다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와 언론과 삶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에는 진정한 ‘참’과 진정한 ‘옳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포스트트루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은 이런 방식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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