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갈등이 많다. 관계 안에서 갈등을 원만하게 해소해 본 경험이 부족하므로 갈등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또 갈등을 미숙하게 해결하다가 더 큰 갈등을 낳기도 한다. ‘갈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건전하고 유의미한 성찰과 담론을 찾기 어렵고 갈등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도 부족하다. 그래서 갈등 해결의 경험보다는 갈등에 대한 트라우마만 가득하다. 결국 갈등은 악한 것, 나쁜 것이라는 통념이 만연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본문 중)

조혜진(기윤실 청년위원)

 

요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인주의 추구가 대세다. 1인 가구가 증가하고 혼밥, 혼술이란 말이 유행한다. 그러나 개인주의 사회가 되어간다고 해서 ‘관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주위의 청년들을 보면 관계 때문에 고달프다. 개인주의를 추구한다고 해서 관계에 쿨한 것은 아닌가 보다. 관계 문제, 그중에서도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슈인 것 같다.

 

일본의 어느 라멘 체인점.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어 옆에 앉은 손님은 물론 서빙해주는 종업원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출처: 일요신문 갈무리)

 

우리 사회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갈등이 많다. 관계 안에서 갈등을 원만하게 해소해 본 경험이 부족하므로 갈등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또 갈등을 미숙하게 해결하다가 더 큰 갈등을 낳기도 한다. ‘갈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건전하고 유의미한 성찰과 담론을 찾기 어렵고 갈등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도 부족하다. 그래서 갈등 해결의 경험보다는 갈등에 대한 트라우마만 가득하다. 결국 갈등은 악한 것, 나쁜 것이라는 통념이 만연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 번째로 생각해 본 원인은 왜곡된 위계 문화이다. 나이에 따라, 직위에 따라 위계 서열을 결정하는 문화가 있고,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권한이 너무 많다. 실제로 또래와의 갈등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부모님, 목사님, 직장 상사 등 윗사람과의 갈등이다. 이런 문제는 해결이 거의 절망적이라고 느껴진다. 잘못한 사람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갈등을 겪는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갈등의 원인이 쌍방 과실이라 할지라도 윗사람의 잘못은 작게, 아랫사람의 잘못은 크게 여겨진다. 합리적이고 진솔한 대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한 채, ‘부모 말 안 듣는 자식’, ‘목사님에게 순종하지 않은 성도’, ‘상사에게 대든 부하 직원’ 등 무례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

두 번째로는 잘못된 학습을 통해 형성된 방어적인 사회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갈등이 일어날 경우 갈등을 드러낸 사람은 비난을 받고, 갈등 앞에서 침묵하고 감정을 덜 드러낸 사람이 ‘덕 있다’ 칭송받는다. 반면, 갈등을 드러내는 태도는 ‘긁어 부스럼 냈다’,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을 키웠다’ 등의 표현으로 검열하고 꺼리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갈등의 진정한 해결 대신 미봉책만 난무했고, 사회적으로 갈등의 건전한 해소 경험이 부재하다 보니 갈등에 대해 방어적인 분위기가 생겨났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꼰대’라는 이미지의 이모티콘.

 

교회 안에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그 중요한 원인은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로 가지게 된, 평화에 대한 거짓된 개념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용서와 순종, 온유한 인격에 대한 가르침을 부정적인 감정이나 의견 차이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즉, 평화를 ‘아무런 균열도 없는 상태’로 오해하고, 화해를 미움이 전혀 없거나 생겨도 빨리 해결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갈등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일까? 우리 하나님은 답정너[1]일까? 성경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온전하게 수습되거나 해소되지 않은 갈등 사건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친족 간의 갈등 및 경쟁 관계가 등장하고, 신약성경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선(행 15:39)” 잘 알려진 사례가 있다. ‘네이트판’[2]에서나 볼 법한 표현이 성경에 버젓이 나온다. 기승전‘평화’를 말하고 싶었다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인 권위의 책에 왜 이런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그대로 담긴 것일까?

성경은 관계의 깨어짐이 인간 타락의 현상이라고 말한다(창 3:10-21). 타락 이후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의 관계가 깨어짐으로서, 사람들은 시기, 질투, 분노, 미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고 서로간의 소통이 가로막히고 관계의 단절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의 깨어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된,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우리의 깨어진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깨어진 관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담대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갈등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갈등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갈등을 그 자체로 직시하고 갈등의 원인과 유발 요인을 조사하고 공평과 사랑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의미다. 모든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하나님의 왕 되심이 드러나게 하는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복잡해 보이는 소명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먼저 기억할 것은 갈등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갈등은 쉽게 정의 내리거나 유형화할 수 없다. 현대 사회의 구조상 개인도 다양하고, 조직도 다양하고, 관계도 다양하기에 갈등의 양상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기질이나 사회화된 방식에 따라 기대하는 갈등 해결 방향도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정당한 배상이나 징계를 원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사과나 타협 등의 원만한 해결을 원할 수도 있는데 무엇이 더 옳고 정의로운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갈등이 일어난 조직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구성원의 나이, 성비, 핵심 리더십의 철학에 따라서도 문제 해결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교회나 가정의 경우에도 외적 특성과 내부 양상이 다양하므로 획일적인 처방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성공적으로 갈등을 해소한 방식을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케이스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미리 정해진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식하는 것이 건강한 출발점이다. 갈등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태도는 또 다른 비극만 낳을 뿐이다.

또한, 갈등 안에 있는 개인이 갈등 해결 감각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용기와 절제 사이의 명확하지 않은 그 지점을 잘 짚어내고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절제해야 할 때 치기로 들이받고 질러버리거나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 움츠러들어 끝없이 신중하기보다, 언제 용기를 내야 하고 어디서 절제해야 할지를 고민해보자.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고 판단을 실행함으로써 이 순간을 통해 갈등을 다루는 감각을 활성화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는 처음 마주하는 갈등들 앞에서 당황해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연륜과 인품, 철학과 경험이 풍부한 누군가의 지원이 간절하지 않은가. 지금 갈등을 경험하는 우리가 그런 필요를 채우는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구조적으로 이미 많은 갈등 양상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지만, 앞으로는 이 양상이 더욱 더 복잡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갈등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방법보다는 온전한 마음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명령어를 입력하면 정답을 송출하는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지으셨고,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와 공동체, 관계도 살아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기계적인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관계에서 일어난 갈등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갈등 해결에서는 완전한 방법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선한 결과를 포기하지 않고, 조급하게 미봉하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며, 꾸준히 살피고, 관심 갖고, 내가 할 바를 하며, 더 나은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와 관계를 빚어가는 마음을 품어보자. 하나님이 우리의 이 마음을 예배로 받으신다면,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1]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는 태도를 가진 사람(편집자 주).

[2] 포털사이트 네이트에서 운영하는 게시판으로 젊은 세대의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온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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