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난과 불행 같은 인생 훈련을 허락하실까? 그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칼뱅은 공동체를 위한 신적 선물이 사장되지 않게 하시려고, 각 사람의 영적 건강을 위한 ‘약’을 투여해주신 것을 그 한 가지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라는 약으로 치유되고 성화되어 가면, 한편으로는 신자로서 영적 선물을 겸손히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공익을 위해 기꺼이 자기 소유와 재능을 공유하는 덕성 있는 시민의 삶도 살아내기 때문입니다.(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195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런던에서는 주일이면 사람들이 이리저리 거리를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주일예배를 볼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템스강이 흐르는 시내 곳곳 교회마다 자리가 꽉 차 예배드리기가 쉽지 않았었지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진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만에 그렇게 뛰어다니던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런던 시내 대부분의 예배당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한 언론인이 영국교회가 한 세대 만에 급속하게 쇠퇴한 연유를 밝히고자 여러 신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수많은 대화 중 그의 가슴에 가장 깊이 남은 대답은 가장 연세가 지긋했던 아흔이 넘은 신학자에게 들은 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러 엄밀한 분석보다도 그 한마디가 커다란 망치로 치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은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더 이상 은혜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므로, 늘 하늘을 향한 경외감을 잊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영국교회의 뼈아픈 실책이 더 이상 남의 일 같지 않은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다 보니, 은혜를 한 마디로 “하나님의 호의”(favor)라고 정의했던 칼뱅의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1950년대 마틴 로이드 존스가 목회하던 시절의 런던 웨스트민스터채플 예배 광경.

 

선물이 진정 좋은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주고 받는 관계와 선물이 모두 문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선물’(gift)과 ‘선물을 주는 이'(giver)와 ‘선물을 받는 이'(receiver), 이 셋 모두 좋은 관계로 구성되어야 좋은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함께’(cum)와 ‘선물’(munus)이 결합한 모양새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는 이들의 모임이라야 공동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셈입니다. 그러한 살뜰한 공동체의 예로 미국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O. Henry)의 『동방박사의 선물』 스토리가 생각납니다. 서로 유난히도 아껴주던 한 가난한 젊은 부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두 사람, 짐과 델라는 선물을 살 형편이 아니어서 각자 고민에 빠집니다. 남편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고급 시계를 팔아 아내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에 어울릴 고급 머리빗을 장만합니다. 반면 아내는 남편의 낡은 시곗줄에 마음이 쓰여 자기 머리칼을 팔려고 성큼 자릅니다. 마침내 시곗줄과 빗을 각각 손에 들고 깊어가는 성탄의 밤 마주 보는 두 사람은 서로 어쩔 줄 몰라 눈물을 쏟아냅니다. 시계도 없고 머리칼도 없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선물 교환 이야기. 하지만 독자들은 책장을 덮으며 슬퍼하진 않습니다. 쓸모없는 선물이 된 것 같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라는 더 좋은 선물이 교환되었기 때문이지요. 서로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자기부정(self-denial)의 영성이 충만한 성탄절 이야기에서 이렇게 공동체(community)가 무엇인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날 둘은 모두 행복했습니다. 선물이 눈에 보이는 유용성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성에서는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날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일생 좋은 기억이 될 것이기에 진정 유익한 순간이라 할 만합니다.

 

오 헨리(O. Henry)의 소설 『The GIFT of the MAGI』표지.

 

하지만 위에 노신학자가 술회한 대로 아무리 좋은 선물도 주고받는 사람에 따라서 유용성과 위험성이라는 양날의 검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 수령자인 인간 본성이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교환하는 체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처럼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의 교만이 공동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베푸신 각종 선물을 감염시키는 역병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받은 은사가 마치 스스로 잘나거나 잘해서 얻은 공로인 양 행세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행여 타인이 무슨 좋은 재능이라도 갖고 있으면 몹시도 불편해 하며 그 은사를 깎아 내리거나 훼방 놓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은 양날의 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히 4:12)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선물도 말씀에 버금가는 양날의 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선물이라도도 수여자의 의도와 목적에 알맞게 선용되지 않고 수령자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되거나 오용되면, 공동체를 세우기는커녕 허물어뜨리는 원인 제공자가 되어버립니다. 선물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수령자에 따라서는 더없이 위험천만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로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좋은 최초의 선물인 ‘불’이 있습니다. 세상 태초에 빛이 있었다면 문명 시초에 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불을 가지고 인간은 편리함도 만들어 냈지만, 인류를 공멸에 빠트릴 대량살상 무기도 만들어냈습니다.

이처럼 은혜에는 동전의 양면이 있습니다. 선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여자이신 하나님 때문도 아니고 선물 그 자체 때문도 아니라 수령자인 사람 때문입니다. 이 위험성을 깊이 간파했던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값싼 은혜는 결코 은혜가 아니다”(Cheap grace is no grace at all)라고 일갈했습니다. 어떻게 은혜 앞에 값싸다는 말이 붙을 수 있었을까요? 받은 자가 그 은혜를 당연히 여기며 싸구려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적 선물을 훼방하는 교만, 자랑, 야망, 경쟁이라는 병균에 대항하는 항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칼뱅은 ‘겸손한 인내’의 성품을 먼저 꼽았습니다. 겸손한 성품, 참을성 있는 성품이 갖춰져야 각자 받은 선물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적절히 사용하는 성숙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인내, 양선, 온유, 충성, 절제라는 성령의 아홉 열매는 공동의 선을 위해 은혜를 선용하게 하는, 그리스도인 성품의 아홉 가지 속성일 것입니다.

 

1932년,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목회했던 회중교회인 시온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주말 휴가를 보내고 있다. 가운데 검정색 자켓을 입은 이가 본회퍼.(출처: 독일 연방 기록보관소)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난과 불행 같은 인생 훈련을 허락하실까? 그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칼뱅은 공동체를 위한 신적 선물이 사장되지 않게 하시려고, 각 사람의 영적 건강을 위한 ‘약’을 투여해주신 것을 그 한 가지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라는 약으로 치유되고 성화되어 가면, 한편으로는 신자로서 영적 선물을 겸손히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공익을 위해 기꺼이 자기 소유와 재능을 공유하는 덕성 있는 시민의 삶도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을 올바르고 풍성하게 사용했던 최고의 모범은 누구일까요? 물론 인류 최고의 선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생애를 선물 나눔 공동체를 이루는 삶의 근원적인 토대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든 인간에게 남김없이 공유하시려고 모든 인간의 공통 본성을 입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분 안에 완성된 새 피조물의 삶, 갱신된 새 언약의 삶으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좋지 않은 것들이 주님의 좋은 것들로 바뀌어 갑니다. 인간의 자기 확신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세 수도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의 은유가 있습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1090~1153)(St. Bernard of Clairvaux).

 

사람들은 자기를 스쳐 지나가는 은혜를 자기의 것인 양 생각하며 사소한 일도 자기의 공로라 한다. 마치 벽이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그 빛을 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양날의 검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저 높은 태양 같으시다면, 사람은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습니다. 언뜻 ‘해님이나 달님이나 비슷하게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달은 하늘에 떠 있는 시커먼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빛이 곱다고 하지만 실은 햇빛이 고운 것이지요. 달이나 벽이나 똑같이 반사하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찬란해도 그건 당연한 것이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태양이 공중의 외로운 돌멩이를 비추듯, 은혜는 실패한 한 인간을 비추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줍니다.

그걸 알았던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직 울릴 수 있는 종을 울려라. 자신의 완벽한 헌물은 잊어라. 모든 것에는 흠이 있다. 그래서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사람의 흠을 통해 들어옵니다. 은혜가 어디에나 있는 까닭은 흠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뜻으로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은혜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나요? 하지만 ‘나의 흠에도 불구하고’라는 이 사실을 망각하면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 양날의 검에 베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궁 안의 다윗처럼 쓰라린 회한의 눈물을 쏟을 수도 있습니다.

은혜가 언제나 늘 가까이 있는 까닭은 인간이 허물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헤아려 보면 내게 찾아온 어떤 것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 아니,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아는 순간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허물로 얼룩진 내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가 밀려옵니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이 은혜는,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과 달리 우리를 고양합니다. 은혜는 무에서 유를 값없이 만들어내고 세상을 존재하게 하고 보존합니다. 창조 세계 자체가 피조물에게는 당연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이며 놀라운 은혜입니다.

과학신학자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우주의 구조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오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주 기본 상수들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달라지면 별이 하나도 없든지, 모조리 타버리든지, 아니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 조율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극장입니다. 이 창조세계에서 은혜는 보이는 모든 선물의 토대가 되고, 선물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실천적 작용이 됩니다. 은혜가 추상에서 나와 구체적인 것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선물이 있습니다. 만약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선물 없는 은혜도 죽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선물 없는 은혜를 주장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좌절될 수 있습니다. 선물을 오용해도 은혜는 막히게 됩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은혜는 오직 선물로만 전달됩니다. 이러한 이치를 생생히 간직했던 고대에는 상품을 사고파는 현대와 달리 선물을 주고받는 교환의 관습이 상상 이상으로 정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무대였던 고대근동 지방의 삶에 ‘은혜’와 ‘선물’이 있었다면, 우리 동양에서는 일찍이 노자의 ‘도’와 ‘덕’이라는 생각이 등장한 바 있습니다. 노자에게 우주의 본질은 도이며, 천지만물은 도에서 탄생합니다. 형상도 형체도 없는 도에서 천하가 시작됩니다. 만물의 어머니인 도는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고 마르지 않는 신비로운 힘입니다. 노자는 그 도가 드러나면 덕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진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진리라고 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옳다면, 도와 덕이라는 일반 은총의 나무가 은혜와 선물이라는 특별 은총의 나무를 우러르며 나란히 심어진 광경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 그래서 감미로운 만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떠오르게 하는 세속화된 크리스마스는 ‘순수한 선물’(pure gift)의 계절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12월 성탄은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는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마지막 페이지에 남겨진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가 잘 드러나는 절기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이방인으로 나고 자랐지만 자신들 인생 곳곳에 베푸신 하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결코 당연시하지 않던 동방의 박사 세 사람은,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순례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선물을 가지고 아기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노년의 카스파르는 인생 늦가을에 나눌 수 있는 선물로 평생 경험하고 축적한 지혜인 황금을 드렸습니다. 중년의 멜키오르는 인생 한여름에 드릴 수 있는 선물로 자신의 치열한 일생에서 빚어내는 기도인 유향을 드렸습니다. 아직 청년이던 발타자르는 인생 봄날에 드릴 수 있는 선물로 가난한 젊은 시절 겪어내는 고생인 몰약을 드렸습니다. 젊을 때는 고생만 드려도 됩니다. 인생 사계절에 맞게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따로 있는 것처럼,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예물, 이웃과 나누라고 하시는 선물도 계절마다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으로 이 시대 교회와 사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갈 수 있을까요? 서로를 위해 고생해 줄 수 있을 때 고생을 나누고, 기도해 줄 수 있을 때 기도를 나누고, 지혜를 줄 수 있을 때 지혜를 나누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고생을 드릴 때가 따로 있다는 것, 기도를 드릴 때가 따로 있다는 것, 지혜를 드릴 수 있을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야말로 은혜로 사는 모든 이의 행복일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지롤라모 다 산타크로체(1480~1556)의 작품 “The Adoration of the Three Kings”(1525~1530경 제작)(출처: Walters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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