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신앙인으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적으로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풍요로운 자산이었던 존엄한 죽음의 전통을 다시금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평소에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성찰하고 준비하면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훈련을 해야 한다.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존엄하게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본문 중)

곽혜원(21세기교회와신학포럼)[1]

 

성서의 죽음 이해를 상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 의외로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비성서적으로, 심지어 미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을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의 주님’으로 믿지 않고, 오직 ‘산 자만의 주님’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죽음의 세계가 명백히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며 죽은 자는 역사의 종말에 임할 부활을 소망하는 존재라는 초대교회의 신앙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결정적 분기점이 되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이 임했고 죽음과 죽음의 세계, 죽은 자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2]

하지만 성서는 로마서 14:8-9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이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선언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그곳을 하나님이 임재하는 공간, 하나님의 통치 영역임을 암시하며(시 139:8; 호 13:14)[3], 특히 베드로전서 3:19과 4:6 말씀은 예수께서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셔서 저주받은 죽음의 땅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생명의 땅으로 만드신 것을 선포한다.[4] 그리하여 죽음의 세계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영역으로 귀속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맺은 관계가 육체적 소멸을 넘어서 영원히 존속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5]

 

ⓒUnsplash.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으로서 죽음의 세계도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죽음의 양면성·이중성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필요성이 있는데, 이를 통해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죽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 어느 종교·문화권을 막론하여 양면적이고 이중적으로 이해된다. 특별히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서는, 천수를 누린 사람은 선신(善神)이 된다고 믿어지고 따라서 자연사(自然死)는 생명의 자연적 순환 원리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요절이나 비명횡사한 사람은 악신(惡神)이 된다고 여겨지고 비자연사(非自然死)는 일생일대 최악의 부정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또한 죽음은 본질상 슬프고 비통한 사건인 동시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건으로 표상되기도 하는데, 죽음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신적인 존재 혹은 다른 생물체로 환생하기 때문이다.[6] 아마도 한국의 전통적 상장례(喪葬禮)에서 죽음의 이중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의례는, 장례식 전야에 슬픔으로 가득 찬 상갓집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다시래기(=다시나기)[7]가 아닐까 싶다.

성서에는 죽음에 대한 이중적 전통이 병행하여 연면히 내려오는데, 즉, 죽음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순리이자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 보는 전통과, 죽음을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형벌로 보는 전통이 그것이다. 유복한 삶을 향유하고 천수를 다한 아브라함의 죽음, 이삭의 죽음 등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 보지만(창 25:8; 35:29; 대상 29:28; 욥 42:17; 전 3:1-4), 수를 누리지 못한 요절이나 비명횡사는 죄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다(창 2:17; 신 30:15-16; 삼상 2:31-33; 잠 10:27; 겔 18:20-21; 롬 5:12; 6:23; 약 1:15). 그러나 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기점으로 완전히 새롭게 조명된다. 즉, 그리스도 이전에는 죽음에 대한 패배주의가 팽배했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관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8] 그러므로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극복되었다’, ‘죄가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이 당해야 할 저주의 죽음을 친히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저주의 죽음에서 해방되었다’, 바로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죽음 이해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성서가 말하는 죽음 이해의 핵심이다.

성서의 죽음 이해를 기반으로 초기 교부들은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했는데, 특히 죽음이 주는 유익에 대해 이렇게 설파하였다.[9]

  1. 죽음은 죄의 영원성을 단절시키고 영혼 안에 심어진 악이 불멸하지 못하도록, 죄의 몸으로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선, 자비의 섭리에 따라 영혼의 그릇인 육체가 일시적으로 부패하도록 역사한다.
  2. 죽음은 주님 안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함으로써 영혼에 해로운 정욕과 탐욕, 사탄의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제어하게 하는 확실한 구원의 약이 된다.
  1. 죽음은 인생의 온갖 수고와 질고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사의 온갖 근심과 염려에서 해방하며, 모든 슬픔과 고통에 종지부를 찍게 함으로써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로하는 은혜로운 사건이기도 하다.
  1. 죽음은 우리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어 준다.
  1. 죽음은 썩어 없어질 지상에서 천상, 이생에서 영원, 필멸에서 불멸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와 같은 성서가 말하는 죽음과 그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성찰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만유일회적으로(萬有一回的, 결정적으로 단번에) 깨뜨렸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롬 8:11).[10] 그러므로 죽음은 비록 삶 속에 현존할지라도, 그 무서운 위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고전 15:55).[11]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게 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삶이 죽음과 함께 끝나 버린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존재이며,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으로 들어감, 곧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은, 죽음을 결코 미화하거나 정당화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죽음 그 자체는 역사의 종말에 결국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반신적(反神的) 존재,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고전 15:26)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죽음이 지닌 양면성, 곧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서의 죽음(죽음의 자연성)과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죽음의 비자연성)을 바라보면서 죽음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종결로만 받아들일 경우, 자칫 죽음이 지닌 치명적 폐해를 간과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형태의 억울한 죽음, 폭력적 죽음, 강제적 죽음에 대해 무감각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의 비자연적 측면을 올바로 인식할 때에만, 부당한 죽음을 야기하는 사회의 구조적 불의, 조직화·합법화된 생명의 파괴에 저항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12]

이 사실을 고려해 보면, 죽음이 지닌 양면성은 각각 나름의 의미를 내포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를 부과함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한편으론 삶의 영역에서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순응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죽음의 치명적 폐해를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억울한 죽음, 폭력적 죽음, 강제적 죽음을 초래하는 불의한 세력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어떠한 세력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부당한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악을 제거하려는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계 21:4)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죄와 고난과 슬픔과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도래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crowdpic.

 

이처럼 죽음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갖게 되면, 인생사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죽음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정신적·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적으로 깊어지는 계기가 되며, 나아가 우리의 죽음이 ‘인간다운 존엄으로 충만한 복된 죽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데까지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희망하는 공동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성도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차근차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실 삶 속에서 죽음을 성찰하는 일은 일견 고통스러운 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죽음을 깊이 묵상한 사람 중에 죽음을 두렵기만 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사람이 거의 없다. 오히려 죽음의 현실을 의식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는, 오랫동안 죽음을 연구한 신학자로서, 죽음을 깊이 묵상할 때 참되고 가치 있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좋은 신앙인으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적으로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풍요로운 자산이었던 존엄한 죽음의 전통을 다시금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평소에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성찰하고 준비하면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훈련을 해야 한다.[13]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존엄하게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존엄한 삶을 영위하다가 존엄하게 생애를 마무리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삶과 죽음을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기독교회의 귀중한 전통을 회복해 나갈 때,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회복할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래 이래 봉착한 교회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도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1]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등 다수가 있다.

[2]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 기독교 생사학의 의미와 과제』(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93.

[3]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 13:14).

[4]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5] 위의 책, 101-102.

[6] 위의 책, 164-165.

[7] 발상 후 상갓집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분위기로 가득하지만, 장례 전야에는 온 마을 주민들을 위한 잔치가 배설된다. 이것이 바로 ‘다시래기’인데, 그 중심부에 아이를 낳는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이 진행된다. 이 연극을 통해 태어남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태어남이어서 태어남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발상 후 깊은 시름에 잠겼던 유족들은 잃었던 웃음을 되찾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래기’는 유족들에게 고인이 저승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슬픔을 극복하여 현실의 삶에 적응케 함으로써, 상례 후 다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곽혜원, 『현대세계의 위기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한들, 2008), 276.

[8]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 178-180.

[9] 니콜라오스 바실리아디스, 『죽음의 신비: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정교회의 신학』, 박용범 옮김(서울: 한국정교회출판부, 2010).

[1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11]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후 15:55).

[12] 김균진, 『죽음과 부활의 신학』(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45.

[13] 김동건, 『빛, 색깔, 공기: 우리가 죽음을 대할 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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