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늘 묵상했을 뿐 아니라 죽음을 앞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삶으로 실천했다.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며 영성(靈性)이 더 깊어져 가는 임종자들을 보며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힘썼는데, 이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본문 중)

곽혜원(21세기교회와신학포럼)[1]

 

교회가 태동할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임종(臨終)의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를 수 있는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확신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죽음을 인생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영적인 사건, 영생(永生)의 모든 것이 걸린 심오한 사건으로 믿고 죽음이라는 신성한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였다. 그들은 삶의 매 순간마다 죽음을 떠올림으로써 허망하게 스러져갈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한평생 영원(永遠)을 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역사 내내 죽음을 묵상하고 준비하는 전통이 이어져 왔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늘 묵상했을 뿐 아니라 죽음을 앞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삶으로 실천했다.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며 영성(靈性)이 더 깊어져 가는 임종자들을 보며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힘썼는데, 이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자들이 임종하면서 영생으로 들어갈 때, 내세(來世), 곧 천국을 엿보기도 했다. 임종자들과 함께 있으면 인간이 죽음을 통해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임종자 중에는 신앙의 증거로서 교훈을 (또는, 신앙의 증거를) 남기고자 공개적으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삶의 변화를 받게 될 뿐 아니라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2]

이교도들은 영혼만이 고결하고 몸은 천하게 여기는 영혼불멸설을 신봉했기 때문에 죽게 된 환자를 유기하듯 방치했지만,[3]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환자를 헌신적으로 보살폈고 임종자의 장례를 정성스럽게 치러주었다. 그들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롬 14:9)를 믿었기 때문에 비(非)그리스도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와 죽음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일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사역이 되었고 오랜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초대교회가 급성장하는 데 중대한 밑거름이 되었다.[4]

 

 

특별히 주목할 것은, 초대교회가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성도의 존엄한 죽음’이라는 기독교의 귀중한 전통을 세우게 된 일이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던 병자와 과부와 고아를 긍휼히 여기고 보살핌으로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대정신을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와 노인의 죽음을 하찮은 죽음으로 여겨 함부로 대하던 당대의 비인간적인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치 기적처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생명(生命)을 부여받은 인간이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하게 생을 마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창 1:27)인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죽음을 묵상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자들은 인생 여정 자체를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비하는 과정으로 여겼고, 죽음의 준비는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한평생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신실하게 살아가면서 삶의 최우선 순위에 마음의 중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간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복된 죽음에 필요한 영적인 준비가 하루아침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노인만큼이나 죽음에 빈번히 노출되었던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기독교 신앙에 기반하여 복된 죽음을 준비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5]

죽음의 성찰과 임종자 돌봄은 서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죽음의 기술’(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 전통으로 정착되었다. 본래 『죽음의 기술』은 죽음이 온 유럽을 강타한 15세기 당시 흑사병으로 인한 대량 사망 때문에 임종을 동반해줄 성직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속에서 제작된 목판화집이다.[6] 많은 사람이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기에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잘 죽는 방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죽음의 기술』 책자가 널리 보급되어 사제 역할을 대신 감당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죽음 이후에 일어날 부활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과정을 큰 두려움 없이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이후 『죽음의 기술』은 그리스도인의 임종 시 죽는 법을 안내하는 실천적 매뉴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흑사병 이외에도 콜레라나 천연두 같은 급성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상도 성행하였다.

 

독일 무명 화가의 목판화 작품인 ‘Ars moriendi(죽음의 기술)’ 중 하나로 147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출처: wikipedia 갈무리)

 

그러나 죽음을 성찰하는 교회의 귀중한 전통은, 20세기 들어와 의학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갑자기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임종의 장소가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지고,[7]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리에 따라 죽음을 준비하던 과정이 무의미한 연명의료 시스템에 오염되고, 상장례(喪葬禮)에서 교회 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이 상업적 상조업체에 대폭 이관되면서 죽음을 돌보던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갔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죽음의 과정을 견뎌냈던 ‘죽음의 기술’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일상과 같은 삶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지만, 20세기 이후 그리스도인은 나날이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장구한 세월 동안 전승되어 온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 전통을 잃어버리고 성도의 존엄한 죽음이라는 옛 비전(vision)을 포기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는 어떠한가? 특별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죽음을 묵상하는 초대교회의 귀중한 신앙 전통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교회 안팎의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이, 현재 한국교회는 급속도로 세속화되면서 지나치게 비본질적인 일에 얽매어 있고, 허망하게 스러져갈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으면서 신앙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삶과 죽음을 영원(永遠)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특히 부활(復活)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상실함으로써 초래된 문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죽음을 깊이 성찰하며 영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귀중한 신앙전통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며, 또한 한국교회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죽음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인의 죽음의 질이 전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는 상황 속에서[8] 한국 개신교인의 죽음의 질은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보다 더 열악할 것으로 우려되는 현실적 표지가 도처에서 발견되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살 문제가 바로 한국 개신교인의 문제라는 대내외적인 지적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이들이 많은 현실을 들 수 있다.[9] 개신교인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는 실태가 일반인에 비해 더 심각하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의술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너무 과도하게 오용한 후에 몹시 힘겹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10]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개신교는 먼저 정착한 전통 종교들(무교ㆍ불교ㆍ유교)과 죽음 이해를 둘러싸고 대립해 왔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죽음에 대해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지속적인 관계성을 고수하는 전통 종교들의 죽음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다 보니,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들 종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죽음에 대한 일반의 태도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현재 일반 사회에서는 죽음의 질을 높이는 일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커져 가지만, 한국교회는 성도의 죽음의 질 향상을 위해 실질적으로 노력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처한 난감한 정황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왜 이토록 개신교인들의 죽음의 질이 낮은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생긴다. 사실 기독교는 ‘죽음을 극복한 부활의 종교’로 일컬어지는데, 이 부활의 종교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이 왜 이렇게 복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초대교회의 귀중한 신앙 전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죽음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이 한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여 성도들이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다음 글에서는 성서의 죽음 이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등 다수가 있다.

[2] 임종자의 가족과 친구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기록으로 남겨서 이를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이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 형제자매를 잃은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 고인을 애도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이의 이야기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다시금 새롭게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3] 고대 로마의 대다수 의사들은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들을 돌보기를 꺼렸는데, 이로 인해 결국 환자들은 안락사를 택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고대세계에서는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이 다반사로 행해졌다. 이안 다우비긴(I. Daubigin), 『안락사의 역사』, 신윤경 옮김(서울: 섬돌, 2007), 27.

[4] 오늘날 병원 형태의 의료기관은 초대교회가 환자들을 돌보던 사역 전통을 기반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 내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각처에 병원을 세웠고, 죽음을 앞둔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을 돌보는 기관을 설립하였다.

[5] 잠은 죽음과 닮은 점이 많은데, 아이들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이제 잠자리에 듭니다. 주님, 제 영혼을 지켜 주세요. 만약 내일 아침 깨기 전에 죽는다면, 주님이 제 영혼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6] 『죽음의 기술』 목판화가 출판된 1347년에는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인해 당시 전 유럽 인구의 대략 3분의 1이었던 7,500만 명이 사망하여 도처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던 때였다.

[7] 과거에는 집 밖에서 사망하는 객사(客死)가 매우 기피할 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1990년에는 집에서 임종하는 사람이 거의 80%대, 병원에서 임종하는 사람이 10%대였는데, 지난 20년 사이 완전히 역전되어 현재는 병원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거의 90%이며 집에서 임종하는 사람이 10% 정도이다. 임종 장소가 집에서 병원으로 변화된 추이를 보면, 우리 국민의 변화된 임종 환경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윤영호,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서울: 엘도라도, 2014), 43 이하.

[8] 2010년 OECD 40개국을 대상으로 한 죽음의 질 조사결과에 따르면,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죽음의 질은 최하위인 32위(3.7점)에 불과했다. 참고로 1·2위는 영국·호주(7.9점), 9위는 미국(6.2점), 23위는 일본(4.7점)이다. 2015년 조사에서 대한민국은 80개국 중 18위를 점함으로써 죽음의 질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용 면에서 보면 여전히 미흡하다. 왜냐하면 국제 경쟁력을 갖춘 우수한 건강보험 제도와 의료 인력으로 인해 순위가 상향 조정되었지만, 치료의 질과 완화의료 및 헬스케어 측면에서는 33위를 기록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여전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9] 최근의 임상 경험을 통해 한 저자는 평소에 성실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인정받던 교회의 중진 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증언한다. 김충렬, 『자살과 목회상담』(서울: 학지사, 2010), 26, 56f.

[10] 국내 연구 자료는 발표된 바 없지만, 해외 연구 결과는 이를 입증한다. 「미국의학협회지」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그 중 95%가 개신교인)은 죽음을 앞두고 적극적인 연명의료(수명연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를 선택하는 경향이 비종교인에 비해 무려 세 배나 높다. 또한 이 연구는 종교를 의지하면 공격적인 항암치료를 받는 성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밝힌다. 목회자의 심방을 받은 환자들은 그렇지 않은 환자들에 비해 죽음의 질이 더 낮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연구는 종교인들(주로 개신교인들)이 적극적인 의료개입을 강행할 뿐 아니라, 마지막 신변 정리에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왜 그러한가? 이 연구에 따르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불치병을 치료해 주시리라고 믿거나, 적극적인 연명의료로 수명을 연장하는 동안 기적 같은 치유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http://blog.christianitytoday.com/ctliveblog/archives/2009/03/more-on-the-ch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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