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살인이 서로 맞물려 일어나는 추세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친족을 대상으로 한 반인륜적 패륜 범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중략) 몇 년 전 우리를 더욱 참담하게 했던 것은, 사역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잔혹한 흉악범죄에 연루된 일이었다. 그토록 강인한 생명력으로 격동의 세월을 헤쳐 왔던 우리 국민이 어쩌다가 이렇게 반생명적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절대적 빈곤 속에서도 서로가 끈끈하게 살아왔던 우리 국민이 어쩌다가 이렇게 인륜을 저버리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본문 중)

곽혜원(21세기교회와신학포럼)[1]

 

언제부턴가 (아마도 IMF 외환위기 전후부터인 것 같다) 반생명적이고 반인륜적인 분위기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특별히 생명과 죽음(生死)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삶의 벼랑 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잔혹한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현실은 나를 죽이려 하거나 남을 죽이려 하는 충동, 즉 자살과 같이 자신을 공격하는 감정과 살인과 같이 남을 공격하는 감정이 우리 사회 안에 확산되는 일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한민국은 1998년부터 2016년까지 20년 가까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유지했었다.[2] 너무나 다행스럽게 재작년부터 자살률이 많이 하락했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와의 격차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3] 게다가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법의학 체계의 미비와 자살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인해 실제보다 20~30퍼센트 정도 누락 집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자살시도자는 자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20~30배(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자살사고자는 100배 이상)에 달하는 상황이다.

 

2016년 10월 5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회원국들의 사회적 안정성과 통합성을 종합적으로 비교분석하여 발표한 ‘한눈에 보는 사회상’ 2016년판 중 ‘자살’ 부분.

 

자살과 살인이 서로 맞물려 일어나는 추세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친족을 대상으로 한 반인륜적 패륜 범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4] 더욱이 과거에는 사이코패스나 범할 법한 극악무도한 흉악범죄가 최근에는 우리 주변의 너무나 평범한 이웃에 의해 자행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몇 년 전 우리를 더욱 참담하게 했던 것은, 사역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잔혹한 흉악범죄에 연루된 일이었다. 그토록 강인한 생명력으로 격동의 세월을 헤쳐 왔던 우리 국민이 어쩌다가 이렇게 반생명적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절대적 빈곤 속에서도 서로가 끈끈하게 살아왔던 우리 국민이 어쩌다가 이렇게 인륜을 저버리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가 파행으로 치닫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이 유사 이래로 엄청난 역사적 질고를 헤쳐 오면서 영혼이 피폐할 대로 피폐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숱한 고난과 역경, 가난과 치욕의 역사를 혹독하게 겪어온 우리 민족은 서구 세계가 장구한 세월 동안 이룩했던 산업화·근대화·민주화를 최단기간에 성취하였으나 그 대가로 그만큼 심신이 고단해지고 정신이 병들게 되었다.

우리 국민은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불안과 생존경쟁의 각축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트레스로 연령을 초월하여 거의 모두가 집단적 우울 정서를 겪고 있다. 학업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청소년(자살이 사망원인 1순위)의 정서는 나날이 메말라간다. 신(新)빈곤층으로 전락한 20·30대 청년층(자살이 사망원인 1순위)에게 우울증은 질병 제1순위다. 자살과 고독사의 가장 큰 희생양인 40·50대 중장년층(자살이 사망원인 2순위)은 알코올로 우울한 심신을 달랜다. 가장 험난한 역사를 살아왔지만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노년층(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저지르는 강력범죄의 증가는 자포자기적 절망감의 발로이다.[5]

우리 국민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민족적 저력으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 민주주의를 기적적으로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빈곤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처럼 현재도 여전히 불행감 속에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우리 국민의 상승한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 하위 수준의 행복지수와 함께 위로와 힐링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의 최대 관심사가 된 현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더욱이 우리 국민은 삶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서 극도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역사적 격랑과 사회변동을 겪어오면서 황폐해진 우리 국민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시대적 과제라고 십수 년 전부터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심각하게 훼손된 우리 국민의 인성을 과연 어떻게 순화할 수 있는가? 반생명·반인륜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를 과연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예수를 따르기보다 세속적 가치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한국 교회의 왜곡된 영성을 어떻게 갱신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필자는 ‘죽음에 대한 묵상’이 그 해결책이라고 답변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염세적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죽음을 묵상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실하지 못했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남은 날들을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죽음 앞에 서게 되면 그동안 이기적으로 살아왔거나 무책임하게 저지른 행동을 사죄하고 싶어지고, 모든 가식을 벗고 진실해지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다. 또한 일상에서 죽음을 숙고하는 경험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게 만듦으로써, 이를 통해 인생 전반이 차츰차츰 변화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훼손된 인성도 서서히 회복된다.

죽음을 숙고하면서 인생 자체가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죽음을 묵상하면서 생명이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심리적 건강도 향상되어서, 심한 자살 충동을 느꼈던 사람들이 치유되었다는 사례가 상당수 보고된다.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도 언젠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을 깨달으면서, 부질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행동을 삼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해야 할 사랑의 말이나 용서·감사·축복의 말들을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오랜 세월 가족 간에 맺혀 있던 응어리들이 풀어지고 주변 사람과의 인간관계 자체가 변화되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6]

죽음에 대한 묵상이 주는 변화는 개인 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죽음의 성찰은 낯선 타인을 돕고 싶은 연민과 배려, 인내심이나 이타심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연구보고서도 발표된 바 있다.[7] 이런 내용과 함께 이 연구보고서는 또한 공동묘지를 정기적으로 산책하는 사람은 낯선 타인에 대한 배려를 더 많이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므로 죽음의 성찰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간애(人間愛)를 가진 인성을 갖게 만들 뿐만 아니라, 비정한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현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과 맞대면하게 될 죽음을 매순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영원(永遠)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면, 교회와 성도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결코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언젠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허망하게 스러질 이 세상 현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의 영성을 붙잡아 줄 수 있다.

 

ⓒpixabay.

 

우리는 천만년이라도 살 것처럼 세상 것을 다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이요, 본질적인 것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죽음은 우리가 광대한 영원의 바다 속에서 표류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며,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가는 우리 인생이 영겁의 세월 속에서 점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미미한 것임을 인식케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시신이 누울 한 평 정도의 땅만 필요할 뿐이다. 우리 삶은 바람처럼 흘러서 잠시 왔다 돌아가는 삶인 것이다.

이처럼 매순간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죽음을 묵상하는 영적·정신적 풍토가 조성되면, 개인의 인성은 물론 사회 분위기도 변화될 수 있다. 삶의 마지막을 깊이 사유하면서 살아가는 개인과 사회는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오직 단 한번뿐인 우리의 인생, 수고와 소망과 두려움으로 엮어진 우리의 나날이 속히 지나가고 어느 날 홀연히 하나님이 부르시면 순종하며 가야 할 그 길을 우리가 항상 기억한다면, 우리 안의 추하고 더러운 것을 다 털어버리고 아름답고 깨끗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영원을 준비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사무치고 이 세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탐욕에 휘둘려 우리의 영성이 이지러질 때마다 죽음을 묵상해야 할 것이다.


[1]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등 다수가 있다.

[2] 경찰청 자료에 근거함. 참고로, 우리나라 자살통계는 경찰청과 통계청에서 이원적으로 발표한다.

[3] https://data.oecd.org/healthstat/suicide-rates.htm (편집자 주)

[4]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2년 5년간 친족 대상 패륜 범죄자가 10만 명을 넘어선(10만 2948명)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존속범죄(존속살해ㆍ상해ㆍ폭행)는 매년 증가일로에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정성국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체 살인사건 중 가족 간 살해 비율이 약 5%인데, 이는 다른 국가(미국 2%, 영국 1% 등)와 비교할 때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한다. 존속살해는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지만, 비속살해는 증가세에도 불구하고 공식통계에 안 잡히는 경우가 많아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5] 최근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노년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70대 절도가 급증할 뿐만 아니라, 노인에 의한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등의 강력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노인범죄의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근래 들어 노인층이 퇴물 취급을 당하는 동시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정서적 상실감과 소외감이 강력 범죄로 이어진다고 진단하고 있다.

[6] 최화숙,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서울: 월간조선사, 2004); M. Callanan, 이기동 역, 『마지막 여행』(서울: 프리뷰, 2013).

[7] 미국 미주리 대학의 심리학자 케네스 베일의 연구보고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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