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것은 은혜이지 특혜가 아니었습니다. ‘은혜’(grace)는, 먼저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 후로 일생 만나는 허다한 이들에게 ‘신적 호의’(divine favor)를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세속적 이익을 희생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고난도 많이 겪습니다. 은혜를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공적 인격이 형성되려면 사적 신앙이 깎여야 하기 때문입니다.(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오래 전,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역자 회의 시간이었는데, 어느 부교역자 한 분이 자기가 성경 QT를 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깨달음인가 다들 귀를 기울였습니다. “은혜는 특혜더라고요.” 그 자리에 있던 부교역자들은 그 말이 정말 은혜가 된다면서 그 후 예배 시간마다 교인들에게 그 메시지를 확산시켰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은혜는 특혜인 거 아시지요. 우린 그야말로 특혜받은 사람들인 겁니다!” 이렇게 전하니까 교인들이 다들 얼굴빛이 환해지면서 “아멘, 아멘.” 그러면서 좋아들 하시는데 저는 왠지 좀 불안했습니다. ‘정말 은혜가 특혜일까?’
사실 우리 사회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로도 줄곧 특혜에 유달리 집착해왔습니다. ‘특혜’(privilege)란 어떤 특별한 계층에 속한 특정인에게만 예외적으로 잘해주는 유별난 대우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특권인 것이지요. 특혜의 혜택은 특혜받은 그 사람에게서 끝납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특혜를 받은 소수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은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특혜라는 용어를 쉽게 은혜에 대응시킬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그렇게 특혜 신앙을 강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에서 간증 집회가 열렸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자기가 “하나님! 돈벼락을 내려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뜨겁게 했더니 남편 사업이 대박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한참 동안 교회 여기저기서 여성 교우들의 ‘돈벼락’ 기도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얼마 후 간증하신 분의 남편 사업이 이번엔 쪽박을 찼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렸고, ‘돈벼락’ 기도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특혜’ 신앙과 ‘돈벼락’ 기도로 연결된 그 씁쓸한 추억 한 토막은 비단 제가 섬기던 교회만의 웃지 못할 진풍경은 아닐 것입니다.
2018년 한신대 김영수 교수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토착성령운동은 영성의 개인적 경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1] 교단을 막론하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세속 가치를 추구하는 가족 중심의 청원 기도가 기도 생활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물론 청원 기도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라는 찬양 가사처럼, 우리 인간은, 들에 피는 꽃이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인 돌보심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교회 신자들 대다수의 기도 패턴에서 사적인 영성의 흐름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는 하나의 거울과 같습니다. 세속적 욕망을 담은 개인 기도만 넘쳐나는 풍경은 우리 교회의 가르침의 골자가 개인의 영혼 구원과 현세의 생존 혹은 번영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은혜 신앙을 특혜 신앙으로 둔갑시켜가며 사적 영성의 흐름을 집요하게 강화하는 바람에, 교회의 공적 기능과 대사회적인 공적 역할을 소홀하게 만든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것은 은혜이지 특혜가 아니었습니다. ‘은혜’(grace)는, 먼저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 후로 일생 만나는 허다한 이들에게 ‘신적 호의’(divine favor)를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세속적 이익을 희생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고난도 많이 겪습니다. 은혜를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공적 인격이 형성되려면 사적 신앙이 깎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은혜의 길로 부르신 후,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나게 하신 것은 기근이라는 시련이었습니다. 예전에 갈대아 우르 땅에서 특혜를 누리며 살던 세상 때를 벗기시려고 믿음의 테스트를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친일파 이완용처럼 특혜의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는 말을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사익을 손쉽게 달성하는 지름길로 어서 달리라고 손짓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험난한 가시밭길을 감수하면 끝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를 그저 사적인 특혜 수준으로 강등하여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회퍼 목사가 독일 교회의 ‘값싼 은혜’(cheap grace) 신앙을 탄식했던 걸 보면, 이러한 일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꿈꾸는 특혜가 나의 삶을 잘 풀리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만들어 주십니다. 특혜는 나만 예외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면, 은혜는 모두가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흘러나갑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나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식의 감정을 품는 것은 사적 복음을 강화할 뿐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본문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너는 내 것이라”(사 43:1)라는 말씀을 특혜라는 브랜드의 안경으로 즐겨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만을 위한 복음이 탄생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특별하단다”라는 성경 메시지가 어느새 “너만 (하나님께) 특별하단다”로 슬쩍 둔갑해버립니다. 이런 식의 개인 중심의 달달한 성경 읽기를 강조하는 분위기에 젖어 지내다 보면, 기독교인들이 어떤 모습이 되어갈지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나 자신, 내 가정의 구원과 번영은 너무나 중요한데 정작 세상과 이웃의 애달픈 한숨 소리에는 무심한 자들로 점점 변해갈 것입니다.
시인 안도현은 읽으면서 몇 번이고 반성문을 써야만 했던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집쟁이 농사꾼이라 불리는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입니다. 이보다 더 기억에 남는 책 제목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 제목처럼, 설사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특혜를 억지로 받아내서 “내가 제일 잘 나가!”라고 노래를 우쭐거리며 부른다 해도, 그 삶이 정말 사는 재미가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이방의 집권자들이나 예루살렘의 고위직들이 이런 부류일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이란 혼자만 잘살면 재미가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 누누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혼자만 잘 되고자 하면 도리어 허무하게 되도록,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로 지어졌으며, 반(反)공동체적으로 살면 결국엔 불행해질 수밖에 없도록 조건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영성신학자 필립 셸드레이크(Philip Sheldrake)는, 인간의 마음이란 공동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내적 사랑을 공유하는 공동체 또는 사회로 부름 받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관계적 형상이 깃들어 있어서 인간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에서 충만함을 느낄 때만 온전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인간의 마음은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로 확장될 때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2] 전우익 선생이 말하는 “사는 재미”와 셸드레이크가 말하는 “살아있음의 느낌”은 실은 동일한 영적 현상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사는 재미”와 “살아있음의 느낌”이 듬뿍 담긴 은혜의 신앙을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교회가, “혼자만 잘 돼도 괜찮지 않아?”라고 하는 특혜 신앙에 안일하게 푹 젖어 지내온 건 아닌지 깊이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혜 신앙이 아닌 은혜 신앙을 회복하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본이 되었던 선각자들의 삶에 담긴 어떤 ‘공통성’(commonality)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교회사학자 김명혁 목사는, 은혜의 삶을 보여준 기독교 영성가들이 공유했던 모습은 예수님의 착함, 약함, 주변성을 닮으려는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버리는 ‘약함’.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 함께 살며 나누고 베푸는 ‘착함’. 자기를 부인하고 중심지를 떠나 변두리로 달려가는 ‘주변성’. 한국 교회의 선각자들은 이 같은 영성의 펜 세 자루만 가지고도 공공성의 종이 위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아름답고도 넉넉하게 써 내려갔다는 것이지요. 당대 최고의 의사였지만 병원 옥탑방에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고, 빈자들을 무료 진료하며 의료보험 제도의 싹을 마련했던 장기려 박사. 오산학교를 설립한 겨레의 스승이면서도 학교 똥통 청소는 늘 도맡아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 미국에서 고학한 끝에 일군 서구식 기업을 고국에서 더욱 꽃피웠고, 그 결실을 전부 사회에 환원했던 기업가 유일한 박사. 피난민으로 시작된 대형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청빈, 검소, 겸손으로 나라와 민족을 신실하게 섬겼던 한경직 목사. 유복한 집안의 신여성으로 자랐지만 고아와 병자, 걸인과 나환자를 지극한 사랑과 기도로 섬기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선의 성자 방애인 선생. 성서적 토지 운동을 위해 몸소 평등과 우애의 공동체를 태백 골짜기에 일구며 영성과 공공성 결합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벽안의 수도자 대천덕 신부. 한국교회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한결같이 물신주의와 성공주의, 국가주의와 개인주의의 우상에 굴복하는 사적 신앙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은총을 맛보고는 자신의 실력과 자산을 아낌없이 봉헌했고, 일생 겸손하게 공익을 위한 자기부정의 삶을 오롯이 감당했지요. 그들의 삶이 공통점은, 사적 특혜의 길을 단호히 거부하고, 거룩하신 주님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흠모하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일생 끝까지 공적 은혜의 여정을 따른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온갖 특혜들을 대담하게 움켜쥐는 사적 신앙으로 인해 교회의 공공성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수치스러운 일련의 사태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국가적으로도 권력을 잡은 자들이 보수와 진보, 이념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적 특권에 탐닉하고 위선의 진상이 만천하에 공개되어도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채 대한민국의 흑역사를 민망하게 써 내려 가는 중입니다. 모든 국민이 더불어 사는 맛이 나도록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국가 경영은 고사하고 독선에 빠져 지내는 위정자들의 민낯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 은혜의 가시밭길보다는 특혜의 꽃길을 더 칭송해온 한국 교회의 영적, 사회적 책임이 크고도 두렵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 권력 다툼, 번영 신학, 돈벼락 기도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약함, 착함, 주변성을 공적 영성의 기준으로 삼아 은혜의 경주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이지 은혜는 특혜가 아닙니다.
[1] 김영수. “한국 교회의 기도원 영성 이해”. (디바인영성아카데미학회, 2018).
[2] Philip Sheldrake. 『Exploration in Spirituality: History, Theology, and Social Practice』. (Paulist Press, 2014). 58,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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