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팀 켈러의 직업과 소명에 대한 이해를 그의 책 『일과 영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직업과 소명에 대한 켈러의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직업과 소명은 신앙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제이며 또한 삶에서 신앙의 갈등을 가장 많이 겪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직업과 소명이라는 영역은 켈러와 리디머 교회의 사역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영역입니다.(본문 중)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⑧: 『팀 켈러의 일과 영성』

일은 이웃과 지역 사회를 사랑하는 수단이다

 

김상일(보스턴대학교 실천신학 박사과정)

 

이번 글에서는 팀 켈러의 직업과 소명에 대한 이해를 그의 책 『일과 영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직업과 소명에 대한 켈러의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직업과 소명은 신앙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제이며 또한 삶에서 신앙의 갈등을 가장 많이 겪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직업과 소명이라는 영역은 켈러와 리디머 교회의 사역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목회자로서 켈러는 사람들이 직업과 소명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에 함께 공감하며 고민합니다. 일단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켈러에게 있어서 직업과 소명의 문제는 ‘공동선’(the good of all)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현대 문화 속에서 직업과 소명을 공동선의 문제로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켈러는 『일과 영성』의 서론에서 저명한 사회학자인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의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을 인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표현적 개인주의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합니다.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는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에서 우리 문화의 응집력을 갉아먹어 버린 것을 콕 찍어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표현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함께 공유하는 삶이라든지 사회 구성원 전체를 한데 묶는 지배적인 진리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게 했다. 벨라는 이렇게 적었다. “개인의 신성함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쪽으로 현대 사회가 급속하게 기울어가면서 그 개인들을 한데 묶는 사회 구조를 그려내는 상상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개인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는 관념과, 전체를 보는 감각이나 공동선(the good of all)에 대한 관심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습관 말미에서 저자는 해체된 문화를 다시 결속시키는 긴 과정을 치러 낼 방법을 제시한다. (『일과 영성』, 20-21)

 

『마음의 습관의 저자』 로버트 벨라(1927~2013).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종교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벨라가 바라보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켈러는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이 되어 가는 사회가 다시금 공동선(the good of all)을 추구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들 만한 좋은 대안이 기독교의 ‘소명’ 혹은 ‘부르심’ 같은 개념에서 나온다는 벨라의 주장을 인용합니다.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 (이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과 영성』, 20-21; 『마음의 습관』, 287-288로부터 인용됨)

즉 켈러는 벨라의 통찰을 이어받아 일과 소명의 문제를 공동선(the good of all)의 문제로 보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여기에 대해서 켈러는 어느 영국인 의사가 의료 현장에서 일하면서 경험하는 유혹과 갈등에 대해 고백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의료인들이 받는 시험은 생명을 인계받아서 노예로 만드는 권력으로 지배하라는 유혹이다.…다른 이들의 삶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 아주 많은 것들을 (시간, 책임, 스트레스를 비롯해) 베풀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래는 일종의 자아 마사지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지극히 교묘하고 은밀한 꼬드김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부류의 우상 숭배는 자기 합리화를 뒷받침하는 상당히 큰 힘이 있어서 의사는 증권 거래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기 쉽다.…어떤 이들은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가 있으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일과 영성』, 217)

이런 유혹은 공동선으로서의 직업과 소명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따라서 켈러는 복음이 바라보는 직업과 소명이 어떻게 공동선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합니다. 특히 이런 유혹은 사회적 상상이라는 차원에서 나타나며, 복음은 직업과 소명이라는 영역에서도 독특한 나름의 사회적 상상을 펼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도 켈러의 직업과 소명에 관한 비전을 사회적 상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특히 직업 세계가 흔히 우리에게 주입하는 네 가지 사회적 상상을 분석하고, 그에 대응하는 복음의 사회적 상상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노동자가 되게 하는지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그 네 가지 짝을 이루는 사회적 상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은 필요악이다 vs 일은 선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낸다

켈러는 일이 필요악이라는 사회적 상상이 이미 고대의 세계관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음을 설파합니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신들이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일은 필요하긴 하지만 가능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필요악, 혹은 심지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일을 시키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다. 일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드리아노 틸게르(Adriano Tilgher)의 말처럼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업 상태”(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능력이 되는)야 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의 첫 번째 요건이라고 했다.…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edo)에서 육신에 속한 존재는 영혼의 길을 왜곡하고 방해해서 진리를 좇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상에서 영적인 통찰과 정결한 삶을 추구하며 훈련하는 이들은 힘닿는 데까지 육체를 무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죽음은 일종의 해방이었으며, 영혼의 친구였다. (『일과 영성』, 56-57)

따라서 노동, 특히 육체노동은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었으며, 특별히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에게는 정말 악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독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 말은 곧 인간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듯이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낸다고 켈러는 말합니다.

이러한 사안들에 관한 성경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손으로 하든, 머리로 하든 일이란 일은 죄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증표로 인식한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학자 데렉 키드너(Derek Kidner)는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는 내용을 다루는 창세기 1장에서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오로지 사람만이 일, 곧 직무(창 1:26하, 28하; 2:19, 비교: 시 8:4-8, 약 3:7)를 맡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식물과 짐승들은 그저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따름인데 유독 인간은 명확하게 일을 부여받았다. 정복하고 지배하며 세상을 다스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할 일을 구체적으로 받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고대 근동의 통치자들은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력 행사를 요구받는 자리에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형물을 세웠다. 지배자의 이런 이미지들은 직접 그 자리에 머물며 다스린다는 상징이었다.” 창세기 1장 26절이 ‘다스리라’는 명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런 통치 행위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규정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Vice-Regent)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주님이 창조 과정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 본성을 사용하여 창의적으로 문명을 세우고, 친히 지으신 만물을 보살피는 일들을 나눠 맡게 된 것이다. 창조주가 인간을 지으시며 기대하신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일과 영성』, 59-60)

종합하면, 일은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것이며, 그렇기에 그 자체로 선합니다. 이런 일은 단지 거창하게 보이는 것, 그 사회적 기여가 명확히 보이며, 보수가 상대적으로 높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일, 예를 들면 정치나 경제, 혹은 의료나 언론 등 소위 정보·서비스업 분야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기여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잘 드러나지 않고, 보수는 없거나 낮으며, 매일매일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 예를 들면 집안 청소, 아이 돌보기, 화장실 청소 등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선하다는 말은 사회적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얘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2. 일에는 귀천과 성속이 존재한다 vs 일에는 귀천도 성속도 없다

현대 문화에서 사람들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습니다. 켈러는 이런 암묵적이지만 널리 퍼져 있는 일과 직업에 대한 사회적 상상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은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고 믿는다. 이런 관념이 가져오는 폐단 가운데 하나는 너나없이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은사와는 맞지 않더라도 더 높은 봉급과 특혜를 주기만 하면 얼른 그 직장에 들어간다. 서구 사회는 큰 수입을 올리는 식자층과 형편없는 품삯을 받는 ‘서비스 부문’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으며, 대다수가 그 카테고리에 따른 가치관을 받아들여 다시 전수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천하게 보는 노동을 하기보다는 일을 놓는 쪽을 택하고 있으며 대다수 서비스 직종과 육체노동이 이 범주에 속한다는 점도 큰 문제다. 이른바 식자층에 드는 이들이 경비원, 가사 도우미, 세탁부, 요리사, 정원사를 비롯해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업신여기는 듯 처신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일과 영성』, 58-59)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까닭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건들이 최근 우리 사회에 몇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일어난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일 겁니다. 한 기사에 의하면, 2014년 12월, 뉴욕 JFK 공항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그 회사 사주의 딸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미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서 활주로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사주의 딸은 승무원이 땅콩 및 견과류를 그릇에 담아내 오지 않고 봉지째 가져왔다는 이유로 비행기의 회항을 명령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은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 명백한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사주의 딸은 자신이 가진 힘과 부를 믿고 그렇게 지시하고, 사무장에게 내리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것,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너무 흔해져서 그런 행위를 가리키는 ‘갑질’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지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믿는다면, 자기 직업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의 근거가 내 직업이나 그로 인한 특권에 있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말하는 현대 문화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다면 직업의 성속은 어떨까요.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덜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는 사역자를 하나님의 종이자 제사장으로, 다른 성도들은 그냥 평신도로 부르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21세기 한국 교회뿐 아니라 중세 교회 또한 성직자들과 성도들이 완전히 다른 신분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흐름이 대세였다는 점입니다. 켈러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어떻게 이런 주장을 철저히 성경에 근거해서 타파했는지 말해줍니다.

루터는 오랜 세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붙들고 씨름했다. “수도사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한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보상이 될 만한 행위(종교적 노력)를 해서 주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는 얘길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사납고 쓰라린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로마서 1장 16-17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당시 심경을 루터는 이렇게 전한다. “비로소 ‘하나님의 의’란, 의인은 주님의 선물, 다시 말해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란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거듭나서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갔음을 여기서 절감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 저마다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루터는 일의 의미를 바라보는 시각을 포함해서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특히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우선,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결정적 요소라면 교회에서 목회하는 교직자들과 그 밖의 일을 하는 이들 사이에 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데 터럭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노동보다 조금도 우월할 게 없다. (『일과 영성』, 90)

하지만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단지 종교적인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직업에 귀천과 성속이 계속해서 나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귀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성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서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켈러는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설명합니다.

순전히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은 일에 관해 또 다른 통찰을 준다. 옛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속을 받으려 애썼던 반면, 대다수 현대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자존감과 자부심)을 찾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높은 보수와 지위를 보장하는 자리에 연연하며 비뚤어진 방식으로 그런 일들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일에 기대어 자신을 입증하고 정체성을 지키라는 압력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미 인정받고 안전해졌으므로 달리 애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단순 노동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와 고상해 보이는 일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가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일과 영성』, 90)

하지만 모든 일이 본질적으로 선하며, 귀천도, 성속도 없다는 점을 알았다고 해서, 성도들이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성도들은 직업의 목적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켈러는 바로 그 얘기를 합니다.

 

3. 일의 목적은 돈벌이다 vs 일의 목적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의 목적을 돈벌이 수단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일 자체가 가진 의미가 아니라, 일을 통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일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일이 가진 중요한 의미로 삼는 경향은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켈러는 이 부분에서 신앙인이자 뛰어난 여류 작가였던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를 인용합니다.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인간의 내면에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우리가 하는 일, 그 자체에 관해 생각하는 게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일을 설명하는 원리, 곧 하나님의 창조와 사람에 깃든 주님의 형상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그러므로 본질적인 (오늘날의) 이단은…일을 사회에 봉사하는 가운데 표출되는 인간의 창조 에너지가 아니라 돈을 벌고 여가를 얻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한다. (『일과 영성』 92; 도로시 세이어즈, 『신조인가 혼조인가』(Creed or Chaos), 42-43으로부터 인용)

하지만 만약 돈을 버는 것이 일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대다수의 성도들을 포함해서) 직업의 목적과 의미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은 자신이 일을 열심히 할 근본적인 동력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켈러는 다시 한 번 세이어즈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실마리는 우리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열심’ 혹은 ‘열정’을 관찰하는 데 있습니다. 세이어즈는 우리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심의 근본적 동인(motivation)이 정말 ‘사랑’인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오늘날 책을 읽든 강연을 듣든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가 바로 ‘열정’이다. 열정은 무얼 하든 탁월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열정의 원천도 다양하고 종류도 다채롭다. 때로는 성공을 추구한다기보다 실패가 두려워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런 부류의 열정은 엄청난 에너지를 내지만 크리스천의 시각으로 보자면 한낱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죽어가는 전구가 막바지에 밝게 타오르는 것 같아서 금방 사위고 만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유사 열정이 일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신조인가 혼조인가』라는 책에서 글쓴이는 ‘해태’(acedia)를 비롯해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인습적인 죄를 열거했다. 해태는 흔히 ‘나태(sloth)’로 번역되는데, 세이어즈는 올바른 풀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으름(나태라는 단어에 담긴 통상적인 뜻)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작가는 해태란 ‘무엇이 내게 보탬이 될까?’만 생각하는 손익분석에 이끌리는 삶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어디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야 할 까닭도 없기에 그저 살아 있을 따름인 죄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이 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있다면 그게 윤리적인 죄라는 점뿐일 것이다.” (『일과 영성』, 284-285)

직업 세계의 사회적 상상은 종종 이런 모습을 띱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열심과 열정을 가지게 만들지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열심과 열정은 사실 그 자체가 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동력을 어디서 얻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일과 직업의 주된 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서 오게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만이 아닌,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에서 동기를 얻으라고 주문합니다. 켈러는 다시 한 번 세이어즈를 빌어서 다음과 같이 강변합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일의 동기가 없으면 나머지 여섯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노동의 에너지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보다 앞에 서고 싶은 시기,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는 교만, 쾌락을 얻으려는 탐욕이나 탐심 때문에 남달리 열심히 일할 수도 있다. (『일과 영성』, 28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본질적 동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믿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켈러의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일과 직업을 넘어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켈러는 직업과 소명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복음의 선포에 대해서 말합니다.

 

4. 일은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vs 일은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짓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렇게 한다.

복음은 일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다른 무엇에서 일의 의미를 찾는 대신, 일 자체의 의미를 보게 해 준다고 이제까지 얘기했습니다. 일의 목적이 돈벌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 자체를 통해서 자아실현을 하는 일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서사(narrative)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리해서 세상을 가꾸고 지켜 나가며 더욱 발전시키라는 소명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일을 맡은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얘기하면 사실 피부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켈러는 탁월한 재즈 뮤지션인 존 콜트레인(Jon Coltrane)이 자신의 일인 음악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삼고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에 음악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나누는 글을 인용합니다.

1957년,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각성을 경험한 뒤로 더 풍성하며, 더 온전하고, 더 생산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감격에 겨운 채로 이제 음악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누구나 뜻깊은 삶을 살 수 있음을 더 깊이 자각하고…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특권을 누리게 하시며 거기서 의미를 찾게 해 달라고 겸손하게 간구했다.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셔서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일과 영성, 297; 『지극한 사랑』(A Love Supreme)에서 발췌)

 

미국의 재즈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존 콜트레인(1926~1967).

 

콜트레인이 이런 고백을 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 글에서 느껴지는 콜트레인의 음악에 관한 마음은 더 이상 음악을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57년의 영적 각성 이전의 콜트레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지금의 명성과 돈을 얻었지만, 여전히 음악이 자신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콜트레인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후, 이제껏 자기를 지탱해 왔던 음악에 대해서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한때는 콜트레인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였다. 마음 깊은 곳에 늘 한가지 생각을 품고 살았다. 정말 근사해진다면, 성공을 거둔다면, 다들 갈채를 보내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면 내가 괜찮은 인간이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거야.”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제대로 일하지도, 푹 쉬지도 못했다.…그러던 콜트레인의 내면에서 참다운 자아를 드러내는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밤, 빼어난 솜씨로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는 32분짜리 찬양{지고의 사랑(A Love Supreme)}을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오면서 그가 속삭였다.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is)!” 이는 누가복음 2장에서 약속된 메시아를 직접 본 시몬이 했던 말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뜻이다. 콜트레인은 일 자체를 위해 일하면서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일에 몰두하는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거룩한 능력을 받았으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만끽했다. 이후부터는 자신을 위해 연주하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음악을 위해, 청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일과 영성』, 297-298)

켈러가 말하는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일’이란,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확인받고 확증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받지 못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성향은 우리로 하여금 일 그 자체가 가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의도와 의미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며, 계속해서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한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확인받게 만듭니다. 그런 성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정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수단으로 우리의 일을 사용하는 것은 요원해집니다. 켈러는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의 주인공인 에릭 리델(Eric Liddell)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이 어떻게 리델에게 일의 본질적 의미를 찾게 해주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대조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본보기가 영화 <불의 전차>다. 한쪽 젊은이는 말 그대로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올림픽 경주에 나가 달리고 싶어 하는 반면, 또 다른 청년은 금메달을 놓칠지언정 주일을 지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쉬려 한다. 첫 번째 인물은 일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까닭에 반드시 금메달을 따려 한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그토록 갈망하는 깊은 쉼을 메달이 주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두 번째 인물은 헌신된 크리스천인 에릭 리델(Eric Liddell)인데, 올림픽 메달을 따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온전한 안식을 즐길 뿐이다. 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빨리 달리는 재주를 주셨고 “달릴 때 기쁨을” 느낀다고 털어놓는다. 뛰는 일 자체가 즐거운 데다가 그런 재주를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게 좋아서 달릴 뿐이라는 것이다. (『일과 영성』, 296)

일은 나의 정체성을 규정짓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일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 일에 귀천도, 성속도 없다는 것, 일의 목적이 돈벌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깊이 깨달아야만, 우리의 일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진정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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