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참여, 사회적 제자도란 명목으로 모두가(특히 보수주의 교회가) 광장에 나와 기독교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또한 종교의 자유라는 정치적 다원주의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기독교가 이제는 자신과 다른 의견과 입장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정치 집단으로 변해 있는 끔찍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이렇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사회참여는 얼마나 합리적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쳤는가.” “한국 교회가 주장하는 기독교의 공적 가치는 시민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질 토론과 비판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가.” 이것이 저자가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에서 들고 나온 문제의식이다.(본문 중)

정지영(IVP 기획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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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도서출판 100 | 2019. 10. 14 | 224쪽 | 13,000원

 

매년 연말이 되면, 주목할 만한 책을 꾸준히 소개해 왔던 매체에서는 ‘올해의 책’을 꼽는 행사를 연다. 작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판사들은 출판 불황이라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여느 때처럼 좋은 책들을 쏟아 냈다. 그러나 나는 기회가 닿는 대로 ‘올해의 책’ 선정에 불만을 표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올해의 책’에 ‘올해’가 없다고. 우리가 시공간을 초월해 살지 않는 이상, ‘올해의 책’에서 ‘올해’는 우리 삶의 정황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고 말이다. 그간 올해의 책은 대부분 올해를 초월하는 명작을 꼽는 데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보와 보수 모두가 광장에 나와 있는 현실을 담아낼 올해의 책으로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을 얘기하곤 했다. 그러다 최근 “이번 선거는 체제를 선택하는 선거다.” “문재인 정권 3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 “성령께서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주신다. 한국 사회가 개혁이 될지 정말 모르겠다” 같은 한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의 발언을 들으며 이 책 얘길 더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광장으로의 초대, 그 이후

교회의 사회적 책임, 복음의 공공성 같은 말들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로잔언약(1974)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소위 ‘87년형 복음주의’가 한국 교회에 주입한 사회적 회심, 사회적 제자도, 기독교 세계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주제는 이제 당연하다 못해 많은 이들이 지겹다고 말할 정도로 익숙하게 되었다.[1] 그러나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참여, 사회적 제자도란 명목으로 모두가(특히 보수주의 교회가) 광장에 나와 기독교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또한 종교의 자유라는 정치적 다원주의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기독교가 이제는 자신과 다른 의견과 입장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정치 집단으로 변해 있는 끔찍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이렇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사회참여는 얼마나 합리적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쳤는가.” “한국 교회가 주장하는 기독교의 공적 가치는 시민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질 토론과 비판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가.” 이것이 저자가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에서 들고 나온 문제의식이다.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목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윤리와 정치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공공신학을 접한다. 최근에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광장에 선 기독교』, 『행동하는 기독교』, 『인간의 번영』의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하나님』의 톰 라이트, 『왕을 기다리며』의 제임스 스미스 등이 이 주제에 가담함으로써 공공신학에 대한 관심이 좀 더 확산되고 있다. 보통 신학함의 바른 자세를 말할 때, ‘교회를 위한 신학’이란 표현을 쓴다. 그런데 공공신학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신학과 구별된다. 해서 볼프는 이를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공공신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개념이 뭔지 아직 명확하게 정립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야 하나의 신학 분과로 인식되면서 발전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어떤 신학 분과보다 콘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해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공공신학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려고 한다. 공공신학이 왜 등장했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로 발전했는지, 공공신학의 이해를 위한 개념으로서 공공성, 공론장, 시민사회, 시민종교가 무엇인지, 정치학, 철학, 사회학 같은 인접 학문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관련된 주요 주제와 이슈들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공공신학이 우리 현실에서 갖는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저자가 생각하는 공공신학의 방향을 제시한다. 부제 ‘공공신학과 현대 정치철학의 대화’는 이 책이 어떤 목적과 내용을 지녔는지를 잘 보여 준다. 저자는 처음 구상 단계에서는 쉽고 재미있게 공공신학을 대중에게 소개하려 했으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책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딱 이 정도 수준의 책이 관심 독자들에게는 적당하단 생각이 든다.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공공신학의 기원과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입문서로, 한마디로 말하면,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에 관한 지도 같은 책이다.

 

아래를 지향하는 공공신학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공공신학의 발생 과정과 전체 지형도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마지막 8장 ‘누구를 위한, 어떤 공공신학인가?’에서 공공신학이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지를 물어야 함을 강조하고, 환대로 이어지는 하향성을 공공신학의 방향 및 규범으로 제시한다. 해방신학과 헨리 나우웬이 말한 하향성의 삶 또는 영성과 비슷하게 저자는 아래로부터의 공공신학, 하향성의 공공신학을 주장한다. 사실 체제 유지 성격이 강한 개혁주의의 변혁적 모델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방신학 같은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신학에서 통찰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로버트 웨버가 『기독교 문화관』(엠마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정의가 평화와 입맞출 때까지』(IVP)에서 이미 각각 기독교 변혁 모델의 하나로 해방신학을 제시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통합한 바 있다. 로버트 웨버는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신복음주의 방식으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란 이름으로 신칼빈주의 방식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다. 웨버의 책과 관련해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해방신학에 대한 우리 보수신학의 거부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대목인데, 이승구 번역의 『기독교 문화관』에는 저자가 기독교 변혁 모델 중 하나로 제시한 해방신학 챕터를 우리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번역하지 않았다. 같은 책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역할』(CLC)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으니 책을 제대로 읽고 싶은 이들은 그 책을 읽기를 바란다.

결국 최근 기윤실의 성명서를 이끌어 냈던 한 목회자의 문제 발언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듯이, 지금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분들이 고통스럽다, 불안하다 표현한 것은 그들이 지금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공공신학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다면, 전형적인 중산층 복음주의를 대변하는 공공신학일 것이다. 이 점에서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은 지금 우리는 누구를 위한, 어떤 공공성을 지향하는 신학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지침을 제공한다.


[1] 심지어 로잔언약은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다윗의 별을 들고 정치적 혐오 발언을 쏟아 내고 있는 전광훈 목사와 그가 대표로 있는 한기총을 광장으로 이끌었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먼저 로잔이 한국에 공헌한 것이 크다. 제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신학위원장으로 섬길 당시 한국 교회 공동신앙고백서를 제안했다. 한기총에 아직 공동의 신앙고백이 없던 시기다. 그래서 15년째 되던 해에 각 교단 신학위원들이 공동신앙고백서를 위해 모였는데 다들 교단이 다른데 어떻게 만들까 고민했다. 그래서 제가 로잔언약을 중심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모든 신학위원, 임원회, 실행위가 동의했다. 총 17장으로 된 로잔언약을 본떠서 제목을 넣은 것이 지금 한기총의 공동신앙고백서가 된 것이다.” 한국로잔위원회 의장 이종윤 목사 인터뷰 중,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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