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원수, 궁극의 이아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가 멋도 모르고 덤비다가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말을 들었던 일도, 이아고와 연결해 생각하면 새롭게, 실감 나게 다가온다. 언제라도 그자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인식, 있어야겠다. 하지만 ‘저놈이 이아고가 아닐까?’하고 모든 사람, 모든 상황을 의심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오리지널 에필로그』 저자)

 

『오셀로』는 무슨 이야기인가. 물론 질투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지식한 장군이 악당의 말에 넘어가 아내를 의심하고, 질투를 이기지 못해 아내를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이는 치정 살인극이다. 다 아는 이야기. 단순한 줄거리. 뭐가 더 있겠느냐고? 글쎄, 너무 쉽게 단정하지 마시라.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눈으로 『오셀로』를 읽지 않은 것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경지에 이른 추리소설가가 『오셀로』를 읽으면 어떻게 보일까? 무엇이 눈에 들어올까? 꼭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추리소설가로서의 후각은 그 이야기 속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의 더듬이는 범죄의 동기부터 시작해서, 범죄의 수법, 은폐의 시도, 범죄가 밝혀지는 과정, 가능하면 추리 기법까지 찾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추리소설 비평가의 눈으로, 그 작품이 추리소설이라면 어떤 부분에서 탁월하고 어떤 부분에서 부족한지 비평하게 될 것이다.

 

오셀로 국내 번역판 표지. ⓒ민음사.

 

애거서 크리스티가 셰익스피어에게 바치는 오마주

『커튼』(Curtain: A Hercule Poirot’s Last Case, 황금가지 역간)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커튼』은 20세기 최고의 추리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던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소설가로서 『오셀로』를 읽고 셰익스피어에게 바친 오마주다. 『커튼』은 미스 마플과 더불어 애거서 크리스티가 낳은 또 하나의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 하지만 집필 시기로 본다면 이 작품이 푸아로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었다. 작가가 진작 써놓고 한참을 묵혀뒀던 작품이다. 말하자면 애거서 크리스티는 『오셀로』를 읽다가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의 마지막을 장식해줄 최악의 범죄자를 구상하고 『커튼』을 써놓고 때를 기다렸던 것이리라.

 

애거서 크리스트의 저작 『커튼』 국내 역본. ⓒ황금가지.

 

어떤 악당이라면 에르퀼 푸아로에게 걸맞은 악당이 될 수 있을까? 애거서 크리스티는 『오셀로』에서 그 전형이 되는 인물을 발견한다. 이아고. 『오셀로』에서는 모두 네 명이 죽는다. 데스데모나, 오셀로, 로데리고, 이아고의 아내. 그런데 범인은 두 사람이다. 로데리고와 이아고의 아내를 죽인 사람은 이아고, 데스데모나와 오셀로를 죽인 사람은 오셀로다. 하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는 데스데모나와 오셀로를 죽인 사람도 이아고라고 본다. 질투심을 못 이겨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이고 결국 스스로 칼을 들어 자결한 것은 오셀로였지만, 결국 모든 살인의 진정한 원인은 뒤에서 범죄를 계획하고 사람들을 조종했던 이아고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나아가, 그로부터 완벽한 살인 기술을 포착해낸다.

푸아로가 최후의 상대, 완전범죄자(이하 X)에 대해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자. “자네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네, 헤이스팅스. 사람들은 누구나 잠재적인 살인자라는 것. 살인을 저지를 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끔씩 살인을 하고픈 충동을 느낀다네. …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 …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지. … X가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살인의 욕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상적인 사회적 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네. 오랜 연습 끝에 완성된 기술이지. X는 사람들에게 암시를 하고 그들의 취약점에 더 무거운 압력을 가하기 위해 어떤 단어와 구절, 어조를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그리고 효과를 거두었지. X는 희생자에게 전혀 의심을 받지 않고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어. …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증폭시키는 방법이 그것이지. 최고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악랄한 기술이기도 하지.”

 

이아고에 대하여

물론 『커튼』의 X는 이아고의 한 측면의 화신이다. 안전한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모든 것을 조종하여 살인을 이끌어내는 그의 면모를 극대화하고 형상화한 인물이다. 결코 법망에 걸리는 일 없고, 의심도 사지 않고, 안전하게 계속해서 범죄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인물.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아야 하고, 사람의 목숨을 갖고 노는 일 자체를 즐겨야 한다. 말하자면 그게 순수한 취미여야 한다. 그 일 자체의 재미를 즐기는 존재여야 한다.

푸아로는 그것을 사디스트적인 욕망과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권력욕이라고 정의하며, 악당에게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셀로』의 악당 이아고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이다. 뒤에서 조종하고 암시를 흘리지만 여차하면 직접 칼을 휘두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커튼』의 X처럼 안전한 간접 살인에서만 기쁨을 느끼는 수도사적, 금욕주의자적인 존재도 아니다. 이아고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다. 기대했던 부관 자리를 얻지 못하자 상관인 오셀로와 부관 카시오에게 앙심을 품는다. 그도 질투에 사로잡혀 있다. 오셀로가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했다고 생각한다.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관계를 망치려는 집요한 노력은 나름대로는 복수의 시도였던 것.

과연 그랬을까? 오셀로와 이아고의 아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까? 정황상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아고가 다들 자기와 같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모든 사람을 다 꿰뚫어 본다고 생각한 데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아고가 데스데모나에 대해 오셀로에게 했던 말, “부인께서는 같은 나라, 같은 피부색, 같은 신분의 수많은 혼처를 모조리 외면했단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런 인간들의 욕망에서 가장 부패하고 추하게 일그러진 비정상적인 생각을 읽어낼 수 있죠”는 그의 본심이었다. 인간이란 다 그렇고 그런 존재, 정절입네 사랑입네, 하는 건 다 헛소리라 보았다. “그녀들의 도덕관이라는 건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들키는 거니까요.” 누구도 믿지 않았던 이아고. 그도 또한 의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을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일이요, 누구에게도 속지 않을 방어막이라 생각했다.

 

이아고에게 대처하는 법

『커튼』에서 X는 어디에 있건 사람들이 서로 죽이도록 유도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곳에는 불화가 싹트고 살인이 벌어진다. 그의 시도가 늘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적 상황(예를 들면 에르퀼 푸아로 같은!)도 있고,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타입의 사람(Y라 하자)도 있다. 푸아로는 그런 이의 특징을 본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흑백이 분명한 논리체계를 갖추고, 자신의 연구에 집중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먼저, 본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안다는 것이겠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규정해주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고, 오히려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말이겠다. 둘째, 흑백이 분명한 논리체계라. 아무리 원하는 게 있어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 해도,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에 대해 분명한 선을 가지고 있었다. 도덕 원칙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은근하게 살인을 부추겨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셋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갖고 힘껏 매진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매진하는 것. 이상이 엉뚱한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이라는 거다.

『오셀로』도, 『커튼』도 사실 심각한 도덕적 질문을 제기한다. 자유와 책임의 문제다.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없이는 책임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두 책 모두 인간이 얼마나 쉽게 휘둘리고 남의 뜻대로 조종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내가 생각하듯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과연 그렇게 쉽사리 조종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런 것 같다. 경험적으로도 그렇거니와, 그렇지 않고서야 기업들이 왜 그렇게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광고를 해댄단 말인가. 그래서 잠언에서도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성을 차지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나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원수, 궁극의 이아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가 멋도 모르고 덤비다가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말을 들었던 일도, 이아고와 연결해 생각하면 새롭게, 실감 나게 다가온다. 언제라도 그자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인식, 있어야겠다. 하지만 ‘저놈이 이아고가 아닐까?’하고 모든 사람, 모든 상황을 의심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그것이 이아고가 선택했던 길, 죽는 길이다. 오히려 X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던 Y의 특징을 떠올려보는 것이 낫다.

 

 

궁극의 선인?

궁극의 악당은 자신은 피를 묻히지 않고, 몹쓸 생각을 부추기고 적절한 멘트를 넣거나 암시를 주어 불화를 조장하고 죄를 짓게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궁극의 선인은 어떤 존재로 상정할 수 있을까? 어떤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선한 소원을 지속적으로 불어넣는 존재겠다(빌립보서 2:13).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미 그런 분이 주어져 있다. 그분이 주시는 소욕에 따라 살아가는 선인의 구체화된 화신은? 그런 소원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혹은 그렇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존재겠다.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온갖 수준의 이아고와의 싸움도 승산 없는 싸움은 아니겠구나, 해볼 만하겠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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