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생각해볼 책은『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달아난 허클베리 핀과 보호자였던 왓슨 아주머니 집에서 탈출한 노예 짐이 함께 자유의 여행을 떠나고, 미시시피강 변을 따라가는 그들의 여정과 더불어 당시(남북전쟁 직전) 미국 남부 사회의 모습과 여러 문제적 상황들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영화 식으로 말하자면 로드 무비 스타일의 버디 무비라고 할 수 있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답답하고 어두운 시절이다. 하지만 책을 가까이하기 좋은 시절이기도 하다. 이번에 생각해 볼 책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사이드킥1)으로 등장했던 허클베리 핀(이하 ‘헉’ 또는 ‘핀’)이 주연으로 나선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달아난 헉과 헉의 보호자였던 왓슨 아주머니 집에서 탈출한 노예 짐이 함께 자유의 여행을 떠나고, 미시시피강 변을 따라가는 그들의 여정과 더불어 당시(남북전쟁 직전) 미국 남부 사회의 모습과 여러 문제적 상황들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영화 식으로 말하자면 로드 무비2) 스타일의 버디 무비3)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즐겨봤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가 떠올랐다.)

 

(좌)1977년에 TBC에서 방영된 ‘허클베리핀의 모험’, (우)1981년에 MBC에서 방영된 ‘은하철도999’.

 

이 책의 묘미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 대는 등장인물들의 능청스러움이다. 그런데 그것이 밉지가 않고 귀엽게 다가온다. 이 부분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려면 책을 직접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독자들과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이것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할 것”이라는 저자의 경고를 무시한 처사임을 미리 밝혀 둔다.) 하나는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헉이 겪는 도덕적 갈등이고, 또 하나는 막판에 등장하는 톰 소여의 역할이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허클베리 핀 모험의 클라이맥스. 헉은 짐과 오랜 세월 함께 뗏목 생활을 하며 온갖 모험과 고생을 함께한 특별한 사이가 된다. 그런데 짐이 사로잡히면서 헉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헉은 진작부터 왓슨 아주머니의 소유물인 짐이 도망가는 것을 도왔던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결정적인 대목에서 그러한 마음의 부담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헉은 왓슨 아주머니 재산의 탈주를 돕는 데 따른 양심의 가책과 동시에 자기에게 아무 해도 끼친 일이 없는 불쌍한 노파로부터 검둥이를 훔쳐 내고 있을 동안 자기를 늘 지켜보고 계셨을 하나님을 인식하고 두려움에 떤다. 자기는 본디 못되게 자란 아이라 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항변해 보지만, 주일학교라는 게 있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검둥이를 도와준 일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거라는 걸 충분히 배울 수 있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헉은 기도를 올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기도가 안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내 마음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포기하는 척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가장 큰 죄에 매달려 있는 거지요. 입으로는 옳은 일, 깨끗한 일을 하겠다고, 그 검둥이 주인에게 검둥이 있는 곳을 편지로 알려주겠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시지요. 거짓 기도를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헉은 왓슨 아주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쓴다. 그리고 편지를 쓰자 “난생처음으로 죄가 깨끗이 씻긴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하마터면 지옥에 떨어질 뻔했다고 안도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동안 온갖 모험을 함께 하며 짐이 보여준 진실한 우정과 배려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짐이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고 했던 말도 떠오른다. 바로 그 순간, 헉의 눈에 자기가 써놓은 편지가 들어온다.

아슬아슬한 고비였습니다. 나는 종이를 집어 손에 쥐었습니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숨을 죽이고는 잠시 생각한 끝에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뭐라고 했을까?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압권이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그런 다음 헉은 편지를 북북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한다. 그리고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자기는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라고 결정한다. 그리고 맨 첫 번째 나쁜 일로 짐을 다시 한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 내자,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자고 다짐한다.

이 부분이 주는 재미와 신선함, 짜릿함은 도덕과 법, 종교, 언어와 그것이 지향하고 가리켜야 할 실체가 완전히 어긋나는 상황을 보여 주는 데 있다. 헉의 머릿속에 있던 이분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헉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남의 소유물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이다. 이 도덕률이 그가 배우다 만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의 감시자로서의 하나님 의식으로 뒷받침된다. 여기서 헉은 짐이 흑인이라 해도 사람인데, 과연 사람이 소유물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 일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 대목의 매력은 어린 소년 헉이 그런 이론적 분석 능력과 지식이 없이 자신의 수준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다 용감한 선택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처벌과 지옥행이라는 엄청난 무기를 흔들어 대는 법과 종교의 패키지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할 능력이 헉에게는 없다. 그로서는 패키지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째로 거부하고, 짐을 돕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감내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헉은 선택을 내린다. 진실한 친구 짐의 자유를 돕는 일을 ‘나쁜 일’이라고 부를 테면 그렇게 부르라고 하라. 그런 선택으로 이르게 되는 곳이 ‘지옥’이라면 그런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기독교의 회개와 양심의 가책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로 읽을 수 있다. 이 책 곳곳에 이런 대목이 잔뜩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를 정당화하고, 불의한 법과 부당한 권리를 종교의 이름으로 옹호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나님을 그런 질서를 지켜 주는 감시자 정도로 이용하는 것이 과거의 일일 뿐이겠는가. 헉의 고뇌와 결단을 기독교적 도덕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으로 여기고 분개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했고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경계할 기회로 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헉과 같은 시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톰 소여의 허튼짓에 관하여

책 초반에 등장하고 안 나오던 톰 소여가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의 긴장이 약해지고 몰입도가 떨어진다. 여기서 톰 소여는 말하자면 ‘고구마 캐릭터’4)이다. 헛간에 잡혀 있어서 쉽사리 꺼낼 수 있는 짐을 그대로 둔 채, 그럴싸한 모험이 되게 하겠다며 온갖 쇼를 부리며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더욱이, 2달 전 왓슨 아주머니가 짐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소식을 전할 임무를 맡고 그곳에 온 톰이 그 소식은 안 전하고 이미 자유인이 된 짐을 자유롭게 해주는 온갖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고 짐에게 온갖 고생을 다 시키고 위험에 빠뜨렸다가 결국 자기도 다리에 총에 맞아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놓인다.

한마디로 뻘짓. 맞다. 복장 터지는 애먼 짓이다. 하지만 그 허튼짓은 짐이 더없이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검둥이 도망 노예 정도가 아니라, 고상해 보이는 그 어떤 백인보다도 멋진, 누구 못지않게 존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짐과 헉의 모험도 상당 부분 허튼짓이 된다. 이미 자유인이 된 짐이 그런지도 모르고 도망을 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그건 다 지나고,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하는 한가한 소리일 뿐이다. 짐과 헉이 함께 겪어낸 모험은 헉의 용기, 짐의 신의, 두 사람의 우정이 펼쳐지는 무대였다. 그 모두가 벼려지고 입증되는 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핀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성숙할 수 있었고, 짐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존엄하고 용감하고 너그러운 참 인간임을 스스로 입증해 낸다.

인생도 그런 거 아닐까. 내가 어떤 판에 서 있는지, 미래에 어떤 일이 드러나게 될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양심의 소리(로 표현되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지 않고, 존엄을 지키고, 허락된 주위 사람에게 신실하고, 나머지 일은 저자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다 보면 내가 하는 뻘짓 중에도 허튼짓에 그치지 않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을까. 코로나 사태로 많은 것들이 어그러지고 준비했던 많은 것도 뻘짓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지금, 더더욱 한번 되새겨볼 만한 교훈이지 싶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기독교에 호의적인 책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주 유쾌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이는 여기 담긴 풍자와 재치를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책이 나왔을 당시의 미국에서야 상식이었겠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좀 다르니까 말이다. 오히려 진지한 기독교인일수록 더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웃어넘길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좀 상대화하고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확신은 인간적 한계와 끊임없이 공존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1) 조수, 조연

2) 주인공의 여행 과정에서 생긴 일을 다룬 영화.

3) 친구 사이의 우정을 다룬 영화.

4) 답답한 짓을 하는 사람. 반대말은 사이다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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