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먹지도 만지지도 않는 부정한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수 동편 이방인 지역에서 방목하던 돼지는 아마도 데카폴리스의 이방 신전에 바쳐졌다가 식용으로 팔리는 돼지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왜 예수님은 귀신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시지 않고,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죄 없는 돼지의 복지와 동물권을 무시하신 것일까? 왜 수백 마리의 돼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물에 빠뜨리시고 죽게 내버려 두셨을까?(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호수 맞은편 이방인 지역으로 건너가신 예수님은 언덕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났다. 그 귀신은 군대(레기온)라는 이름을 지녔는데, 로마군 레기온이 6천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므로 아마도 수천의 귀신이 한 사람을 점령하고 그를 오래 짓밟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이 귀신들에게 그 남자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마시고, 마침 근처 산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귀신들의 요청대로 허락해 주셨고,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다. 돼지들은 벼랑으로 치달았고 호수에 빠져서 몰사했다(누가복음 8: 26-33).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먹지도 만지지도 않는 부정한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수 동편 이방인 지역에서 방목하던 돼지는 아마도 데카폴리스(갈릴리 호수 동편의 열 개의 헬라 도시)의 이방 신전에 바쳐졌다가 식용으로 팔리는 돼지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왜 예수님은 귀신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시지 않고,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죄 없는 돼지의 복지와 동물권을 무시하신 것일까? 왜 수백 마리의 돼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물에 빠뜨리시고 죽게 내버려 두셨을까? 물론 이 질문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질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돼지가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임을 안다. 그리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동물들의 복지와 권리 문제가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동물 복지나 동물의 권리를 존중하셨을까? 아마도 그러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토라(모세오경, 율법)를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이다(마 5:17-20). 창세기 1:22에 따르면, 동물은 인류보다 먼저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또한 토라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동물들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은 그들을 마음대로 잡아먹고 잔인하게 다루는 것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 그들의 복지를 돌보게 하려는 의도였다(창 1:26). 하나님은 모든 동물들을 먹이시고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창 1:30; 마 6:26).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은 사람이 동물들을 먹는 것을 허용하셨지만, 동물들의 생명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창 9:4-5).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을 주시며 그 날에는 가축도 일하게 하지 말도록 명령하셨다(출 20:20). 동물들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계획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회복된 창조 안에서도 그들이 평화롭게 뛰어놀 자리가 있다(사 11:6-9). 동물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보다 먼저 알아보고 그분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켰고(막 1:13),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롬 8:19-22).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목적 중에는 사람의 동료 피조물인 동물들의 복지와 구원도 포함되어 있다.
동물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복지를 생각하셨던 예수님이, 왜 돼지에게 귀신을 보내어 돼지들이 물에 빠져 죽게 하셨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나온 아래의 몇 가지 생각은 정답은 아니고, 상상력을 동원한 개인적인 성경 묵상이다.
첫째로, 예수님이 무저갱에 던지지 말아 달라는 귀신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그들을 돼지보다 더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기로 정하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신의 심판을 위해 정하신 때가 있으므로(계 20:1-3; 마 8:29),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금 당장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둘째로, 남자에게서 나온 수천의 귀신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아마도 자신들이 머물 곳을 찾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벧전 5:8) 사람들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예수님을 피해 달아나고자 했으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더 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막으셨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아마도 복음서 이야기 내용에서 생략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셋째로, 이 이야기에서 돼지는 단지 희생물이 아니라 영웅이었지도 모른다. 작은 단서이긴 하지만 복음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마 12:43; 눅 11:24). 오늘날의 과학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귀신은 물이 있는 곳을 싫어한다는 것이 당시 유대 사람들의 믿음이었던 것 같다. 그들처럼 우리도, 그곳 귀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물이라고 믿어 보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이 장면을 다시 보면, 놀랍게도 돼지 떼는 자기들에게 들어오려고 하는 귀신과 용감히 맞서 싸우며 그들을 안고 물로 뛰어들었음을 알게 된다. 돼지 떼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서 벼랑 위로 몸을 던졌고, 귀신들과 함께 물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그들의 용감한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수천 귀신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 복음서에 기록될 만큼 놀라운 행적을 남긴 이 돼지 떼는, 비록 우상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을 타고났었으나, 예수님의 군대가 되어 영적 전쟁을 치렀고, 자신을 먹이고 돌보아 준 마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였다!
복음서의 문맥으로 돌아가 보자. 이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왜 건너가셨을까? 단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다. ‘수십 년 간 수천의 귀신들에게 점령당하여 고통받는 한 남자가 있으니 가서 구출해 주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가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이 남자는 오래 옷을 입지 않고 무덤들 속에서 살아와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오래 씻지 않은 더러운 몸, 다듬거나 가리지 못한 털이 외모까지도 그를 괴수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날 예수님을 만나 그 남자는 구출받았고,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증거하는 데카폴리스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눅 8:39; 막 5:20). 그는 이방인 중 처음으로 탄생한 예수의 복음 전파자였다. 이러한 한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 새로운 인생의 배후에는 수천 마리의 사랑스럽고 영리했던 돼지들의 희생이 있었다(막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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