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은 기본소득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의의와 한계를 ‘구제’와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자. 잠언 11장 24절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성숙한 믿음의 징표로 이웃을 위한 충분한 물질적 도움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부터 국가는 경제적 약자에게 복지와 사회 안전망을 제공할 책무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발전과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는 확장된 해석이 가능하다.(본문 중)

홍종호(서울대학교 교수, 경제학)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정 액수의 현금”으로 간략히 정의할 수 있다. 개념은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왜 필요한지, 효과는 무엇인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갈수록 복잡해진다. 일부 지역에서의 제한적인 적용이나 정책 실험을 제외하고 세계 어디에서도 현실화되지 않은 제도라 실효성과 부작용에 대한 검증이 쉽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기본소득을 기독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기본소득을 보수나 진보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평가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의 궁극적 기준이 되는 성경은 이념서나 정책서가 아니기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기본소득 논의의 출발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기본소득 주창의 역사는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현시점에도 백가쟁명식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기에 먼저 내용과 범위를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제도의 기본 구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대상은 개인이다. 정부가 특정 국가 혹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한다. 따라서 생활이 어려운 가구 단위로 급여를 지급하는 현행 기초 생활 보장 제도와 구별된다.

둘째, 방식은 무조건적이다. 생활이 어렵다든지, 실업 상태에 있다든지, 아동/청년/어르신에 속한다든지 하는 조건과 무관하다. 당연히 복지 수혜 대상 여부를 확인하는 자산 조사 혹은 적격성 검증은 없다.

셋째, 지원 금액은 동일하다. 가난하다고 더 주고, 부자라고 덜 주거나 안 주지 않는다.

넷째, 기간은 항구적이다. 정부가 지난 2차 추경을 통해 마련한 12조 2천억 원 규모의 전 국민 재난 지원금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현금 지급이었음을 상기하면 차이가 명확해진다.

역사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기본소득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설파해 왔다. 최근에는 보편 복지에 대한 열망과 구조적인 경제 불평등 해결의 대안으로 진보 진영이 기본소득 정책을 좀 더 전면에 내세우는 추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자유와 인간적 삶을 누리기 위해 모든 시민은 마땅히 적절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복지 전달 체계를 단순화하고 기존 복지 제도를 구조조정함으로써 행정 비용을 줄이고 복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2) 실업 급여가 개인으로 하여금 재취업할 의욕을 감퇴시키는 반면, 기본소득은 노동과 무관하게 지급함으로써 실업 급여 방식에 비해 근로 의욕을 증가시킬 수 있다.

3) 기본소득 제도를 통해 저소득층과 서민은 물론, 보다 많은 국민의 복지 수준을 향상함으로써 복지의 포용성을 높이고, 이들의 자긍심과 행복감을 증진할 수 있다.

4) 자동화와 AI로 인해 노동 수요가 줄어들고 있어 기존 고용 구조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생계유지는 물론, 자기실현과 인간다움을 누릴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5)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에게 구매력을 확보해 줌으로써 국가 차원에서 안정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경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반면 기본소득 정책에 대한 비판도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다음과 같이 핵심을 요약할 수 있다.

1) 복지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제공함이 마땅한데, 생계유지를 위해 굳이 기본소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중산층과 부자에게까지 혜택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 기본소득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려는 의욕을 약화시켜 경제 전체의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떨어뜨리고, 결국 세수 감소와 복지 축소라는 악순환을 야기할 것이다.

3) 이미 존재하고 있는 복지 제도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은 기존 수혜자들로부터 심각한 저항과 갈등을 야기할 것이다.

4) 추가적인 증세를 위한 세원 발굴이나 세율 인상 역시 강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결국 재원 확보를 위한 현실성 있는 대안이 없다.

ⓒunsplash.

 

기독인은 기본소득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의의와 한계를 ‘구제’와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자. 잠언 11장 24절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성숙한 믿음의 징표로 이웃을 위한 충분한 물질적 도움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부터 국가는 경제적 약자에게 복지와 사회 안전망을 제공할 책무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발전과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는 확장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유능하고 신뢰성 있는 정부를 전제로 한다. 기본소득은 구성원들로부터 확보한 재원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복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저소득층에 대한 낙인 효과를 제거하고 국민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좋은 취지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적 구제의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어느 정치인은 모든 국민에게 연 20만 원 수준의 기본소득을 출발점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총 10조 원이면 가능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미 개인당 한번에 25만 원의 재난지원금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국민에게 월 1만 6천 7백 원의 기본소득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최저 생계비를 감안하여 월 50만 원(4인 가족 기준 월 200만 원)을 제공한다면 연간 300조 원이 필요하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국세 수입이 약 293조 원이었으니 지금 수준보다 세금을 두 배 이상 거둬야 실행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말은 쉬우나 실행하기는 어렵다. 기본소득이 책임성 있는 복지로 자리 잡으려면 재원 확보에 대한 국민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

신구약을 통틀어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강조한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일하셨고, 인간에게도 노동을 통해 창조 사역에 동참할 것을 명령하는 장면이(창 2:15)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타락으로 인해 노동에 고통이 덧붙여진 것은 사실이나(창 3:17), 동시에 성경은 노동에 수반되는 보상의 의의와 보람을 노래하고(시 126:6), 정당한 노동 없는 대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살후 3:10).

기독인은 하나님이 일과 직업을 각자에게 소명으로 허락하신다고 믿는다. 나아가 노동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마 6:33) 것임을 약속받았다. 이 말씀에 따르면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복지다. 사도 바울은 목숨을 걸고 선교에 헌신하면서도 교회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비량(自費糧)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unsplash.

 

19세기 초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으로 촉발된 기계화와 자동화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 더욱 강화된 듯 보인다. 로봇과 AI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란 비관론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고용 없는 성장의 고착화 측면도 인식해야 하지만, 달라진 산업 생태계에서 새로운 일자리 생성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도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에서 일하는 기독인은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섬김의 실천이라는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한다. 노동 유무와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기본소득을 모두의 권리로서 제도화하는 것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 부합하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정책’의 대상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아무 여과 없이 옮겨가는 오늘의 현실을 우려한다. 더 풍족하고 더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정치인의 달콤하지만 무책임할 수 있는 언사의 진위를 분별해야 한다. 출애굽 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반복적으로 드러낸 탐심의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논쟁을 보며 기독인은 ‘선의에 매몰된 낭만성’과 ‘책임성을 상실한 인기영합주의’를 경계하고 선별하는 지혜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소득 논의를 둘러싼 이러한 ‘거품’이 빠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실효성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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