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한 이런 과학사의 논쟁들을 보면, 그 속에는 과학뿐 아니라 종교나 철학 혹은 미신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형성된 각 시대의 과학적 상식은 그 상식을 뒤집는 실험적 증거가 제시되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100년이나 200년을 지나 되돌아볼 때에야 오류가 섞여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현재 주류 이론이 된 생물속생설에서도 생명이 계속 이어지는 연속선상에서 종(種)이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세부 사항에서는 과학과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첨예한 대립이 있다.(본문 중)

성영은(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전 세계에 팬데믹 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쯤 되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불과 몇 개월 만에 전 세계로 퍼진 이 바이러스의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생명 활동을 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이 과연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된다. 현 시점에서 이 바이러스가 어떤 사람의 몸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옮겨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즉, 현대인은 생물은 결코 무생물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생물로부터 생긴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이론을 ‘생물속생설’(生物續生說, biogenesis)이라 하는데 생명은 오로지 생명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믿게 된 것은 불과 15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 사람들에게는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이 상식이었다. 근대 이후 등장한 과학은 이 자연발생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생명이 과연 무생물에서 시작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또 그 시기에 자연발생설이냐 생물속성설이냐의 문제 외에 생명의 시작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이 제기되었다. ‘전성설’(前成說)과 ‘후성설’(後成說) 논쟁인데, 생명이 생명체의 완성된 상태로 시작하느냐 아니면 미완성된 상태로 시작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전성설은 생명체가 발생 이전에 아주 작은 크기일지라도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다가 발생과 함께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이 반대의 입장인 후성설은 생명의 발생 시에는 미완성된 배(胚: 배아)의 상태로 있다가 생명 활동의 원인인 생명력과 같은 어떤 힘이 관여하여 기관이나 조직이 형성되어 완전한 생명체로 되어 간다는 것이다. 생물속성설과 후성설을 지지하는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논쟁의 주장에 비과학적인 요소가 많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각기 자기들의 주장만이 옳고 가장 과학적이라 생각하였다.

생명의 기원을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원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물질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고대부터 있었는데, 생물이 무생물에서 생길 수 있다는 온갖 자연발생설을 집대성한 이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였다. 그는 『동물의 발생』에서 곤충이나 생쥐와 같은 동물들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지 설명한다. 그의 주장은 다른 서적들과 함께 아랍으로 건너갔다가 14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된 후 계속 주류의 이론으로 이어져 왔고, 사람들도 겨울에 안 보이던 개구리가 봄이 되면 어디에선가 나타나는가 하면 건초 더미에서 갑자기 쥐가 나타나고, 쓰레기나 하수구에서 구더기나 파리가 생기는 등의 현상을 당연히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 이론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이 이탈리아 의사인 레디(Francesco Redi)였다. 1668년에 그는 단지에 고기를 넣고, 어떤 것은 밀봉하고, 어떤 것은 거즈를 덮고, 어떤 것은 뚜껑을 열어 두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랬더니 뚜껑을 열어둔 단지에서는 구더기가 많이 생기고, 거즈로 덮은 단지에서는 조금 생기고, 밀봉한 단지에서는 생기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그 실험을 근거로 그는 “하나님에 의해 최초의 식물과 동물이 출현한 뒤에는 그 어떤 생물도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자연발생설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이론이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던 차에 1674년 네덜란드의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가 현미경으로 극미동물이라 부른 미생물을 처음 관찰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이 현미경을 통해 본 엄청난 미생물들은 자연발생설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며 오히려 자연발생설을 더욱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을 통해 큰 생물은 자연 발생을 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미생물은 자연 발생을 한다는 자연발생설이 이 이후 150년 이상 더 이어진다. 그런데, 1862년 이 이론을 반박할 만한 결정적 실험이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S자 관을 가진 유리 용기(백조목 플라스크)에 고기즙을 넣고 끓여 응축된 수증기가 S자 유리관에 고이게 한 후 며칠을 두었더니 어떤 미생물도 생기지 않았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즉 공기는 통하되 공기 중 미생물은 유입되지 않게 끓인 물로 차단한 실험으로부터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이 틀렸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생긴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 장치(1859)

 

생명이 생명체의 완성된 형태에서 시작하느냐(전성설) 아니면 미완성된 형태에서부터 시작하느냐(후성설)의 논쟁에서, 17, 8세기까지는 전성설이 지배적인 이론이었다. 일례로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발견한 레벤후크는 전성설을 지지했는데, 그가 현미경으로 동물과 인간의 정자를 관찰하자 전성설 지지자들은 정자 속에 작은 크기의 태아가 완전한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식물 역시 씨 속에 이미 작은 식물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전성설은 하나님이 천지창조 때 무수히 많은 완성된 생명체를 이미 창조해 놓았다는 당시의 성경 해석과 섞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전성설을 설명하는 정자 속 완전한 미세 인간(Nicolaas Hartsoeker, 1695)

 

이 전성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1747년 영국의 니덤(John T. Needham)은 끓인 양고기 국물을 유리병에 넣고 입구를 코르크로 밀봉하였는데, 며칠 후 병 속에 온갖 미생물이 들끓는 것을 관찰했다. 이로부터 니덤은 미생물이 무수히 자연 발생을 하는 것으로 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온갖 생명체들을 무수히 미리 만들어 놓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후성설을 주장한다. 니덤의 이 실험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유물론자와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무신론자들은 이 실험 결과를 근거로 물질이 생명체로 변할 수 있다면 굳이 신적인 창조자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로 나아갔다.

 

그러나 1765년, 이탈리아의 전성설 주장자인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는 니덤이 실험에서 사용한 코르크 마개는 미생물의 출입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면서 유리 자체로 밀봉한 실험을 하여 미생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니덤의 후성설 주장을 반박했다. 이에 대해 니덤은 다시 스팔란차니가 유리로 밀봉함으로써 용기 내 공기만 차단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생명력(생명 원자라 부름)까지 파괴해 버렸다고 하며 자신의 후성설을 재차 주장한다. 이런 식의 논쟁은 19세기 후반 현미경이 발달하여 정자와 같은 생식 세포가 완전한 작은 생명체가 아닌 세포 한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막을 내린다.

 

현대 과학은, 생명체는 부모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되는 끝없는 생명의 연속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물속생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세포에서 생명이 발생하여 완전한 생명체가 되어 간다는 후성설을 지지한다. 인류 역사상 수천 년간 명성을 누렸던 생명의 자연발생설은 이제, 이 세상에 출현한 첫 번째 생명체는 자연 발생으로 생겼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에서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사라진 전성설도 생명의 시작 시점이 정자와 난자가 수정할 때부터인가, 아니면 조직이 생기기 시작하는 수정 후 14일 혹은 완전한 성체의 형태를 갖추는 3개월부터인가의 낙태 논쟁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생명에 대한 이런 과학사의 논쟁들을 보면, 그 속에는 과학뿐 아니라 종교나 철학 혹은 미신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형성된 각 시대의 과학적 상식은 그 상식을 뒤집는 실험적 증거가 제시되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100년이나 200년을 지나 되돌아볼 때에야 오류가 섞여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현재 주류 이론이 된 생물속생설에서도 생명이 계속 이어지는 연속선상에서 종(種)이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세부 사항에서는 과학과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첨예한 대립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는 생명속생설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아주 오랜 기간 자연발생설을 상식으로 받아들였다. 과학사에서 있었던 이런 무수한 전례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과학적 탐구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제의 상식이 오늘날에 와선 말도 안 되는 오류와 넌센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는 주장에 대해서조차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나와 다른 이론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인간의 지혜가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넓으심이 생명의 영역에서도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다양한 이론들에 특히 나와 다른 이론들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연발생설, 생명속생설, 전성설, 후성설 등을 설명한 이 글의 내용이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고 용어가 생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과학사의 치열한 논쟁을 살피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신앙과 과학이 충돌할 경우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 싶어서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과학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논쟁을 중심으로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나가야 할 문제들을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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