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형 교회에서 사라진 이들은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는 X-세대와 Y-세대이다. 교회에 30대와 40대가 없다는 말은 이들의 자녀인 청소년과 아이들도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교회의 미래가 없다. 50대 이상 어른들만 자리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한국교회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모두가 걱정은 한다. 다음 세대가 없다고 한탄을 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마음이 있는지, 이 위기에 대해 진정한 두려움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원 교수, 목회사회학)
3년 전, 중형 교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대략 교인 수 500~1,000명 사이의 교회를 중형 교회라고 보는데, 이런 교회들은 대부분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 교회들을 조사한 것은 이들의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들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이제 중형 교회들마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살펴보니 그래도 안정적일 줄 알았던 교회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겉으로 볼 때는 규모도 있고 역사도 있고, 안정된 평신도 리더십이 형성되어 있는 교회들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어려울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동안 이런 교회들이 리더십 문제와 노령화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고,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 조사를 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교회별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몇몇 교회에서 40대 초반 이하로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40대 중반까지는 있는데, 40대 초반부터는 교회 출석률도 떨어지고, 봉사하는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이렇게 꼭 집어서 연령대를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임 목사들의 이야기이니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40대 초반이라면 사회에서 밀레니얼 세대라고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2000년대로 넘어올 때 청소년이었거나 청년들이었다. 그 당시 X-세대라고 불렸던 이들이다. 사회에서는 민주화가 자리를 잡은 이후에 학교 교육을 받았고, 소위 이해찬 세대, 즉 이해찬 씨가 교육부 장관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주고 공부가 아니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꿈을 준 세대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문화 충격을 겪었고, 학교를 벗어나라는 ‘교실 이데아’에 열광했던 이들이다. 인터넷이 널리 이용되면서 사이버 민주주의를 경험했고,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 5년마다 한 번씩 정권 교체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스마트폰이 나타난 이후에는 급속한 사회변화를 직접 겪은 이들이다.
X-세대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들의 특성을 알 수 없어서였다. 무어라 특징지을 수 없으니까 알 수 없다는 의미로 X-세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이후에는 더 알 수 없는 세대가 나타났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X 다음에 나오는 알파벳을 붙여 Y-세대라고 했다. 이들은 80년대와 90년대에 출생한 이들이다. Y-세대까지는 보통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한다. 그리고 2천 년대에 들어와서 출생한 이들은 더욱 알 수가 없기에 역시 이름 붙이기를 포기하고 Z-세대라고 했다.
지금 중형 교회에서 사라진 이들은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는 X-세대와 Y-세대이다. 교회에 30대와 40대가 없다는 말은 이들의 자녀인 청소년과 아이들도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교회의 미래가 없다. 50대 이상 어른들만 자리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한국교회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모두가 걱정은 한다. 다음 세대가 없다고 한탄을 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마음이 있는지, 이 위기에 대해 진정한 두려움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주변에서 만나는 40대나 30대 성도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변하지 않는 교회, 아니 예전의 순수함마저 잃어 버린 교회에 대해 너무 큰 실망을 하고 있었다. 원로 목사의 은퇴 과정에서 시험 드는 일도 많았다. 어려서부터 신앙의 모범으로 생각하며 바라보았던 목사님이 상상하지도 못한 액수를 받고 은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목회 리더십이 바뀌면서 겪게 되는 교회의 분란도 큰 시험이다.
교회의 노령화도 문제다. 30대, 40대면 사회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할 때이다. 기업에서는 40대 중반에 이사로 진급이 안 되면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아직 마이크도 잡을 수 없는 어린아이 취급을 당한다. 그것도 어떻게 참고 있는데, 마이크를 잡은 어르신들이 정치 이야기로 염장을 지른다. 기도 시간에 정치 선동이 이루어지고, 설교마저 복음을 잃은 지 오래다. 거기에 동성애 이야기가 나오고 ‘빨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면 아무리 예배 시간이라도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러니 교회에 40대 이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 내에 이들의 자리가 없다. 어떻게든 교회에서 버텨 보려고 하지만, 교회 자체의 문제와 이념 문제까지 겹쳐 너무나 괴롭다.
사회에서도 세대 간의 갈등은 심각하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다. 아니 이미 터져버린 폭탄이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는 그 갈등이 더 증폭되어 있다. 교회라서 폭력은 없을지 몰라도 그 긴장감은 더하다. 대한민국에서 60세 이상의 세대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 아니, 아직 다양한 세대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밖에 없을 것이고, 그 긴장을 아직 내재하고 있는 곳 역시 교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폭탄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부끄러워한다. 특히, 코로나 상황에서 나오는 교회발 집단 감염 뉴스나, 교회들의 합리적이지 않은 대처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다. 사회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모욕적인 발언들을 고스란히 받아 삼켜야 하는 이들은, 방역을 정치로 이해하고 예배를 정치의 수단으로 보는 어르신들을 향해 분노를 넘어 냉담을 보인다.
기성세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나로서는 이들이 신기하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교회에 발을 붙이고,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신기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분노로 꺾이고, 실망으로 넘어진다. 어려서부터 삶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교회에 출석을 끊고, 교인이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졌던 교회의 추억을 남겨주고 싶지만, 감당이 안 되어 떠나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들을 붙잡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남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들의 분노와 실망을 알기 때문이다.
한때 SNS에 널리 퍼졌던 미국 타임스 스퀘어 교회 카터 컬론 목사의 “생명을 위해 도망가십시오!”(RUN for your Life)라는 설교가 있다. 5분여 길이로 편집된 영상에서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시종 ‘RUN’을 외친다. 생명을 위해서 잘못된 복음으로부터 도망가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여, 도망치세요.
성경이 없는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에서 벗어나십시오.
십자가가 없는 신학에서, 영혼을 반성시키는 말씀이 없는 데서, 죄로부터 회개함이 없는 데서, 예수님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는 데서 도망치세요.
정치꾼들로 가득 찬 설교 강단으로부터 도망치세요.
그들은 하나님의 강단을 개인적인 정치 성향을 위해 사용합니다. 도망치세요.
인종과 문화차별을 외치는 자들로부터 도망치세요.
달리세요. 달리세요. 벗어나십시오.
전원을 내리고 그것들로부터 도망치세요.
나는 오늘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동일하게 외치고 싶다. 꺾이고 무너지지 말고 도망치라고. 사람에게 실망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라고. 공동체에 시험 들어서 신앙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꺾이지 말고, 무너지지 말고, 조금 얄밉더라도 교회를 떠나 신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찾으라고. 너의 믿는 바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라고. 그것도 안 되면 주일 11시에 매이는 교회 말고 너의 믿음에 동의해 주고 위로를 주는 교회를 만나라고. 그게 차라리 꺾이고 무너지는 것보다 낫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최근 온라인 예배가 하나의 선택으로 나타나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시험 들 일이 없어서 좋다는 거다. 장로님들이 대표기도 하는데 정치 이야기가 들어오고, 듣기에 거북한 이야기들이 쏟아져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온라인이니 기도는 넘어간단다. 설교 중에도 거북한 이야기가 나오면 넘어가던지, 다른 설교를 듣는단다. 젊다고도 할 수 없는 40대 후반의 이야기이다.
목사로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답해 줘야 하는가. 잘못했으니 회개하라, 예배는 그런 게 아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 ‘그래도 신앙을 가지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하겠다. 온라인이라도 끈을 붙잡고 있어서 고맙다고 하겠다. 그 징한 공동체를 버리지 않고 그렇게라도 이어가고 있으니 고맙다고 하겠다.
몇 년 전 미션얼 처치 현장을 경험해 보고자 미국 시애틀에 간 적이 있다. 시애틀은 미국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도시였고, 그들 말에 의하면 주일에 교회 가는 사람이 10%도 안 될 것이라고 하는 세속화된 도시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들은 다양한 사역으로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곳이 몇 곳 있다. 한 교회는 토요일 저녁에 방문했는데 예배당 뒤편에 간단한 음식으로 뷔페를 마련했다. 미국 사람들이 먹는 핫도그도 있었고, 과자나 간식거리, 그리고 다양한 음료들이 있었다. 우리도 음식을 챙겨 먹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예배로 연결이 되었다. 주위를 보니 다들 음식을 먹으며 예배를 드린다. 중간에 성찬식이 있었는데 앞에서 동네의 노는 형 같아 보이는 사람이 일어나는데 성찬 그릇을 들고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야구 모자를 썼는데 그가 성찬 위원이었다. 또 다른 교회를 방문했는데, 목사의 차림이 심상치가 않았다. 몸에 다양한 문신과 여러 곳에 피어싱이 있었다. 검은 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걸쳤는데 딱 보면 동네 깡패였다. 모이는 사람들도 보니 목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은 처음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목사가, 교회가, 예배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하는 충격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들도 경험해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감이 되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사회에서 이미 교회를 떠나버린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은 일부러 문신을 하고 피어싱을 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주일이 어려우면 토요일에 오라고 했고, 예배가 지루하면 밥을 먹으면서 참여하라고 했고, 부담스러운 옷차림은 하지 말고 오라고 했다. 그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처절함이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예배나 목회의 특별한 재주를 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간절함,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처절함을 보았다.
한국교회는 아직 배부르다.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지난날의 영화가 남아 있다. 대형 교회의 신화와 꿈이 있고, 이 사회에서 힘을 쓸 수 있다는 교만이 있다. 그런데 현장은 무섭다. 무너져 가는 현장은 지난번 폭우에 일어난 산사태 같다. 교회에 실망하여 떠나가는 지체들이 너무나 많다. 비대면 상황이라 확인을 못 해서 그렇지 상당히 많은 이들이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있다. 이제 교회가 전면적으로 변해야 한다. 교회 내의 기득권과 헤게모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너진 집에서 우두머리를 해 봐야 내려앉는 서까래를 떠받칠 뿐이다. 이번 코로나 상황이 준 충격에서부터, 그래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건물을 세워야 한다. 복음에 대한 간절함과 처절함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 믿음마저 버리는 이들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방향을 돌려 변화해야 하고,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예배와 교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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