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면 누구도 (도덕군자도!) 살인죄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죄에 관해 세상의 법망은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엄한 하늘의 법정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운가?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로는 어떨까?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과연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계명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지…(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죄목

니거 섬에 10명의 사람이 모인다. 각자 거절할 수 없는 매력적인 초대를 받고 그 자리에 왔다. 어느 순간, 열 사람 모두의 죄가 녹음된 레코드를 통해 울려 퍼진다. 그리고 한 사람씩 목숨을 잃기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폭풍이 치고 그들을 섬으로 실어 나른 배는 떠나 버린 지 오래. 한동안 아무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중 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생존자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가운데 희생자는 늘어만 간다.

영국의 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줄거리다. 내가 이 소설에서 관심이 가는 것은 그곳에 모인 열 사람이 각각 저질렀지만 법의 처벌을 모면한 살인 죄목이다. 배심원의 여론을 조작해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간 판사. 위증을 통해 무죄한 사람을 사형수로 만든 형사. 과음한 상태에서 수술을 감행해 환자를 죽게 만든 의사. 심장병을 앓던 노인에게 약을 제때 제공하지 않아서 죽게 만든 집사 부부. 자신이 맡은 어린 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수영을 가겠다는 것을 허용하여 죽도록 조장한 가정교사(그 학생만 없으면 그녀의 애인이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불장난으로 임신한 가정부를 내쫓아 절망 끝에 자살하게 만든, 청교도적 성 윤리를 내세우는 올드미스.

그들이 저지른 살인은 대부분 직업적인 전문성을 이용하거나 남용하여 저지른 살인이다. 의미 있는 모든 직업은 어떤 식으로건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거나 이익의 수단으로만 삼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기회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그 책임을 잊어버렸다간 큰일을 저지를 수 있다.

여기서 예외적인 인물이 있다. 가정부를 쫓아낸 올드미스다. 그녀는 자신의 윤리적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살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너새니얼 호손의 대표작 『주홍 글자』다. 법 없이도 살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야 아무리 많아도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매도하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는 데 있다. 옳은 말이 흉기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보면 누구도 (도덕군자도!) 살인죄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죄에 관해 세상의 법망은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엄한 하늘의 법정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운가?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로는 어떨까?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과연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계명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지….

청교도 전통을 좋게 생각하고 엄격한 장로교를 표방하는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이 책에서 그려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먼 과거, 남의 땅, 남의 나라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일 수 있다(분명히 어느 정도 그럴 것이다). 생명을 얻은 자가 누리는 가이드라인으로 ‘자유롭게’ 율법을 지키는 가운데 생명을 누리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스스로를 옥죄고, 무엇보다 남을 옥죄는 것은 얼마나 빠지기 쉬운 함정인지 모른다.

바른 선택을 내리고 올바른길을 가는 것이 오히려 덫이 될 수 있고, 사람을 독선적이고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게 만드는 유혹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다. 바른길이 분명히 있으나, 바른길에도 나름의 무서운 덫과 유혹이 있으니 교만하지 말 것이며,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은혜를 누릴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절망하지 말아야 하리라. 『주홍 글자』에는 대조와 대립, 역설과 반전이 가득하다. 이제 『주홍 글자』의 한 캐릭터에 집중하여 그 얘기를 해보자.

 

『Scarlet letter(주홍 글자)』 초판본 표지.

 

잔인한 자비

아기 때문에 불륜 사실이 발각되어 주홍 글자를 옷 앞에 새기고 다니는 치욕을 안고 살아가는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과, 자신의 죄를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괴로워하는 불륜 상대 아서 딤스데일 목사. 이 두 사람의 대비가 소설 『주홍 글자』 전체를 끌고 간다. 이번 글에서는 남자 주인공 딤스데일 목사에 초점을 맞출까 한다.

딤스데일 목사는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갖가지 방식으로 고행과 자해를 일삼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죄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심한 그 나름으로는 용기를 내어 설교 시간에도 여러 번 자신의 죄를 두루뭉술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모호한 고백은 오히려 그를 더욱 신실한 목사로 보이게 만드는 역효과만 내고 만다.

딤스데일 목사가 죄를 자백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유약하고 소심한 딤스데일 본인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존경받고 촉망받는 지위에 있는 그런 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몰락과 치욕이 기다리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터. 나 같은 보통 사람도 쉽사리 상상할 수 있는 시험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진실을 털어놓고 회개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인 헤스터 프린이라는 점이다. 프린은 세 가지 방식으로 그런 역할을 한다.

첫째, 혼자서 모든 것을 안고 가려고 한다. 불륜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자신은 죄인으로서 뭇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를 받으며 살면서도 딤스데일 목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딤스데일 목사가 내면의 괴로움에 못 이겨 시들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따름이다. 둘째, 딤스데일 목사에게 그렇게 뉘우치고 자책했으니 이제 된 거 아니냐고, 그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귀한 설교들을 했지 않느냐고, 아예 대놓고 엉터리 사죄를 선언한다. 셋째, 딤스데일이 전남편(칠링워스)의 손아귀에 걸려들어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용감한 당신’ 운운하며 프린을 바라보며 해결책을 기대할 때, 프린은 계획을 세운다. 딤스데일 목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거기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리라.

 

 

한마디로, 헤스터 프린의 사랑은 딤스데일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소심함과 비겁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거대한 장벽을 넘어 거짓의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이 드러난다. 너무나 확실한 해결책으로 보였던 프린의 영국 도피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소용없게 만들어버린 사람, 빠져나갈 길을 막아버려 딤스데일을 진실을 털어놓는 자리로 몰아간 장본인은 다름 아닌 칠링워스였던 것이다. 물론 칠링워스의 목적은 고백과 회개를 끌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딤스데일을 곁에 두고 계속 괴롭히려는 것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거짓된 삶을 이어가도록 유혹하는 연인과 그런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진실을 토로할 유일한 기회를 열어준 원수라는 역설적 구도가 탄생한다.

딤스데일은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죽어가면서 세 가지를 거론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한다. 7년간 그를 괴롭힌 양심의 가책,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고문한 칠링워스, 그리고 군중 앞에서 ‘수치스럽지만 빛나는’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이 감사의 제목이었다. 딤스데일이 여기서 고백한 자비, 즉, 괴로움과 수치와 원수 칠링워스의 집요한 정신 고문의 모습으로 찾아온 자비는 C. S. 루이스의 표현을 빌리면 ‘잔인한 자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괜찮다, 평안하다, 다 그런 거다, 그만하면 됐다, 이런 온갖 다정하고 긍정적이고 친절한 다독임,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이런 말들이 때로는 가장 위험한 독일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우리 죄 가운데 주저앉아 망하게 할 수 있으니. 그런 독 사과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들의 손으로 건네질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잔인한 자비를 알아보고 그 자비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완전할 리 없는 우리가 늘 좋은 말만 들어도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일이, 우리를 사지로 모는 것 같은 그 사람이, 혹시 그분의 잔인한 자비는 아닐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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