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과 소통 없는 노회,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노회는 장로회 제도 그 자체를 죽이는 독약이다. 장로회 교회에서 노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단위이다. 같은 노회 내 모든 성도는 형제자매이다. 성도들과 소통이 없는 노회, 성도들 간의 소통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데 어찌 같은 형제애와 자매애를 느끼겠는가? 이런 노회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권위가 없다.(본문 중)

김중락(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말씀동산교회 장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노회

매년 9월이면 장로회 교단들을 총회를 개최하고, 4월과 10월에는 노회를 한다고 분주하다. 그런데 한국 장로회 교회의 성도들에게 총회와 노회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교단이란 어떤 의미일까? 노회에 참석하는 목사와 장로라면 자신이 속한 교단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다수 성도들에게 교단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기원이나 역사도 모르고, 교단이 중시하는 신앙적 가치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교단이 어느 교단인지, 자신의 교회가 어느 노회에 속했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요컨대, 그들은 교단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다. 교단 소속 목회자들도 교단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고 있으니 성도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교단의 일은, 그리고 총회와 노회의 일은 결국 개별 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신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성도들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교단의 중요한 일을 총회와 노회가 결정하지만, 그들이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한다고 해도 성도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하지도 않으니 성도들이 관심을 가져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주보에는 총회와 노회의 일정이 실리고, 참석하는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로부터 차비까지 받아 가지만, 다녀온 사람 가운데 누구도 총회와 노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도들에게 보고하는 법이 없다. 하기야 성도들을 위한 논의는 없고, 자리다툼, 이권 다툼만 하다 왔으니 무엇을 보고하겠는가? 총회의 경우 교단 임원 선출이 핵심이고, 10월 노회는 노회 임원 자리다툼을 하고, 4월 노회는 총회 총대 자리다툼만 한다고 하면 지나친 주장인지 모르겠다. 이웃에 새로운 교회가 생겨도, 이웃 교회에 새로운 목사, 장로, 권사가 임직해도 성도들에게 알리는 법도 없다. 교회 지도자들 누구도 성도 따위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총회와 노회는 목사, 장로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노회가 1년에 한두 번은 개별 교회에 연락을 하는데 그것은 상회비 고지서나 독촉장을 보내기 위해서이다. 많은 성도들이 노회에 내는 상회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왜 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개별 교회를 위해 하는 일은 없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상회비만 받아 가려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기야 노회가 그들만의 리그인데 왜 개별 교회에 부담을 주는지 성도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노회가 개별 교회를 위해 존재하고, 노회 내 성도들을 위해서 일하고, 성도들과 소통한다면 어찌 성도들이 상회비를 아까워하겠는가? 성도들에게 총회와 노회는 이미 목사와 장로들의 노동조합 이상은 아니다.

돈만 문제일까? 성도들과 소통 없는 노회,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노회는 장로회 제도 그 자체를 죽이는 독약이다. 장로회 교회에서 노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단위이다. 같은 노회 내 모든 성도는 형제자매이다. 성도들과 소통이 없는 노회, 성도들 간의 소통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데 어찌 같은 형제애와 자매애를 느끼겠는가? 이런 노회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권위가 없다. 대다수 성도들은 총회장, 노회장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노회의 권위는 칼과 돈을 가진 권위가 아니라 존경으로부터 주어지는 권위이다. 성도들이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들이 권위는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권위가 사라진 노회의 모습은 처참하다. 오늘날 노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순종하려는 교회나 성도들은 거의 사라졌다. 이 모든 게 노회가 성도들과는 소통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총회, 노회의 권한은 성도들로부터 나온다.

장로회 교회에서 총회와 노회의 권한은 원론적으로 강대하다. 아니, 강대해야 한다. 총회의 결정은 노회와 당회가 따라야 하고, 노회의 결정은 당회가 따라야 하고, 당회의 결정은 교인들이 따라야 하는 것이 장로회 교회의 원칙이다. 우리는 이것이 성경에 제시된 것이고 하나님의 법(Jus Divinum)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노회가 가지는 권한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서양 중세에는 권력의 유래에 관해 두 가지 이론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권력이 인민의 공동체로부터 나와서 위임받은 정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다는 “상향 이론”(ascending theory)이었고, 다른 하나는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왕과 교황에게 주어져서 아래로 행사된다는 “하향 이론”(descending theory)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칼뱅파 기독교인들이 수용한 정치이론은 ‘언약통치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통치자는 즉위 시에 하나님과 인민 앞에서, 하나님과 인민을 위해 통치하겠다는 언약을 맺는다. 왕위 즉위식은 바로 언약식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민을 통해 왕에게 권력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만일 통치자가 이 언약을 위반하면, 하나님은 인민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도록 허락하셨다. 칼뱅파 사상이 전파된 곳에 저항 사상이 발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언약통치 이론’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을 통해서 나온다는 점에서 ‘하향 이론’이고, 통치자의 권력이 인민을 통해서 위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상향 이론’이기도 하다. 이것은 민주 국가나 대의제 국가에서 국민이 대표를 선출하고, 다시 그 대표들이 국민이 지켜야 할 법과 세금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장로회 정부의 개념과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가 개혁주의적인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로회 제도는 권력의 상향적 성격과 하향적 성격을 모두 가진 ‘언약통치 이론’에 기반한다. 목사와 장로들은 성도들의 선출을 받아서 치리자가 되고, 그들이 당회와 노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상향 이론에 기초한 것이고, 치리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고, 성도들을 치리하는 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하향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것은 칼뱅파 국가에서 국왕을 세우는 원리이다. 요컨대, 성도들이 장로와 목회자를 선출하고(목사의 경우는 청빙 투표가 그 과정이다), 성도들은 그들의 치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회 교회에서는 교인이 없으면 목회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목회지가 없는 이, 즉 교인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이를 목사로 안수하지 않는 장로회의 원칙이 여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하향 이론을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인들을 통해 그들에게 직분과 치리권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경우, 총회도, 노회도, 당회도 그들의 권한이 성도들로부터 나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 총회와 노회에 만연해 있고, 결국은 모든 치리회가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력의 원천이 교인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그리고 권력의 상향 이론을 무시고 하향 이론만 강조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권위주의와 성직주의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난맥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이 해결책인가? 장로회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어떤 권한도 교인들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자각이 선행 조건이다. 그리고 모든 치리회를 ‘그들만의 리그’에서 성도들을 위한 기구, 성도들과 함께하는 기구로 바꾸어야 한다. 교단 내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고, 함께 기뻐하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래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 중 한 교단[The Reformed Churches of Netherlands (liberated)]에 속한 흐로닝겐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나는 교단에서 교인들을 위해 발행한 교단 안내 소책자를 보고 놀랐다. 교단의 탄생 배경, 교단의 운영자 소개, 선교사, 그리고 교인들이 외국에서 주일을 보낼 때 추천하는 나라별 교단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성도들이 품에 넣고 다니기에 좋은 크기였다. 예배 후 인사하는 교인마다 내가 속한 한국의 고신 교단의 소식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파송한 신학 교수를 언급하였다. 모두가 교단의 중요 직책을 가진 자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성도들은 교단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스코틀랜드 스카이(Skye) 섬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고신 교단과 자매 교단인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에 속한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교회 안내 테이블에서 이 교단의 소식지를 보게 되었다. 교단 소속 성도들을 위해 발간한 교단의 월간지였다. 내용은 칼럼, 집회 소개, 교단 소식, 일별 기도 제목, 선교사들의 편지와 사역 소개(‘북한에서 온 편지’도 있었다), 신앙 도서 소개, 독자 편지 등을 담고 있었다. 함께 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눈 교인들 대다수가 교단의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역시 놀라웠고, 부러웠다. 성도들과 소통하는 교단이었던 것이다.

장로회 교회가 무엇인가? 노회가 교회의 단위인 교회이다. 같은 교회(노회)에 속한 회중들(교구 교회들)간에 아무런 교제가 없다면 우리가 어찌 같은 교회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성도들과 함께하는 교단을 만들어야 한다. 소속 교인들 모두가 한 공동체라는 의식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총회 차원의, 노회 차원의, 그리고 교회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총회는 소속 교인들을 위해 홈페이지도 단장하고, 교단 소개 소책자를 만들고, 소식지를 발간하고, 노회는 1년에 한 번이라도 공동 예배를 추진하고, 시찰회로 하여금 말 그대로 시찰을 하도록 하고, 당회는 노회 소식과 이웃 교회에 대한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모든 치리회는 치리회 회원이 아닌 교인들의 말을 들어보는 순서를 가져야 한다. 노인의 말도, 아이의 말도 들어보고 성도들이 교단과 노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자리다툼이 아니라 수많은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논의를 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총회, 노회, 당회의 소식을 교인들에게 소상히 보고해야 한다. 우리가 장로회 교회라면, 아니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이제 ‘그들만의 리그’는 끝내야 한다.

 

(그동안 여섯 번의 연재 글에 관심을 기울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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