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적 기독교의 한 예가 연말에 많이들 한다는 소위 말씀 뽑기다. 위로, 격려, 축복을 담은 성경 구절을 쪽지에 적어 넣고, 그걸 하나씩 뽑아 하나님이 새해에 특별히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성구 가운데 몇 개를 고르는 일이나 그 가운데 또 하나만 택하는 건 별문제가 안 된다. (중략) 문제는 ‘포기’다. 생각할 줄 알고 판단할 줄 아는 내 능력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내 선택을 맡긴다는 점이다. 말씀이니까, 또, 구약시대에는 제비뽑기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그 성구도 하나님이 뽑아 주시는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는 것은 그 말씀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본문 중)

권수경(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점쟁이를 찾는 계절

연말을 맞아 점집이 또 문전성시를 이룬다. 신년운세가 궁금한 사람들 때문이다. 새해에 건강은 어떨지 재물은 좀 생길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부부의 애정에다가 요즘은 자녀의 입시와 취업까지 알려주는 모양이다. 평소 무심히 살다가도 해가 바뀔 무렵에는 생각이 많아지고 조바심도 난다. 덕분에 나라 경제는 올해도 그럭저럭 돌아간다.

점보기의 기본은 사주팔자다. 사주(四住)는 출생의 연월일시(年月日時)를 가리키며 팔자(八字)는 그 각각의 두 글자를 모두 합친 것이다. 태어난 시점을 근거로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아내겠다는 것이다. 60갑자(甲子)와 주역(周易)을 섞어 쓰는데 60갑자는 갑, 을, 병, 정 등의 10간干과 자, 축, 인, 묘 등의 12지支를 결합해 운명을 따져보고 주역 원리는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만든 144가지의 괘(卦)로 인생의 생사화복을 논한다. 사주팔자를 직접 알아보게 만든 책이 조선 시대의 《토정비결》이다. 요즘은 신문이 앞다투어 점쟁이 노릇을 한다. 첨단 시대답게 사주팔자를 보는 앱도 나왔다.

원리만 보면 자연과 인간과 우주에 대해 상당한 통찰을 담고 있다. 단편적 깨달음을 넘어 치밀한 논리적 분석까지 시도한다. 특히 주역에는 바른 인생을 살도록 돕는 원리가 많다. 문제는 그런 원리를 점 치는 일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자연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그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특정인의 출생 시점에 연결해 나온 것이 60갑자요 사주팔자다. 지혜의 산물과 무지한 적용의 결합이다. 아이 젖을 먹이면서 미적분 원리를 활용하겠다는 것보다 더 엉뚱한 짓이다.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운(運)이다. 건강운, 재물운, 애정운에다 입시나 취업도 다 운이다. 영어로 럭(luck)이다.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다. 부부의 운명이 각자가 태어난 시간에 달려 있다는 궁합도 그런 세계관에 근거한다. 우주와 개인의 조화를 믿는 범신론 세계관도 섞여 있다. 그렇게 정해진 앞날을 미리 알아보겠다는 것이 점이다.

 

동양에서는 사주팔자를 통해 점을 본다면, 서양은 18세기 이후부터 점술의 도구로 흔히 ‘타로 카드(Tarot card)’를 쓴다. 이것은 현재 한국에서도 젊은층 사이에 널리 알려져있다. ⓒpixabay.

 

연약해 속는 인간

왜 미리 알려고 할까? 마음의 준비를 하겠다는 이유를 대지만 운명은 못 바꾸면서 내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건 앞뒤가 안 맞다. 진짜 이유는 안 좋은 일을 미리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굿도 하고 말뚝도 박고 사랑하는 이들을 떼놓기도 한다. 그런 주술(呪術)은 알 수 없는 세계의 신비로운 힘을 빌리려는 시도다. 초월이기에 합리적 판단과 다르고 때로는 아예 반대로 간다. 과학적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기에 미신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속임수다. 알 수 있다는 것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다 거짓이다. 만약 바꿀 수 있는 미래라면 정해져 있지도 않을 것이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미리 알 수도 없다. 그런데 미리 알 수 있다고 속이고 그걸 바꿀 수 있다고 또 속인다. 점과 굿은 다양한 사상과 행위를 담은 사기 종합 선물 세트다. 거기 속아 재산을 날렸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나온다.

사람들이 이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은 연약해 그렇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렵다. 알 수 없는 미래는 더더욱 두려운 것이기에 알려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쉽게들 넘어간다. 인간이 죄인이라 더 그렇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지으며 살고 그래서 모두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궁극적 운명에 대한 불안감이다. 알 수 있다면, 그래서 혹 바꿀 수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을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우리 시대에 초월의 영역에 대한 확신이 더 커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첨단 시대인 오늘도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는다. 특히 연말이면.

 

점 보는 그리스도인

점쟁이를 찾는 사람 가운데 반 이상이 교인이라는 말이 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혹 사실이라 해도 별로 놀랍지 않다. 예수를 성경대로 안 믿고 많이들 미신처럼 믿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한다. 숙명론과 전혀 다른데도 그 차이를 모른다.1) 그래서 점이나 주술적 행위가 낯설지 않다. 우리 신앙이 미신처럼 돼버린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많은 목사가 성경책을 펼친 채 석가를 설교하고 공자를 가르치고 주술을 연습시킨다.

주술적 기독교의 한 보기가 연말에 많이들 한다는 소위 말씀 뽑기다. 위로, 격려, 축복을 담은 성경 구절을 쪽지에 적어넣고 그걸 하나씩 뽑아 하나님이 새해에 특별히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성구 가운데 몇 개를 고르는 일이나 그 가운데 또 하나만 택하는 건 별문제가 안 된다.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까지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문제는 포기다. 생각할 줄 알고 판단할 줄 아는 내 능력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내 선택을 맡긴다는 점이다. 말씀이니까 또 구약시대에는 제비뽑기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그 성구도 하나님이 뽑아 주시는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는 것은 그 말씀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성과 의지를 활용해 말씀을 읽어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바라신다. 그 점을 무시하고 접근한다면 그런 접근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내 지성을 포기하는 행위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라면 교인들이 할 수도 있는 그런 오해를 바로잡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야 한다.

주술적 방식에 익숙한 교인이라면 점쟁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면 점쟁이의 입술을 통해 나에게 말씀을 못 주실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잊지 말자. 점을 보는 것은 참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을 의지하는 일이다. 우상을 섬기면 우상처럼 감각이 마비되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코로나에 안 걸려도 냄새도 못 맡는다 (시 115:8;135:18).

 

연초마다 신년운세를 점쳐보던 무속신앙적 풍습이 ‘신년 말씀 뽑기’라는 행사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연말에 드러나는 믿음

삶이 너무 힘들어 내 지성과 의지만으로 안 되겠다 느끼면 사람들은 내 능력 너머에 있는 우주의 힘을 의지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 성공한 것이 조용기나 조엘 오스틴류의 번영복음이다.2)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가운데 책임을 지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도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 독생자를 주신 바로 그 사랑의 하나님임을 믿고 당당하게 사는 그게 용기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숨겨진 일은 야웨께, 드러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영원히 속한다. 이 율법 모든 말씀의 순종을 위해. (신명기 29:29)

하나님은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우리가 몰라도 될 것들은 당신의 영역에 감추어 두셨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일이든 연예인 가십 기사든 하나님이 숨기신 일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고 하나님이 알려주신 그 일을 순종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새해 사주를 보는 이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을 묵상하면서 이웃 사랑의 작은 순종이라도 해 보는 것이 성경적 믿음의 가장 분명한 표현일 것이다.


1) 하나님의 예정과 이방 숙명론의 차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책 『질그릇에 담은 보배』(복 있는 사람, 2017), 118-138을 보라.

2) 번영복음에 담긴 숙명론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번영복음의 속임수』(SFC, 2019), 297-311과 367-37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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