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내가 갖고 있던 감정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깟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느끼는 게 뭐가 중요한 거지’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겨우겨우 해내며 하찮게 여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순간순간 내가 쌓아 놓은 감정을 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내가 조금 이해가 되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어둡고 텁텁한 감정도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음을, 그것이 나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였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본문 중)

김OO1)

 

어느 날 SNS를 보다가 모델이 입고 있는 선이 고운 한복에 눈이 갔다. 여린 색의 옷감이 여러 겹 겹쳐 있는 모습이 마치 바람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고, 미술관 한편에 자리 잡은 고운 예술 작품 같기도 했다. 나풀거리는 옷감들을 보고 있자니 뭔지 모를 감정들이 몽글거리는 듯했다. 그러다 이런 모양을 표현하는 “레이어드”라는 단어의 뜻이 궁금해졌다. 그 의미를 찾아보니, 패션에서는 옷을 여러 겹으로 껴입는 것, 수채화나 포토샵에서는 여러 색을 중첩해서 사용하는 것을 “레이어드”라고 한다고 했다.

내 삶도 어쩌면 과거의 내가 매 순간 쌓아 올린 여러 다른 마음이 중첩된 것이 아닐까. 어떤 순간에는 짙은 어둠이, 어떤 순간에는 태양처럼 맑은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일 테지만, 뒤돌아보니 어두웠던 그 시기에 나는 무척이나 많이 아팠었다.

살아가는 일이 막막해진다고 느낄 무렵 선생님을 만났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던 나는 그즈음 조금 다른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이어져 온 아주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인이 박이다 못해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나날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진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피곤하고 짜증이 나는 정도였다. 할 일이 많아 피곤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씻고 밥을 먹는 것까지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울고 힘들어 하는 내 모습도 발견했다. 낯설어졌다.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조금 더 열심을 내고 더 힘을 내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버거움은 늪이 되어 나를 집어 삼켰다.

점점 버거움이 나를 짓눌렀다. 눈을 뜨기가 싫었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의미가 없었다. 밥도 맛이 없었고 수저도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불과 1~2m도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에는 잠들지 못했고 별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모두가 잠든 밤은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자유의 시간이었지만, 모든 괴로움이 몰아닥치는 인고의 시간이기도 했다.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기도 했다. 이런 무기력한 마음, 우울한 마음을 떨치고 일어서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어이없게 느껴졌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라는 자이언티의 묘한 노래 가사처럼,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피곤했고, 침대에 내내 누워 있는데도 쉬고 싶었다.

과거에는 맡은 일이면 무엇이든 척척 해내던 내가, 몇 년 동안을 그 검고 축축한 기분에 삼켜져 지냈고, 영영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상담 선생님을 만났다. 심리 상담은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우울이란 단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들을 들었지만, 글쎄, 나한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우울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나는 그 일들을 무척이나 잘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집에 있던 빚을 갚았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해냈다. 하루에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아도, 좋은 곳에 여행 한 번 가지 못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다 잘 해내는 나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무기력할 시간 여유 따윈 없었다. 앞으로도 나는 어떤 역경과 고난이 와도 내 일은 척척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 착각이었다. 나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어둡고 축축한 단어들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는 안 될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내가 갖고 있던 감정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깟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느끼는 게 뭐가 중요한 거지’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겨우겨우 해내며 하찮게 여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순간순간 내가 쌓아 놓은 감정을 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내가 조금 이해가 되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어둡고 텁텁한 감정도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음을, 그것이 나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였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의 내 모습을 퍽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아끼는 마음을 갖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아주 능숙한 예술가처럼 삶을 즐기며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없는 경험과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작년에, 그리고 올해에 내 주위에서는 MBTI 같은 성격 검사, 심리 검사들이 유행했다. 이를 두고 ‘레이블링’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성격 유형을 알고 정의하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 지금의 2, 30대 중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알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 아닐까. 그냥 재미삼아 가벼운 마음으로든, 삶의 고된 시간을 이해하려는 무거운 마음으로든,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홀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혼자서 이겨낼 수도 있지만, 혼자 견뎌내기가 힘들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힘들 때 만났던 단체는 청년상담센터 위드WITH였다. 어두운 감정들 속에서 생활은 무너졌고 금전적 여유도 없었던 내게, 청년상담센터 위드WITH는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도 해주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주위를 둘러보고 도움을 찾으면 좋겠다.

 

기윤실 청년상담센터 위드WITH

심리 진단과 전문가와의 1:1 심리 상담 등의 전문적인 지원을 통해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이 마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1:1 심리 상담은 회기 당 50분, 5회기로 진행(추가 5회기 연장 가능)

*2021년 4월 중 1:1 심리 상담 신청 오픈 예정

자세히 보기: https://cemk.org/17362/


1) 상담을 받다가 심리학에 관심이 생겨 흘러 흘러 인지에 관해 공부하게 되었고 인지학습치료사가 되었다. ‘부족해도 괜찮은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매일 삶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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