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미국이 외교적 수사로 던지는 ‘인권’, ‘가치’, ‘자유’를 섣불리 성경의 단어들과 단순히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들을 움직이는 미국의 힘을 인지하되, 그 역동을 타고 넘으면서 우리가 설정하는 평화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본문 중)

윤환철(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

 

그렇지 않은데도 ‘고지 점령’에 비유되는 주제가 ‘평화’다. ‘민주’나 ‘정의’도 마찬가지. 사회의 상태나 가치는 당대와 앞뒤 세대의 협력으로 끊임없이 관리되는 것이지 항구적인 것이 아니다. 올림픽 중계에 등장해 일약 유명해진 서핑 격언, “똑같은 파도는 절대 오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평화 문제에서는 세대마다, 국면마다 맞이하는 안팎의 상황이 똑같아 보여도 맞아보면 다른 파도다.

 

지금 닥친 파도는 ‘중․미 경쟁 시대’(the Age of China-US Rivalry)로 명명될 정도로1) 중국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늘 그렇듯, 미국 내 경제 문제가 정권 향배를 흔들면 ‘국익’은 하루아침에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바뀌고, 지구촌의 경제 규범과 각국 정책이 재편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1700년대 농업 국가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재편했던 미국이 보호무역과 국가 개입주의로 성장해오다가 1950년대 자유무역 체제로 전환한 것은, 팔 물건이 있다는 경제적 계산과 더불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냉전 대결을 함께 할 동맹들의 경제 성장을 꾀한 것이라고 한다.2) 이후 미국은 ‘자유무역’을 표방하면서도 우월한 지위와 규칙 속의 예외 범주를 활용하여 시장에 개입하였고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을 철회한 적은 없었다. 트럼프 시대의 특별한 점은 2020년 1월, WTO에 개발도상국 지위 부여를 요구하며 “WTO를 탈퇴하겠다”라고 압박한 것에서(밥 우드워드) 드러나듯이, 예외나 재량을 벗어나 스스로 만든 국제 무역 질서 자체를 부정한 것인데, 이 역시 WTO가 중국의 성장을 도왔다는 적대감이 정책화한 것이다. 중국 경제의 성장은 미국 제조업 종사자들의 불행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포퓰리스트인 트럼프는 이를 활용해서 정권을 창출했다. 그리고 그의 낙선 이후에도 미국은 한동안 ‘트럼피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라이벌로 설정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주변국들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안보와 가치 문제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올해 7월, <포린어페어>에 주한미군 사령관(2016-2018, 대장)을 지낸 빈센트 브룩스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2016-2017, 대장)이었던 임호영의 공동 기고로 “북한과의 그랜드 바겐: 평양의 경제적 곤경이 평화의 기회를 제공한다”라는 글이 실렸다.3) 이 글에서 기고자들은 북한의 경제 우선 정책 지지, 북한의 무력시위 수위 조절에 대한 긍정적 평가, 한국전쟁 종전 선언 지지 등의 의견을 표명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과 경제 교류를 촉구하며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와 평화 협정 체결을 주문했다. 무력을 담당해 온 군인들이지만, ‘평화’를 논하는 데서는 고급 장교의 품격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트럼프로부터 바이든 정부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입장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reimagined relationship with North Korea)를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재설정하자는 것이며 그것이 평화라는 주장이다.

 

8월에는 성 김 대북 특사(인도네시아 대사 겸)가 “북미 관계, 비 온 뒤 땅이 굳기를 바라며”라는 기고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북한과 외교적 접촉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4) 하노이 노딜이 아닌, 2018 판문점, 싱가포르 공동 선언이 북미 대화의 출발점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국 관료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북에 대화를 제안하는 글에 한미연합훈련과 대북 제재를 지속할 것이며, 북한 주민 인권 옹호 활동(북측에서 도발로 간주하는)도 계속하겠다고 굳이 표명한 것이다. “한국 및 일본과의 협력에 중점”을 두겠다는 마지막 문단은 탄식을 자아낸다. 북에 보내는 메시지에 ‘일본과의 협력’이라니….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는 북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역동적이다.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 간의 갈등은 알 바 아니고, 중국을 견제해야 하니 북한을 포함해서 모두 하나가 되자는, 그것이 ‘평화’라는 제안이다. 그런 개념도 낯설지만, ‘G2’로 치켜세우던 중국을, ‘악의 축’이라 일컫던 북한과의 동맹을 통해 견제하겠다는 관점에서는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를 일반 명사로 유통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거꾸로 치는 파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우리는 누구도 해석하지 못할 트럼프의 내면적 욕망을 3차례에 걸친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연결시킨 경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의 대북 접촉 노력은 보존되고, 그의 혼란스러운 동기와 네오콘 세력의 훼방은 사그라진 셈이다.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1979년)은 상호 교전 이후 25년 7개월 만이었다. 베트남과의 수교 역시 미국이 제안하고 압박했는데, 종전 이후 22년 6개월이 걸렸다. 반면 북-미 정상회담은 휴전 이후 64년 10개월 만이었고, 올해 중에 수교한다 해도 전후 68년을 넘기는 셈이다. 상호 교전을 치른 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에 핵보유국인 중국과도 한 세대를 넘기지 않고 외교 관계를 맺은 반면, 유독 북한과는 세 곱절 긴 시간을 갈등으로 보내고 있다. 이 차이는 미국이 구성한 국익과 한미 동맹이라는 외교 구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게는 기존 동맹인 대한민국이 평화를 원하지 않을 때나 북한이라는 적을 친구로 바꾸어 누군가를 견제할 필요가 없을 때는, 동아시아에 미군 기지를 유지하고 무기 체계를 수출하는 것으로 구성된 국익 개념을 변경할 유인이 없었다. 그런데, 21세기 버전의 ‘중국 견제’라는 변화의 축이 등장한 것이다. 지난 세기 미국의 중국, 베트남과의 수교가 각각 소련과 중국 견제라는 유인이 있었던 점을 떠올린다면, 미국의 실용주의 외교 기조에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변화다.

 

우리는 이 파도 앞에서 당황할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활용해서 우리의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과의 무역 전쟁은 미국 자신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올해 1분기 미․중 무역 규모는 약 184조 원(중국 해관총서)으로 사상 최고치를 향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중 무역 적자는 약 80조 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호주의 철광석과 석탄 수입 문제로 중국이 몸살을 앓고 그 여파로 아시아 증시는 침체하고 있으나, 이런 작위적 환경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적 재산권 문제와 같이 미국의 타당한 문제 제기들이 개선되는 것은 국제 갈등의 바람직한 결과로 수용하되 그 이상의 파괴적 갈등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종전 선언, 남북 교류, 북미 관계 개선을 얻어내고, 중국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평화 진전을 위한 중국의 조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최선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앞서 소개한 전직 장성들의 제안에는 당연하게도 핵 문제 해결이라는 조건이 달려있다. 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읽을 수 있고, 구소련의 핵무기를 성공적으로 해체한 미국 핵 과학자들의 경험이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오히려 비전문가 중에서 “북한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중들이 느끼는 공포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정책적 전제로 비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전제는 ‘자기 실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중국 견제’ 주문에 패키지처럼 묶여 있는 ‘일본과의 협력’ 역시 미국이 규정할 수 없다. 메르켈 전 총리가 지적한 대로, 일본은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국제 관계에서 순기능을 할 수 없다. 2019년에 감행한 대한 경제 제재가 일본 자신을 때리는 결말이었음을 한․일 대중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평화를 지향하는 동안에도 군사적 대치가 현존하면서 변수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5월 21일 한미 정상 회담의 성과로 ‘미사일 지침’이 종료된 것은, 당연한 주권 회복이기도 하고, 대북 억지력 차원에서도 필요했지만, 미국의 대중 견제 전략에도 기여하는 삼중 용도의 정책 변화이자 역사적 변곡점이었다. 9월에 우리 해군은 핵탄두 없는 SLBM(잠수함 발사 탄도 유도탄)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고, 북은 같은 날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요즘 남북은 서로 약속한 것처럼 공대지 미사일, 초음속 순항 미사일 등을 각자의 후방으로 쏘면서도 직․간접 대화는 진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1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종전 선언’을 제안하자 북이 화답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교전 상대였던 중국과 우리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8)를 맺을 때에는 어떠한 선언도 없었음을 대통령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라고 한 것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다음 단계 목표를 세계 앞에 제시한 일이다. 이것은 과도한 군비 경쟁 구도와 군사적 긴장을 완화를 임기 내에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모든 전쟁 당사자가 원론적 합의에 이르렀으니, 이를 유효하게 할 단계가 남은 셈이다.

 

한국 교회는 미국이 외교적 수사로 던지는 ‘인권’, ‘가치’, ‘자유’를 섣불리 성경의 단어들과 단순히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들을 움직이는 미국의 힘을 인지하되, 그 역동을 타고 넘으면서 우리가 설정하는 평화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신념과 협상력, 아이디어가 역동적으로 구성된 정권과 행정부를 유지해야 한다. 바로 지금, 대선을 향해 경쟁하는 모든 정파가 적정 수준의 평화 역량을 갖추고 경연을 벌여야 할 텐데, 주류 언론들이 그런 의제 제시 기능을 스스로 버린 것 같다. 당분간은 현인들의 목소리를 골라 듣고 SNS로 전파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측도 이 글의 독자임을 알고 있다. 남북 대화와 이산가족 상봉에 적극 나서준다면 ‘좋아요’로 알겠다.

 


1) The Diplomat

2) 홍선표, “트럼프의 무역전쟁, 미국을 만든 이백 년 보호무역의 부활”, Brunch, 2018. 3. 26.

3) Vincent Brooks and Ho Young Leem, “A Grand Bargain With North Korea: Pyongyang’s Economic Distress Offers a Chance for Peace,” Foreign Affairs, 2021. 7. 29. (필자의 번역문 링크)

4) 성 Y. 김, “북미 관계, 비 온 뒤 땅이 굳기를 바라며”, 한겨레,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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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민, “중미 100년 대결전… 최종승자는?②: 미국,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중국 내전 포기”, 오마이뉴스, 2021. 7. 22.

김찬호, “미국의 ‘중국 견제’가 미칠 영향은”, 주간경향, 2021. 10. 11.

이미아, “통일부 “개성 공단 빨리 재개돼야… 對北 제재 틀 속에서 푸는 게 중요””, 한국경제신문, 2018. 8. 1.

정욱식, “미국은 정말로 중국을 ‘봉쇄’할 수가 있을까?”, 프레시안, 2021. 2. 9.

정욱식, “미국은 아직도 ‘소련의 유령’과 싸우는가?”, 프레시안, 2021. 2. 11.

정주영,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가 필요하다”, 여시재, 2020. 4.22.

전홍기혜, “美 국익 위해 대담한 사고 전환 필요.북한이 ‘제2의 베트남’ 될 수도”, 프레시안, 2021.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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