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중에서 착한 이웃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적대시하고 괴롭히는 원수 이웃은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콕 집어서 나를 적대시 하는 사람들, 그중에 심지어는 악인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는 악인에게까지도 해를 비추시는데, 그 아버지를 닮으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명령을 표현한 동사는 헬라어 ‘아가파오’인데 이 동사의 뉘앙스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43절)라는 말을 보면, 앞부분은 모세의 율법에 있지만(레 19:18), 뒷부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어떻게 오해하고 제멋대로 적용했는지 지적하시기 위해, 성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우리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라고 알아들었습니다. 우리와 저들 사이에 단단한 경계를 만든 다음, 그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은 미워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의 오용을 지적하시며, ‘이웃 사랑’ 계명의 참뜻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였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원수란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모호한 우호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중에 어떤 이는 우리를 적대시하기도 합니다. 원수는 이웃에서 출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나를 적대시하는 그 원수까지도 포함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웃 사랑 안에는 원수 사랑이 본래부터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영역을 함께 공유하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이웃의 범위가 매우 넓어졌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는 전 세계인이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은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 그려보는 상상 속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서로 얼굴을 보며 교류하게 되는 구체적인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해야 할 이웃입니다.
이웃 중에서 착한 이웃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적대시하고 괴롭히는 원수 이웃은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콕 집어서 나를 적대시 하는 사람들, 그중에 심지어는 악인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는 악인에게까지도 해를 비추시는데, 그 아버지를 닮으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명령을 표현한 동사는 헬라어 ‘아가파오’인데 이 동사의 뉘앙스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에는 사랑과 관련된 네 가지 단어가 있는데, 의미를 구별해 보는 것이 유익합니다.1) 첫째로, ‘아가페’는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는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우리말로 ‘자비’에 가까운 말입니다.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태양과 같이 관대하고 온화한 사랑을 말합니다. 둘째로, ‘필리아’는 친구 사이에 신뢰와 친밀함을 느끼는 사랑을 말합니다. 친구의 장점을 좋아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늘 가까이 있고 싶고 교류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정’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에로스’는 서로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며 하나 됨을 추구하는 사랑으로서, 남녀 간의 사랑에 주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 사랑은 ‘열애’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불붙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넷째로, ‘스토르게’는 부모와 자식 간에 느끼는 사랑을 말합니다. 가족 간에 느끼는 끈끈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정’, ‘애정’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때, 원수를 ‘필리아’나 다른 종류의 사랑이 아닌,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와 친밀함을 느끼는 친구가 되라거나, 매력을 느껴 하나가 되라고 하시거나,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를 맺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적대하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도 태양과 비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며, 내 원수인 그도 잘 되기를 바라며 축복해 주고, 내가 나눌 수 있는 좋은 선물을 관대하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흉내 내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과제이며 소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우리의 원수 사랑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엿보게 하는 단어가 ‘보상’(헬, 미스토스)입니다. 포도원에서 하루 종일 수고한 일꾼들이 저녁에 퇴근할 때 받게 되는 약속된 ‘임금’이 ‘미스토스’입니다. 즉, 주인이 맡긴 일을 수고스럽게 잘 감당한 일꾼에게 주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잘한 사람만 뽑아서 주는 ‘상금’과는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탁월한 몇몇 사람에게만 기대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맡기신 중대한 공적인 사명이며, 공적인 ‘보상’이 따르는 일입니다. 수고스러워도 그만큼 하나님께도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원수를 관대하게 사랑하고 선물을 베푸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 본성에 반하는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흉내 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여기서 ‘온전함’(헬, 텔레이오스)은 ‘목표에 도달함’, ‘성숙함’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모범을 보여주시고 자녀들이 그 수준까지 자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명령이 이루려는 목표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다른 모든 명령들처럼 제자들이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편 가르고 적대하는 이 시기에, 부지불식중에 혹시 우리도 그런 모습을 흉내 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의 명령을 진지하게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우리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현명하게 적용할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깨닫고 닮게 되기를 갈망하고 함께 추구하면 좋겠습니다.
1)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이 네 가지 종류의 사랑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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