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비키시라구요!”
박 상 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경남 창원 시내버스. 꽤나 더운 여름. 110번 버스에 흰머리 할아버지가 타셨다. 승객도 꽤나 타고 있던 순간.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할아버지께서는 기사님 바로 뒤쪽 부근에 서계셨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 바로 옆에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타고 있었고, 더구나 자녀들을 데리고 서 있었다. 다음 정류장에 때마침 앉아 있던 승객이 일어났다. 할아버지께서는 힘드셨는지 일어나자마자 힘겹게 앉으셨다. 그때 상상치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아니 할아버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모든 승객들의 눈이 그 자리로 향했다. 그러나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할아버지께 쏘아붙였다.
“제 아들이 힘들어해서 앉히려고 했는데! 왜 앉으세요? 제가 더 의자에 가깝게 서있었던 거 안 보이셨어요?! 진짜 장난 치시나?”
할아버지께 너무 막말하는 여자승객을 보며 사람들과 기사님도 한마디 하셨다.
“아니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아줌마! 아무리 자녀가 힘들어해도 노인 공경을 할 줄 알아야지. 더구나 자녀도 보고 있는데 엄마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자녀가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앉으실 수도 있지. 당신도 더 나이 들어서 나중에 똑같이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그러자 오히려 더 큰소리를 내며 화를 내었다. 1개월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부분은 분명히 그 여성분이 과하다싶을 정도로 신경질을 많이 내셨기 때문이다.
“다들 지금 왜 저 할아버지만 옹호해요?! 제가 할아버지보다 더 이 자리에 가까이 서 있었다구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맞아요, 아녜요?!”
할아버지께서는 민망하셨는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셨다. 여자는 아이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이는 5-6살 정도로 보였는데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할아버지께 말했다.
“엄마. 왜 그래. 할아부지 다리 아야 하시잖아. 엄마. 나 괜찮앙.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할아부지. 여기 앉으세요. 저는 다리 튼튼해요. 할아부지한테 비켜 드리는 거라고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여기 앉아가세요. 저는 괜찮아요.”
순간 모든 승객들이 아이에게 박수세례를 보냈고, 기사님은 아이에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배웠구나. 그래. 너무 기특하다. 앞으로도 꼭 할아버지, 할머니나 아이를 임신해서 배가 불러 있는 여성분들을 보면 양보해주려무나. 알겠지?”
아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아이의 어머니인 여자는 부끄러움이 극에 달했는지 얼굴이 시뻘개졌다. 할아버지께 사과까지 해드렸으면 더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사과하는 모습은 보지를 못했고, 내릴 때까지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조용히 창문만 보고 서 있었다. 그보다도 할아버지께선 아마 상처를 크게 받지 않으셨을까 싶어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 직장에서 만난 상사가 말씀해주신 부분이 있다.
“상준아.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경우이든 3번만, 3초만 더 생각하면 실수할 일이 살면서 충분히 줄어든단다.”
상사의 말씀이 다시금 한 번 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버스에서 있었던 일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부터 갖추지 못한 큰 실례가 아닐까?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마도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이건 세월은 흐르고 살다 보면 노인의 연배가 되어갈 것이다. 옛날 말에 평소에 베푼 만큼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라고 했다. 자신을 위해서, 또 자신의 아버지나 친할아버지께 예와 정성을 다하는 만큼만 베풀어보자. 그리된다면 아마도 세상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노인공경과 더불어사는 사회가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