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투 대주교의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 이때 미래는 모든 사람이 다툼 없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누리는 미래입니다. 백인은 가해자로, 흑인은 피해자로 살아온 세월들을 뒤로하고 백인과 흑인, 그리고 다른 유색인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용서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용서를 통해 화해할 수 있고 화해를 통해 인종간의 평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투투 대주교는 무조건 용서하자고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본문 중)

강영안(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서강대 명예교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Desmond Tutu, 1931-2021)가 돌아가셨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는 어제, 12월 26일 온 세상이 그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투투 대주교는 평강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만이, 그분을 따라 서로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만이 사람에게 희망임을 지치지 않고 말하고, 자신이 말한 대로 본을 보이며 사신 분입니다. 그래서 2021년을 저는 이제, 에콰도르 출신 복음주의 신학자로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던 르네 빠디야(C. René Padilla, 1932–2021) 목사님과,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20세기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동독 출신의 독일 신학자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üngel, 1934–2021) 교수, 그리고 투투 대주교가 돌아가신 해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자 가운데는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나 ‘게티어 문제’로 유명한 에드먼드 게티어(Edmund Gettier)도 돌아가셨지만, 이분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명의 인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투투 대주교를 생각하면 저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와 알란 부삭(Allan Boesak, 1946)을 늘 함께 생각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지도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부가 무너지자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분입니다. 만델라는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알란 부삭은 남아공 개혁교회 목사 출신으로 네덜란드 캄펜에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줄곧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운동과 유색인들의 인권 회복 투쟁을 한 운동가입니다. 투투와 부삭,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는 백인 정부에 대항하여 비폭력 투쟁을 이끌었고, 마침내 백인 정부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투투 대주교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평화로운 정부 이양이 가능하도록 도왔습니다.

 

투투 대주교의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 이때 미래는 모든 사람이 다툼 없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누리는 미래입니다. 백인은 가해자로, 흑인은 피해자로 살아온 세월들을 뒤로하고 백인과 흑인, 그리고 다른 유색인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용서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용서를 통해 화해할 수 있고 화해를 통해 인종간의 평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투투 대주교는 무조건 용서하자고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의 없이는 화해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를 무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의가 바로 서려면 진실이 드러나야 하고, 드러난 진실을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 같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진실을 드러내고, 드러낸 진실을 서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책임질 것은 책임지되,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 함께 살아나는 정의를 세우고자 투투 대주교는 애썼습니다. 그가 이끌었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처벌을 목적으로 한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함께 살려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추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종 차별을 통하여 행한 악행은 국가에 대한 범죄라기보다 개인과 공동체에 대해 저지른 범행이기 때문에 국가가 관여는 하되, 개인과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가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화해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투투 대주교 ⓒflickr

 

저는 2003년 2월 투투 대주교의 강연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와 도서관을 같이 쓰는 칼빈 칼리지(Calvin College, 지금은 Calvin University) 철학과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투투 대주교가 그랜드 래피즈 실내 체육관에 와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과 한정된 티켓이 확보되어 있으니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메일을 학사 부총장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얼른 두 장을 신청하여 아내와 함께 6천 명의 청중 가운데 끼어 투투 대주교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투투 대주교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아들 부시 대통령이 후세인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이라크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한 때였습니다.

 

제가 처음 본 투투 대주교의 모습은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매우 수줍은 모습으로 연단에 올라 선 투투 대주교는 자신이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해서 살아온 삶을 얘기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인생의 물구나무를 수십 번 선 사람 같았습니다. ‘달인’(達人)이란 말을 어떤 사람에게 쓸 수 있다면 투투 대주교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에 이어 미국이 남아공에 대해서 경제 제제 조치를 강하게 취해 준 탓에 남아공 백인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 일에 대해 미국인들에게 감사한다고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여러분께, 저는 백 번, 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차례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몇 십 초간 침묵이 흘렸습니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투투 대주교는 어떤 농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닭이 수백 마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어린 새끼 때부터 닭들과 같이 살아온 독수리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당연히 닭처럼 행동했습니다. 같이 모이를 쪼아 먹고 모이를 두고 먼저 먹겠다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는 독수리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독수리를 손끝에 앉히고는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독수리야. 날아가라, 날아가라, 하늘 끝까지 날아가라!”(You are an eagle. Fly, fly, fly to the end of the sky!).

 

투투 주교는 다시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체육관에 몰려온 미국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저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인 여러분은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군사를 보내고 피를 흘리며, 물자를 지원하고 복구 작업을 도와준 독수리 같은 미국이 어떻게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작은 닭이 되고 말았느냐고 질책하는 소리였습니다.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와 같은 그의 입에서 준엄한 목소리를 들은 미국인들은 한 사람도 대꾸를 하지 못하고 침묵 가운데 행사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저는 2003년, 칼빈 칼리지에서 중국 고대철학을 비롯하여 다섯 과목이나 준비해서 가르치느라 고생했지만 이것들은 이제 기억에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경험, 곧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교육에 도입할 것인가를 두고 장장 세 시간이나 토론하는 교수들의 모습을 전체 교수회에서 목격한 일과, 스즈키 마사아키가 이끄는 일본 바하 악단(Bach Collegium)의 마태 수난곡 연주를 대학 예술관에서 들은 일, 그리고 시내 체육관에서 투투 대주교의 강연을 들었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게 저의 기억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투투 대주교가 한없이 부드럽고 겸손하며 유머가 가득 찬 가운데 들려주었던 독수리 이야기는 오래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어둠을 통하여 그 뒤에 빛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부패에 빠진 흑인 정부와 더욱 심화된 남아공의 불평등을 안타까워한 것을 기억합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이제 주님의 부름을 받아 떠난 투투 대주교가 하나님 품속에서 편히 쉬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 그리스도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이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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