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어떤 때에는 죄에 대한 벌이 작다고 분노하고, 다른 때에는 죄에 대한 벌이 크다고 분노하는가? ‘죄의 존재 여부’에 대한 유무죄의 판결도 문제이지만, ‘죄에 대한 벌의 크기’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반응은 적절하고 정당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의 재판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기능하는지’, 또한 ‘역사는 세상 법정의 죄와 벌을 다루면서, 둘 사이의 갈등과 긴장에 대해서 어떻게 균형을 모색해 왔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중)

이병주(기독법률가회 대표,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 『기독교와 법』 저자)

 

세상의 죄와 벌, 심판과 용서에 대한 우리들의 양면적인 느낌

 

세상에는 형사 사건이 가득합니다. 세상에는 죄지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에서는 대통령과 재벌 총수로부터 아래로는 우리 옆의 평범한 시민들까지, 정치인과 기업인과 종교인과 군인과 각종 생활인과 남성과 여성들이 죄를 짓고 고소를 당하고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습니다. 정치적인 죄와 경제적인 죄와 신체적인 죄와 성적인 죄와 경범죄 … 죄의 종류도 지극히 다양합니다. 세상은 죄와 죄인으로 가득합니다(로마서 3:23).

 

어떤 경우에 우리는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분노합니다. 다른 경우에 우리는 죄의 혐의를 받은 사람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너무 가혹한 것에 슬퍼합니다. 우리가 ‘피해자의 입장’에 있거나 피해자의 입장에 공감할 때 우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응징’을 원하고, 우리가 ‘피의자(피고인)의 입장’에 있거나 그 입장에 공감할 때에는 우리는 무고한 사람에 대한 처벌을 슬퍼하고 죄에 비해 가혹한 처벌에 분노합니다.

 

세상의 심판 중 ‘언론의 심판’과 ‘검찰의 심판’과 ‘법원의 심판’에는 우리의 체감 온도상 조금씩 다른 분위기와 상황이 전개됩니다. 현대 사회 언론과 여론의 심판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돌을 한꺼번에 던지고 맞는(stoning) 명예 사형의 힘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소 흥분된 검찰과 수사 권력의 압박 앞에서는 인생의 자유와 운명의 붕괴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법원의 심판에는 상대적으로 조금 차분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가 나오면 어떤 판결은 냉혹한 판결로, 어떤 판결은 물러 터진 판결로 비판을 받습니다.

 

헷갈리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어떤 때에는 죄에 대한 벌이 작다고 분노하고, 다른 때에는 죄에 대한 벌이 크다고 분노하는가? ‘죄의 존재 여부’에 대한 유무죄의 판결도 문제이지만, ‘죄에 대한 벌의 크기’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반응은 적절하고 정당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의 재판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기능하는지’, 또한 ‘역사는 세상 법정의 죄와 벌을 다루면서, 둘 사이의 갈등과 긴장에 대해서 어떻게 균형을 모색해 왔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법정과 세상 심판의 역사(歷史) – ‘카인의 법정’과 ‘모세의 법정’

 

세상에 죄가 나타난 것, 죄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발생한 것은 인류가 생겨난 직후부터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죄(罪)’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재판’을 여시고, 피고인 아담과 이브에게 먼저 자기를 방어할 변론의 기회를 주신 후, 아담과 이브의 ‘죄’에 대한 판결로서 ‘죽을 운명’(사형)과 ‘저주받은 땅에서 땀 흘려 수고해야 하는 삶’(노역형)의 ‘벌’을 선고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의 원형입니다.

 

창세기 4장이 시작되자마자 카인과 아벨, 형제 사이의 싸움이 생겼습니다. 자기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분노한 카인은, 동생 아벨을 피고인으로 삼아 최초로 자의적인 ‘사람의 법정’을 열었습니다. 이 법정의 재판관은 카인이고, 증인도 카인이며, 피고인 아벨에게는 자기를 방어할 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임명한 재판관 카인은 ‘나를 이긴 죄, 내 몫을 박탈한 죄’로 아벨에게 유죄를 선고한 후, 들에서 직접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최초로 무법한 사람의 법정에서 죄 없는 자를 벌하는 거짓된 재판이 벌어졌고, 이 최초의 재판은 곧 인류 최초의 ‘살인죄’가 되었습니다. 이후 카인의 후예인 라멕 또한 사람의 법정을 열어 ‘자기에게 상해를 입힌 죄’로 사람과 소년들을 죽이는 벌을 집행한 사실을 당당하게 자랑합니다(창세기 4:23, 라멕의 노래). 카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카인의 법정’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의 법정’의 (악한) 원형(原型)입니다.

 

출애굽기 20장 이하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헌법)과 율법(법률)과 재판 제도를 계시하셨습니다. 이후 3천 년 이상 지상에서 ‘사람의 법정’이 열려 ‘세상의 재판관’들에 의해 죄의 심판과 벌의 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세속 국가들의 법률은 조금 다르기도 하지만 죄와 벌의 기본 유형은 아주 흡사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세상의 법정에서 처벌하는 살인죄와 상해죄 등 신체적 법익(法益)을 침해한 죄와 상응하고,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은 형법상 절도죄와 사기죄 등 재산적 법익을 침해한 죄와 거의 동일합니다. ‘모세의 법정’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법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의 법정’의 (비교적 선한) 원형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죄 중 상당 부분은 사람의 법정에서 응당한 죄인에게 정당한 벌이 주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재판의 순기능). 그러나 또한 역사 속에서는 세상의 권력, 세상의 심판권에 의해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법과 재판의 이름으로 처벌받고 처형당하는 불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재판의 역기능). 정당한 재판으로 불의한 재판이 정당화될 수 없고, 불의한 재판으로 정당한 재판이 무시될 수도 없지만, 정의를 외치는 재판으로 불의가 행해지고 불의한 재판정의 바로 옆 법정에서는 합당한 재판도 진행되었던 것이 엄연한 역사의 모순된 현실입니다.

 

이념형(理念型)으로서, 모세의 법정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정당한 심판을 행하는 ‘의로운 세상의 법정’으로, 카인의 법정은 ‘인간이 왕이 되어’ 거짓 심판을 행하는 ‘불의한 세상의 법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적 법정은 그것이 세속 법정이든 종교 법정이든 ‘모세의 법정’과 ‘카인의 법정’이 서로 뒤섞여 혼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십자가 재판’은 빌라도 총독의 세속 법정과 유대교 산헤드린의 종교 법정, 두 곳에서 같은 날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수천 년 동안 자백만을 증거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자백주의 하에서 참혹하게 이루어진 고문의 역사도 조선 시대의 국문청뿐만 아니라 교황청 산하의 중세 종교 재판소에서도 잔인하게 집행되어 왔습니다.

 

 

죄와 벌의 긴장과 균형 – ‘피해자의 정의’와 ‘피고인의 정의’

 

죄의 한쪽에는 피해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가해자(피의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벌’의 문제에는 항상 ‘피해자 보호’와 ‘피고인 보호’라는 대립하는 양대 기둥 간의 긴장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관원들에게 죄를 다스리고 벌할 권한을 주셨습니다(로마서 13:4). 그러나 세상 법정의 심판권이 죄 없는 자(피고인)의 피를 흘리는 교만한 칼이 되었을 때, 죄 있는 자의 권세 앞에 고개를 꺾는 비겁한 칼이 되었을 때, 이 칼은 하나님의 위임 범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하나님 앞의 거짓 증거,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의 권세가 됩니다.

 

세상의 법정의 근대 민주주의 이전의 형사 재판에서는 제도적으로 ‘자백주의’(自白主義)와 ‘규문주의’(糾問主義)를 원칙으로 하는 자의적인 재판을 통해, 정치·경제·종교적 이유로 무고한 자를 죄인으로 몰아 처벌하는 일이 훨씬 많았습니다. 자백주의는 자백 하나만 있으면 피고인을 유죄로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사극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형사 절차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말과 함께 엄청난 고문을 가하게 만든 제도적 원인이었습니다. 규문주의란 기소를 하는 검찰과 판결을 하는 법원이 분리되지 않은 제도입니다. 이 제도에서는 법원이 직접 혐의자를 찾아 기소한 후 자기가 스스로 판결을 내리는 ‘원님 재판’이 되므로, 한번 잡혀 온 피고인이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을 고문해서 자백을 받고, 기소한 기관이 그대로 재판을 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곤 하던 ‘카인적 사람의 법정’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형사소송법의 개혁을 통해서, 자백 이외의 추가적 증거가 없으면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백의 보강 법칙’으로, 기소 기관(탄핵 기관-검찰)과 판결 기관(법원)을 분리한 ‘탄핵주의’(彈劾主義)로, 형벌 법규에 명백하게 규정한 죄만 유죄로 처벌할 수 있고, 벌의 종류와 크기 또한 법이 정한 법정형 한도에서만 처벌할 수 있다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로 크게 보완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대 민주주의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따른 재판 제도는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 기초한 법률적 거짓 심판의 가능성을 크게 감소시킨 것이 사실이고, 이는 왕정 하에서 권력의 독단성이 강화된 ‘카인의 법정’을 성경에 계시된 ‘모세의 법정’의 원리에 가깝게 회복시킨 결과이기도 합니다.

 

여전한 긴장과 갈등 – ‘선악과 계명’과 ‘제9계명’의 경고와 질문

 

이처럼 현대 형법 제도는 ‘피해자 보호’와 ‘피고인 보호’라는 두 가지 명제 중 피고인의 보호가 좀 더 부각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긴장과 갈등은 여전합니다. 우리가 피해자의 정의를 외치고 싶을 때에 피고인의 보호라는 명제는 마음에 탐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고인의 억울함에 공감할 때에는 피해자의 반발에 부담을 느낍니다. 하지만 근대 형사 재판 제도는 갈등의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균형을 찾아가는 데 크게 도움을 줍니다.

 

세상 법정의 형사 재판 제도는 악행을 범한 사람을 벌해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로마서 13장의 ‘피해자의 정의’를 일차적 기능으로 삼습니다. 여기에 현대의 형사 재판 제도는 심판하는 자(경찰, 검찰과 법관)의 악(惡)함을 인정하고, 심판권자의 칼이 요한계시록 13장의 악한 짐승의 권세가 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적법 절차, ‘피고인의 정의’를 이차적 기능으로 강조합니다. 이 두 기능은 서로 갈등하고 싸웁니다. 서로 싸우니까, 진짜 죄인을 처벌하고 무고한 사람의 처벌을 막는 순기능이 커집니다(국가 형벌권으로부터의 시민의 자유). 하지만, 적법 절차는 부득이 진짜 죄인에게도 절차적으로 도망갈 기회를 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피해자와 시민들에게 상처와 분노를 줍니다.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혁명과 사회‧정치적 열정은 ‘정의의 신속한 집행’을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오랜 역사의 피눈물이 반영된 법과 재판 제도는 ‘정의의 신중한 집행’을 요구합니다. ‘피해자의 정의’는 마치 자동차의 가속기(액셀)와 같고, ‘피고인의 정의’는 자동차의 제동기(브레이크)와 같습니다. 자동차의 운전에는 액셀과 브레이크가 둘 다 필요하듯이 세상 법정의 정의에는 피해자의 정의와 피고인의 정의가 둘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위한 열의(passion)를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정의의 신중함을 위해서 참을성(patience)도 꼭 가져야 합니다.

 

다시, 성경의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의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선악과 계명’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의 법정과 세상의 심판권’을 근본적으로 불신합니다. 이 계명은, 좌에서나 우에서나 법적, 정치적 정의의 실현을 외치는 우리의 열정에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다음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법정과 세상의 법정에 증인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법관, 검사, 변호사와 경찰관은 물론, 언론과 일반 시민들도 세상 법정의 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입니다. 우리의 증언은 피해자의 정의를 위해서 악행을 증거하는 목격자의 증언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고한 이웃을 처벌하여 무너뜨리는 하나님 앞의 거짓 증언(거짓 심판)을 범하지 않을 엄중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밖으로 던졌던 질문을 우리 자신을 향하도록 되돌려 보겠습니다. 먼저, 세상 법정의 심판관인 법관과 검사, 변호사와 사법 경찰관, 여기에 여론 재판의 주체인 언론과 기자들에게도 질문이 제기됩니다. “세상에서 당신이 행하는 심판은, 정의롭고 정당한 모세의 재판인가? 아니면 불의하고 가혹한 카인의 재판인가?” 모세의 재판이라면 하나님의 칭찬이 주어질 것이고, 카인의 재판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시민으로서 여론의 형성을 주도하거나 그에 참여하면서 세상의 법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던져집니다. 선악의 심판 과정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그 누구도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너는 지금 불의한 카인의 재판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당한 모세의 재판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해명하고 고백해야 할 내용은 단지 ‘하나님을 믿었는가, 믿지 않았는가’ 이것 하나뿐이 아닙니다(마태복음 12:36; 히브리서 4:13). 우리는 다음 질문에도 답해야 할 것입니다. “너의 인생을 통틀어, 세상의 법정 안과 밖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법정 속에서, 정의를 위해서는 증거해야만 할 죄에 대한 목격 증언을 행하였는가? 정의를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이웃의 죄에 대한 거짓 증언(거짓 심판)의 죄를 범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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