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는 구약의 책이지만 이미 신약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왜곡된 율법주의에 저항하여 옳고 그름의 문제를 벗어나게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정죄의 대상이기 전에 전적인 ‘타자’다. 주체인 나와 동격이 된다면, 절대적 약자의 처지는 율법주의의 올가미로부터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 그리고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사람의 행동으로 현실화하여야 한다는 신앙적 촉구를 하고 있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누군가 처음 성경을 읽고자 할 때 대부분 구약이 아닌 신약부터 읽을 것을 권고받는다. 구약성서가 전공인 필자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독자들이 신약을 통해 어서 빨리 예수부터 만나기를 필자도 기꺼이 바란다. 구약부터 읽으면 레위기도 넘기 어려울 것이다. 마태복음을 펼치면 예수의 족보가 등장한다.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 같은 위기를 잠시만 넘으면 곧이어 반갑게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족보는 영화 시작에 앞서 잠시 나오는 영화관 대피 안내 영상처럼 생각 없이 읽는 본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의 족보는 흥미롭다. 족보 속 이름 가운데에 여성의 이름이 눈에 띈다. 고대 이스라엘은 심각한 가부장적 사회였다. 특히 유대인들을 위해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마태복음이 여성의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흥미로움을 넘어 당혹스럽다. 족보에 등장한 첫 여성 다말은 자신을 숨기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임신했던 여인이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기였다. 룻은 남자가 잠들었을 때 몰래 다가가 하룻밤의 사건을 일으켰던 여자다. 네 번째 여인도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소개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구절 자체가 불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네 여성과는 다르게 마지막 여인은 성생활도 없이 임신하였다. 성령을 통해 임신했다고 고백하여 약혼자 요셉의 심장을 멈추게 할 뻔했던 여인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다.

 

이 여인들의 족보 속 등장은 무엇을 암시할까? 그중 룻을 관찰하여 보자. 룻기 3장 1-9절을 요약하여 옮기면 이와 같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친족 가운데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냐?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서, 타작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너는 그가 눕는 자리를 잘 보아 두었다가, 다가가서 그의 발치를 들치고 누워라.” 룻이 살그머니 다가가서, 보아스의 발치를 들치고 누웠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보아스는 으스스 떨면서 돌아눕다가, 웬 여인이 자기 발치께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누구요?’ 하고 물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

 

후에 이 둘은 결혼을 한다. 유대-기독교의 정경으로서 룻기는 독자들에게 큰 고민을 안긴다. 심지어 그날 밤 룻과 보아스 사이에는 아무 성적 접촉도 없었다는 주장이 해석사에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날 밤, 룻과 보아스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분명하다. 그래서 룻의 이야기는 매우 큰 논란거리다. 독자들이 윤리적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했던 이야기다.

 

당연히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던 행동이다. 그러나 쉽게 정죄하기에 앞서 왜 성서가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자가 없는(그 남자가 아버지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여인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이다. 우주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다. 좀 과장하여 표현하자면, 성폭행범과 살인자들만 득실거리는 섬 한가운데에 던져진 두 여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오미와 룻이 그 섬에서 무사하게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건 든든한 남자다.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 한 인간으로 보자면 룻의 도발적 행위는 정당 방어로 해석될 수 있다. 절대적 약자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는 방어였다. 취약한 두 여인에게 허락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범법이었다.

 

 

이 이야기는 독자를 논쟁으로 초대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논쟁하게 된다. 특히 구약 사회는 율법에 예민했다. 무엇이든 쉽게 ‘옳고 그름’의 논쟁으로 이끈다. 이 여인 룻은 이 논쟁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앞에 선 룻은 이에 무슨 대답을 할까? 위에 읽어 본 룻기의 한 본문에 그 대답이 담겨있다. 룻기 3장 9절이다.

 

(보아스는) “누구요?” 하고 물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 앞에서 룻이 했던 말은,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다. 새번역에서 따온 이 문장을 좀 더 직역에 가까운 개역개정 번역에서 읽으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여기서 옷자락은 히브리어로 ‘카나프’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옷자락 말고도 ‘날개’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 주목해야 할 의미다. 룻기에서 이 단어가 이미 보아스의 입을 통해 한 번 발설 된 적이 있었다. 그가 룻에게 했던 말인데, 룻기 2장 12절이다. “댁(룻)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룻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보아스는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보아스는 측은하고 기특한 그녀를 축복하고 싶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날개, 즉, 카나프로 그녀를 품으시길 축복하였다. 그리고 이제 룻이 자신이 들었던 단어 카나프를 응용하여 대답한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그 말은 마치 이렇게 들린다. “보아스 당신께서 언급했던 카나프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이어야만 해요. 정말로 내가 하나님께 축복받기를 원하신다면, 축복을 하나님의 이름만 빌어 말로만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할 수는 없나요? 하나님의 카나프(날개)가 내게는 당신의 카나프(옷자락)일 것 같군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날 섬겨 주세요.”

 

보아스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카나프는 사실 보아스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바랐다면, 자신의 옷자락이 하나님의 날개가 되어야 한다. 룻은 보아스에게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룻기는 구약의 책이지만 이미 신약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왜곡된 율법주의에 저항하여 옳고 그름의 문제를 벗어나게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정죄의 대상이기 전에 전적인 ‘타자’다. 주체인 나와 동격이 된다면, 절대적 약자의 처지는 율법주의의 올가미로부터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 그리고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사람의 행동으로 현실화하여야 한다는 신앙적 촉구를 하고 있다. 관심과 은혜의 대상은 ‘타자’이기에, 그 행동의 현실화는 쉽게 ‘섬김’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룻은 하나님 은혜의 수혜자이어야 하며, 그래서 보아스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여인이다. 그 섬김은 사회적 통념과 율법주의의 무게를 이기고 구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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