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끝낼 방법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전쟁을 피해 오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지금 할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전쟁을 피해 한국의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은 계속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 난민들을 향한 진심 어린 공감과 환대를 담은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본문 중)

김세진(변호사, 공익법센터 어필)

 

필자가 처음 난민을 돕는 일에 참여한 2013년에만 해도 한국에도 난민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시민들이 난민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다가 2015년 파리 테러 사건이 일어난 후, 마치 난민들이 테러리스트인 것처럼 기사가 나가면서, 시리아 난민을 테러리스트로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후 2018년 예멘 난민이 왔을 때는 한국에 난민 반대 단체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난민들이 가짜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유포된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기보다 이를 묵인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명백히 난민으로 인정받아야 할 아프간 난민들을 난민이라 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예멘 난민이 입국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가짜 난민 주장을 한 근거는, 그들이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이키 신발을 신었으며, 핸드폰을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은 이동의 경로 및 수단 등 정보 공유를 위해 난민들에게는 필수품이다. 그리고 난민이라고 나이키 신발을 신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분단국가 상황에서 전쟁이 나면 언제든 나이키 신발을 신고 한반도를 탈출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그들이 무엇을 타고 왔는지, 무슨 브랜드 신발을 신었는지, 핸드폰을 갖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자신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 나라에는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멘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다. 통일을 급하게 이루다 보니, 국내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그 틈을 타 후티 반군이 일어났다. 이들은 시아파 모슬렘인데, 예멘 북쪽에 있는 수니파 모슬렘의 맹주국 사우디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예멘 정권을 잡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멘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후 시아파의 맹주국인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면서 예멘 내전은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우디는 예멘의 군사 지역뿐만 아니라, 식당, 결혼식장, 병원 등 민간인 구역에 수만 건의 공습을 하였다. 이런 공습으로 무기가 다 소진되면 사우디가 전쟁을 그만둘 줄 알았지만, 미국이 다시 무기를 공급하여 전쟁은 계속되었다. 6년여의 예멘 전쟁 기간에 발생한 사망자가 13만 명인데, 대부분 사우디가 주도한 아랍 동맹의 폭격에 피해를 보았으며, 전체 사망자 중 4분의 1이 어린이들이었다.

 

시리아도 살펴보자. 시리아에는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소수 종파 알라위파의 바아스당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가 1971년 무혈 쿠데타 이후에 대통령이 되어 30년 동안 집권했고,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가 현재까지 20여 년간 집권하고 있다. 2011년, 아사드(Assad) 가문의 40년간의 장기 독재, 비밀경찰에 의한 탄압, 자유의 상실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이 오랫동안 누적된 상태에서 시리아 남부 데라에서 학교 벽에 반정부 구호를 쓴 아동들이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자,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면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때 군경이 비무장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 시위대도 총칼로 대치하면서 시위가 내전 양상으로 격화되었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원유 수송로로서 시리아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러시아와 미국까지 개입하면서 내전은 계속되었고, 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난민을 많이 발생시키는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시리아 난민들은 자유를 찾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을 하다가, 성공하지 못한 혁명의 결과로 난민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전쟁을 피해 한국에 온 시리아 난민들을, 명백히 난민이 아니라며 난민 신청 절차에 회부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28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공항에 8개월이나 구금되었다. 구금된 장소는 해가 전혀 들지 않았고, 화장실에는 샤워 시설 하나 없이 변기 한 칸 세면대 한 칸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갇혀 있던 한 시리아인은 필자와 카톡을 하면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취급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정부는 시리아 난민이 명백히 난민이 아닌 이유는 난민 협약상 전쟁은 난민 발생의 요건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고로 난민 협약에서 난민 발생의 사유는 인종, 국적, 종교, 특정 사회 집단 구성원 신분, 정치적 의견, 이렇게 5가지 사유로 한정되어 있다. 전쟁이 요건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에서 탈출한 자들은 이러한 5가지 사유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시리아 난민들 대부분은 정부의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며, 시민군을 총으로 쏠 수 없어 정부군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시리아를 탈출한 것이므로 정치적 의견에 의한 난민으로 봐야 했다.

 

그래서 소송을 제기하였고 당연히 시리아 난민들이 승소하여서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들을 끝까지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도적 체류자’ 지위만 부여했다. 인도적 체류자에게는 임시 체류만 허락되어 6개월에 한 번씩 체류를 연장해야 하고, 난민이 누리는 권리를 누릴 수 없으며, 취업 활동 허가권만 주어지는데 그 범위도 단순 노무에 한정되어 있다.

 

2017년 북한이 고강도 핵·미사일 도발을 일삼던 때에 한국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존 배낭과 방독면이 불티나게 팔리고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전쟁을 예언하는 사람들의 영상들이 유행하면서 구국 기도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다행히 한반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018년에 예멘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한국의 문을 두드릴 때, 많은 사람들이 빗장을 걸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난민들을 테러리스트나 과격한 무슬림인 양 취급하면서 예멘인 일반을 위험한 존재로 만드는 프레임을 씌워 반대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겁이 났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한 백성이라고 보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전은 중요하고, 사지에서 쫓겨 온 예멘인들의 목숨은 돌아보지 않는다고 우리를 책망하실까 두려웠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원인은 결국 욕심이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독재자들, 무기 수출업자들, 자원을 탈취하려는 자들…. 그들은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이미 강자들이다. 반면,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약자이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전쟁의 피해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실 것이다. 우리는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본 피해자들 편에 서야지, 강자의 편에 서서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피해자들에게 씌우는 프레임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강자의 편에서 피해자들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끝낼 방법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전쟁을 피해 오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지금 할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전쟁을 피해 한국의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은 계속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 난민들을 향한 진심 어린 공감과 환대를 담은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이미 미얀마 내전이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오래되면 유럽에서 수용되지 못한 난민들이 한국으로 올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그들에 대하여 또다시, 전쟁은 난민 협약상 난민 발생 사유가 아니니 명백히 난민이 아니라며 공항에서 문전 박대하지는 않길 바란다. 그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쳐 온 약자들이라는 것을 모두가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약자들을 향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따라 우리가 연대해야 할 대상을 알아보고, 그들을 향해 두 손과 팔을 내밀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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