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코로나가 우리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생각하고 이러한 새로운 표준에 차차 적응하기만 하면 될 터인데,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와 연관된 데서 비롯되는 혼란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코로나가 대 유행병으로 선언이 되고 2년 반 동안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코로나에 걸리고 심지어 ‘주변에 코로나 걸린 사람이 없으면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동안에도 용케 피해 다니던 내가, 결국 코로나 확진자 대열에 서게 되었다. 부모님 일로 지난달에 또 한 차례 영국을 다녀온 직후였다. 백신을 세 번이나 맞기는 했지만, 돌파 감염, 재감염 등의 확진자가 늘어나는 가운데도 용케 안 걸리기에, ‘나 혹시 슈퍼 면역자 아닐까’ 하면서 내심 끝까지 안 걸리고 이 재난을 통과하리라는 기대까지 하던 터라, 몸이 무겁고 목이 따가워도 그냥 여독에다가 갑작스러운 무더위에 창을 열고 자서 그런가 보다 했다. 더군다나 열이 없어서 코로나에 걸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귀국자의 의무 사항인 PCR 검사를 통과의례처럼 받은 다음 날 아침, 무심하게 보건소에서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양성이 뜬 것을 보고는 순간, ‘문자가 잘못 왔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희망 사항으로 돌돌 뭉친 나의 착각이 제법 컸나 보다. 하지만 그런 착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를 독감처럼 관리한다는 게 지난 몇 달간 여행 규제가 풀리는 나라들의 방침이었기에, 그동안 독감 예방 주사를 맞지 않고도 독감을 피해 다녔던 나로서는 백신까지 빵빵하게 맞은 지금 그냥 기본적으로 조심할 거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이르렀었다. 그런 예상을 뒤엎고 걸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걸려 보니 좀 심하게 목감기를 앓는 정도였고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들도 기관지 관련 약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래 이 정도면 독감 비슷하다 할 수도 있지’ 했었다.

 

하지만, 일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차례의 백신을 맞고도 이 정도로 아파야 하는 이 질병에 대해서 새삼스레 무서운 생각이 들며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서, 한 번씩 눈알이 빠지고 속이 뒤집힐 정도로 심하게 올라오는 기침 때문에 결국 며칠 전 한약 처방까지 받았다. 이렇게 앓고 나서도 또 걸릴 수 있는 병이라 하니, 끝이 끝이 아닌 이런 어정쩡함을 안고 사는 게 새로운 표준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평생 마스크를 벗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카더라 통신’으로 떠돌 때, 그런 세상은 너무 끔찍하다 생각하며 ‘에이, 설마’ 했는데, 안 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려도 죽지 않기 위해서 백신을 맞으라고 하는 지금은 ‘정말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싶기도 하다.

 

일상 복귀를 간절히 소망하며 2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후 얻은 지금의 생활 방식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상의 전부인지, 여기에서 앞으로 갈지 뒤로 돌아갈지, 심지어 우리가 회복한 일상이 꼭 좋은 건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그런 혼란의 시기에 지금 우리는 와 있는 것 같다. 강제로 모두가 최대한 대인 접촉을 피해야만 했을 때는 힘들기도 했지만 그 핑계로 회식이나 시댁 방문과 같은 모든 불편한 인간관계들을 피할 수 있었고, 그러고 보니 전에는 힘들어도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 우리에게 표준적 생활 방식이었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지난겨울, 아직 여행이 제한적이었을 때 경험했던 한산한 공항, 이코노미석 표로 일등석처럼 드러누워서 갈 수 있었던 비행기의 여유로운 좌석은 제법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코로나의 한시적 경험은 그토록 간절했던 여행이 사실은 얼마나 번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었던지도 새삼스레 느끼게 했다. 며칠 전 국제 학술 대회에서 만난 인도인 여교수도 코로나를 지나면서 자신이 게을러진 거 같다고 했는데, 여행하기 위해서 짐을 싸고 이동하고 하는 일들이 그렇게 귀찮아졌다는 것이다. ‘리벤지’ 여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그동안 참았던 활동에 몰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게 원래 이런 거였나’ 하며 약간 혼란스럽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냥 당연하게 수행하고는 ‘아 피곤해’ 하며 쓰러질 수 있었던 많은 일이 이제 하나의 선택지가 되니 그 앞에서 헷갈리는 것이다.

 

이번에 참석했던 서울에서 열린 국제 학술 대회는 지난 2년 반 동안 이미 많이 달라진, 그러나 아직은 그 방향이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새로운 표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대면과 비대면의 장점을 다 사용해 보자는 취지에서 주최 측이 그렇게 준비한 것 같은데, 완전히 비대면으로만 진행하는 세션도 있었지만, 많은 세션이 대면과 비대면 혼합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현장에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못 오거나 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줌으로 접속할 수 있었는데, 나의 경우 한국에 있으니 당연히 현장에서 대면으로 발표하는 쪽을 택했다. 그동안 줌으로 여러 학술 대회에 참석하고 발표도 했지만 아무래도 좀 갑갑하게 느껴졌던 터라, 나 또한 이참에 리벤지하듯이 사흘 내내 현장에서 살아 주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학술 대회의 절반만 현장에서 참여하고 절반은 집에서 줌으로 듣게 되었다. 몸이 극도로 피곤한 데다가 현장에 있는 장점을 딱히 느끼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디가 진짜 현장인지도 헷갈렸다. 주요 세션의 학자들 대다수가 줌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인간 조직이란 어쩔 수 없이 행사의 메인 얼굴들이 있는 그곳이 현장이 되기 때문에 ‘몸소 친히 납시기를’ 바라는 것인데, 몸소 친히 납시는 장소가 건물 장소가 아니라 온라인의 가상 룸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프닝 세션의 발표자 한 사람은 건물 현장에 오겠다고 한국에 입국까지 해서는 곧바로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호텔 방에서 줌으로 참석했으니 그 수고의 의미가 더욱 희석되었다. 그리고 같은 스크린이라 하더라도 학회장에 앉아서 발표자를 보는 것보다 내 방에 앉아서 미팅룸에 들어가 그의 발표를 듣고 챗도 보내고 하는 게 어쩐지 더 친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면이 표준이었던 시대에는 직접 현장으로 가지 않으면 아예 볼 기회가 없고, 가서 본다 해도 남들의 시선을 끌어가며 질문이나 코멘트를 던지는 게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자기 방에 앉아 줌 미팅룸으로 들어가서 만나고 싶었던 학자나 저자를 볼 수 있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닉네임을 쓰며 챗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기능은 분명 첨단 기술이 가능하게 해 준 새로운 기회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평소 같으면 부르기 힘든 학자들을 섭외할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도 분명 이 기술 덕분이리라. 비단 이런 행사만이 아니라 좀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전에는 굳이 화상으로까지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해외의 친구들도 아예 해외여행을 못 하게 되니 오히려 화상으로 정기적으로 약속까지 잡아가며 더 자주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코로나가 우리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생각하고 이러한 새로운 표준에 차차 적응하기만 하면 될 터인데,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와 연관된 데서 비롯되는 혼란이 아닐까 생각한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비대면 만남을 가능케 한 전대미문의 기술과 결합하면서 인류사에 너무나도 당연했던 인간과 인간의 대면이라는 전제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의 명령이 애 많이 낳으라는 게 아니라 인류로서 기본적으로 생존하라는 명령이라면—생존하지도 않는 인류에게 구원이라는 건 어불성설이기에— 다른 대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생존에 위협이 되는 대면을 무릅쓸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하필 내가 걸린 오미크론이 B5 계열이라며 격리 해제 후 만나서 식사한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묻는 전화를 보건소로부터 받고 나서는, ‘그래도 직접 만나는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전제도 심하게 흔들렸다.

 

이런 현실이 그리스도인에게 가져다주는 혼란은 더 크리라 생각한다. 발을 씻기고, 밥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병자를 들것에 나르고, 예수의 시신을 거두고,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보고, 같이 모여 구제하고 기도하고 하는, 많은 성경의 이미지들에 담긴 기독교적 사랑의 디폴트값은 인간과 인간의 대면이었기 때문이다. 병자를 방문하고,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고, 몸으로 돕고 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랑의 실천이고, 사랑은 그렇게 몸의 수고로 보이는 것이라고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배웠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재난에 처한 자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돌봐 주는 이웃이 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눅 10:30-37) 병자들이 있는 곳에, 재난이 있는 곳에 몸으로 달려가서 돕고 봉사하는 게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었는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는 ‘가능한 몸으로 떨어져 있는 게’ 봉사이고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처음으로 들었다.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모두가 순순히 국가의 통제를 따르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혼란은 사실 익숙한 종교 행사가 중단되거나 바뀌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의 문제인 만큼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몸으로 무엇을 실천하는가가 우리의 믿음을, 마음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을 연결하는 실천의 규범이 달라질 때 그것을 쉽게 따르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미숙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몸으로 아는 것이 나를 이탈하는 데서 오는 불일치와 어긋남의 상황에서 취하는 여러 반응 중 하나이다. 내가 오랫동안 알아 왔고 당연하게 여겼던 현실이 더는 현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을 때, 그래도 우리는 현실이라는 것을 잡아 보려 애를 쓰게 되고,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특정 행위들에 더 절실하게 집착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개인 차원이 아니라 그 개인들의 정체성과 세계를 구성해 오던 오랜 전통의 중요한 실천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급한 대로 교회는 만남을 이어갈 방안을 모색했고, 공예배는 물론이고 조별 성경공부에서부터 수련회까지 온라인으로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인터넷 바다는 몸의 제약을 넘어서는 곳이니 이참에 해외에 나가 사는 교인들과 같이 드리는 예배를 한 달에 한 번 한밤중에 드리는 경우도 보았다. 그렇다면 흩어져 있으면서도 모일 수 있게 해 준 이 기술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살아계실 때 나의 외할머니는 아무리 멀리 계셔도 모교회 출석이 아니면 교회에 나가지 않은 것처럼 찜찜해 하셔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 애를 쓰셨고, 당연히 십일조와 같은 큰 몫의 헌금도 모교회에 하셨다. 이처럼 태생적 장소에 집착하는 것을 전근대적인 생활 방식으로 여기고, 사는 곳 근처 교회에서 새롭게 공동체 생활을 하라고 한국 교회는 권면해 왔는데, 이렇게 온라인으로 만나면 평생을 모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것은 발전인가 퇴보인가? 게다가 헌금도 계좌 이체나 송금으로 할 수 있으니 이러한 가상의 만남에 물질적 기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이 드러나는 ‘현장’은 어디가 될 것인가? 그래도 성실하게 화면 켜고 서로 얼굴을 보는 미팅룸인가? 화면을 끄고 참석하는 모임들도 많으니 사실 화면을 켜고 한 자리에 일정 시간 앉아 있는 것도 수고가 아니라 할 수 없고, 그 모임에 대한 헌신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고도 몸의 실천에 맞먹는 사랑의 수고로 자리 잡을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사랑의 수고라고 할 것인가?

 

그동안 ‘발로 뛴다’라는 말이 몸의 실천을 뜻하는 대유법이었다면, 이제는 열심히 자판을 치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가락이 새로운 사랑의 대유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밀키트를 보내는 것에서부터 돈을 보내는 것까지, 말 그대로 버튼 하나 누르는 것(touch of a button)으로 가능하게 된 사랑의 실천은 더 많은 사랑을 베풀게 하는 가능성인가? 심지어 선교사도 현장에 가지 않고 줌으로 연결되어 만나고 사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어떻게 바꾸는가? 땅끝까지 연결되라? 그런 식으로 확장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어디까지가 몸이고 몸이 아닌가? 어쩌면 개신교는 가장 발 빠르게 근대화에 적응한 종교답게 가장 ‘손가락 빠르게’ 새로운 표준에 적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면의 안전성이 여전히 위협받는 상황에서 원래의 실천에서 확장된 이러한 실천들이 과연 어디까지 원래 몸의 실천을 복제할 수 있을지, 그렇게 복제될 때 우리의 원래 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아직은 모든 게 불확실하기만 하다.

 

몇 달 전, 11월에 미국에서 열리는 학술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하면서, ‘여기에 오면 코로나에 걸릴 수 있고 그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학회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고서야 신청 절차를 제대로 밟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에 걸리기 전이었으니, ‘하여튼 미국 애들은 소송 피하려고 별걸 다 해’ 하면서 제법 여유롭게 서명하고는 신청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뭇 다른 기분이다. 연구 과제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이기에 안 갈 수는 없고, 오랜만에 학회 단짝이었던 친구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제법 기대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해도 될지, 마스크는 계속 쓰고 다녀야 할지 어떨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불안함이 올라온다. 6월 말에 걸렸으니 그걸로 항체가 5개월을 간다면 간신히 추가 백신을 맞지 않고도 여행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새로 종합 백신이 나온다지만 이미 여러 차례 백신이 투입된 내 몸에 다시 코로나에 안 걸린다는 보장도 확실하지 않은 또 다른 백신을 집어넣는 것도 어쩐지 꺼려진다. 이 학술 대회는 확실하게 물리적 장소를 현장으로 못 박았기에 나는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현장의 개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현장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지 나의 기존 경험으로는 예측하기가 힘들다. 코로나의 어디 즈음에 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금, 우리 모두의 불안이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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