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장례 예식도 독특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장례는 비록 기독교 예배 전통의 형태를 토대로 의례가 구성되었지만, 실제로 많은 부분 유교의 장례에서 영향을 받았다. 유교가 조선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표준적 가치를 제공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 중)

김형락(서울신학대학교, 예배학 교수)

 

인간은 누구나 이 땅에 태어나 삶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 사이의 여러 의미 있는 순간들을 축하하고 기억하는 의례들, 혹은 죽음으로 가족 친지들과 이별한 고인을 기리고 애도하기 위한 의례들은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이러한 의례를 통과의례라고도 하는데 통과의례는 공동체의 종교와 더불어 발전해 왔다. 특히 장례의 경우 고인의 사망을 공식화하고, 시신 처리를 위한 의례를 진행하고, 남은 사람들의 슬픔과 상실의 아픔을 위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의 삶 너머를 해석하는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기독교 역시 초기부터 인간의 죽음을 기독교 신학적으로 해석한 의례를 구성하여 공동체의 장례를 담당하였다.

 

기독교의 장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의례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그 창조된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유한한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게 하셨고, 그렇기에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품에서 안식하고 이 세상의 마지막에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장례는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과, 하나님의 구속으로 인한 구원,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함께 하는 의례이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통해 가족을 잃고 상심에 빠진 유가족들을 위로한다.

 

그렇지만 세계의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같은 형태의 장례 예식을 거행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장례 예식에는 기독교 신학의 의미 부여를 넘어 그 공동체의 문화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문화는 인류 공동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축적되고, 지역과 기후 그리고 여러 환경적 요인들이 더해져 고유의 삶의 모습으로 빚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그 공동체가 영위해 온 문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에, 비록 기독교의 장례 예식이라 하더라도 민족마다 전통마다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얼마 전,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별세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을 시청하면서 순서와 의례가 한국 교회의 장례 예식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 장례 예식들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지만 몇 가지 기본적인 공통점들이 있다. 첫째, 기독교 장례 예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심을 믿고, 이 세상을 살다가 별세한 고인을 창조주 하나님의 품에 의탁하는 의례이다. 모든 기독교 장례 예식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고인을 의탁하는 기도와 청원을 드리게 된다. 둘째, 기독교 장례 예식은 다른 종교의 장례와는 달리 인간의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에 대한 소망을 선포하는 의례이다. 다른 종교의 장례에서는 인생의 끝과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의식을 거행하나, 기독교의 장례에는 반드시 부활의 소망을 선포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영위함을 기대하는 순서들이 존재한다. 셋째, 기독교의 장례 예식은 고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을 선포하면서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종교의 장례는 기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슬픔을 극복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능을 지니며, 기독교의 장례 역시 남아 있는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위로를 선포한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다양한 기독교 장례 예식의 핵심으로서 모든 의례에서 선포되어지고 기도와 찬송을 통해 모든 참석자들에게 전달된다.

 

 

한국 기독교의 장례 예식도 독특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장례는 비록 기독교 예배 전통의 형태를 토대로 의례가 구성되었지만, 실제로 많은 부분 유교의 장례에서 영향을 받았다. 유교가 조선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표준적 가치를 제공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장례의 경우, 유교의 효 사상이 반영되어 장례의 매 절차가 효를 실현하는 의례로 인식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기본적인 의례의 순서(임종-입관-발인-매장, 혹은 화장과 봉안)는 그대로 한국 기독교의 장례 과정에도 수용되었다. 물론 내용에는 기독교 신학의 의미들이 반영되었지만, 그 절차와 과정은 유교 문화와의 융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계의 모든 기독교의 장례 역시 그 지역과 공동체의 문화적 요소들과 융합되었기 때문에 이 융합 자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 장례에서 아쉬운 점은 장례 의례의 명칭과 관련된 것들이다. 먼저, 많은 교회들이 ‘예배’와 ‘예식’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예배는 영어로 ‘worship’(경배)이라고도 불리듯이,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그분의 구속과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의례이다. 따라서 주일 혹은 평일에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이와 구별되는 목회적 예식(pastoral rite)도 존재한다. 목회적 예식은 인간의 생사화복과 관련되는 특별한 날에 축하와 기념 그리고 애도를 하는 기독교적 의식이며, 임직, 혼인, 장례, 추모, 심방 등이 이에 속한다. 이는 ‘예배’라고 부르지 않고 ‘예식’이라 칭한다. 영어에서도 이러한 예식을 rite 혹은 ceremony라고 구별해 지칭한다. 장례의 경우 funeral rite이지 funeral worship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데, 단어가 지향하는 의미를 볼 때 이는 올바르지 않다.

 

또한, 최근 많은 교회들이 장례 의례를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능적인 면에서는 유가족들에게 큰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의 신학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천국환송예배라는 명칭은 기독교 신자들이 별세 이후 즉각적으로 천국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죽음 이후의 안식과,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몸의 부활, 또 그 이후에 올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과정을 생략하여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천국환송예배라는 명칭은 지양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짧게나마 기독교 장례의 의미와 이 의례가 지향하는 신학적 내용들, 지역 문화와 융합의 결과들, 그리고 한국 기독교 장례에 대한 제언을 다루어 보았다. 장례 예식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종말까지를 아우르는 기독교 신학의 처음과 끝이 발현되는 목회 의례이다. 또한, 죽음을 목도하는 유가족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회자가 균형 잡힌 신학적 내용을 중심으로 집례한다면, 예식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그리고 섭리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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