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는 시인, 즉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는 시인을 “사제와 같고 예언자와 같고, 이름을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에 신중한 자, 그것을 성스럽게 대하는 자, 언어의 눈으로 사회를 꿰뚫고 목소리 내는 자, 현 상황을 정의하고 절실한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책에 등장하는 ‘언어의 구원 사업’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져 보자.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책 소개] 이해인 지음, 안희경 인터뷰 | 『이해인의 말』
마음산책 | 2020년 12월 15일 | 308면 | 16,500원
한여름에 간 예수원1)은 공기부터 달랐다. 태백 산골의 서늘함에 내내 긴팔 옷을 입어야 했다. 공기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 달랐다. ‘영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나는 그들의 비범함이 놀라우면서도 부러웠다.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 공기와 분위기 자체가 다른 곳, 나에게 수도원이란 그런 곳, 즉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이질적이라는 말은 잘 알지 못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을 텐데, 이해인 수녀와의 인터뷰를 묶은 이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수도원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는 고독을 집으로 삼아야 하는 겁니다’
수도자에게 고독은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일 것이다. 이해인 수녀는 첫 인터뷰부터 고독을 이야기한다. 그는 법정 스님에게 받아 40여 년 동안 간직해 온 편지를 소개한다.
고독하지 않고는 주님 앞에 마주 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단절된 상태에서 오는 고독쯤은 세속에서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수도자의 고독은 단절에서가 아니라 우주의 바닥 같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지요. 말하자면 절대적인 있음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고독을 배웁시다.
50년의 수도 생활 동안 이해인 수녀는 고독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고독을 외로움과 구분해야 함을 강조한다. 외로움이 “곁에 아무도 없다고 서운해하는” 것이라면, 고독은 “침묵 속에서 더 근원적인 실체를 헤아리는 고차원적인 홀로 있음”이라고 설명한다. 법정 스님의 말을 한 번 더 반복하자면, 고독은 “절대적인 있음” 안에 서는 것이다.
고독은 자신에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더하는 것이며, 넓이를 넓히는 것이다. 시인 릴케는 말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멀게 여겨진다고 당신은 말합니다만, 그것은 당신의 주변이 넓어지기 시작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2) 이 고독이 이해인 수녀의 영성을 이루는 뿌리다.
“우리는 안일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원 사람들을 시샘하기도 했다. ‘속세’와 단절된 공간에서 온갖 욕망과 구차한 것에서 자유로운 듯한 그 모습이 세상의 슬픔과 아픔에서 멀어짐으로 얻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회피한 채 자신들만의 완결된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도자의 고독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남들이 볼 때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며, 세상사엔 관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의식은 약자들에게 계속 열려” 있다고 말하는 이해인 수녀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그는 기후 위기와 환대를 주제로 수도원 공동체와 함께 공부하고 기도한다. 교도소를 방문하여 재소자와 면담하고, 해고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책과 응원의 편지를 보내는 그는 세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는 시인 김현승의 말처럼 “고독 속에서 나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되고, 나를 거쳐 인간 일반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대 사회적인 임무까지도 깨달아 알게 되”3)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러한 시인의 말은 “수도를 하면 할수록 세상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다는 수녀의 말과 공명한다. 고독하려 노력할수록, ‘주님’께 침잠할수록 넓어지는 세계 속에서 많은 것, 특히 약하고 아픈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어적으로 깨어서”
이해인 수녀는 시인, 즉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는 시인을 “사제와 같고 예언자와 같고, 이름을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에 신중한 자, 그것을 성스럽게 대하는 자, 언어의 눈으로 사회를 꿰뚫고 목소리 내는 자, 현 상황을 정의하고 절실한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책에 등장하는 ‘언어의 구원 사업’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져 보자.
‘언어의 구원 사업’은 이해인의 어머니가 그에게 쓴 편지에 등장하는 표현인데, 시인이자 수도자로서 이해인이 하는 일을 말한다. 이 언어의 구원 사업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언어로’ 하는 구원 사업이다. 고리타분한 생각을 언어로 깨고, 은혜와 환대의 말을 세상에 제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는 ‘언어를’ 구원하는 사업이다. 언어를 구원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행복’이라든지, ‘성공’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단어는 쉽게 왜곡되고 욕망에 휘둘리곤 한다. 이러한 언어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언어를 구해 내는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좀 더 폭을 넓혀 보면, 이것은 단지 시인의 역할만이 아닐 것이다. 수녀와 수도원의 역할이며,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역할일 것이다. 사랑의 언어로 세상을 회복하고, 깨어지고 왜곡된 언어를 구원하는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아닐까?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은 이해인 수녀를 거치며 항상 “언어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의미까지 확장되는 듯하다.
명랑하고 패기 있게
이 시대의 표상은 ‘견딤의 영성’에 있다고 말하는 그는 견딤의 태도로 ‘명랑’과 ‘패기’를 제안한다. 사실 제안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데, 왜냐하면 긴 세월을 명랑하고 패기 있게 견뎌 온 이해인 수녀가 인생으로 이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고독·참여·사랑을 향한 정진과 그것을 아우르는 명랑함과 패기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 전해 주는 것은 이토록 풍요롭다.
1) 태백에 위치한 수도 생활 공동체.
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3) 김현승, 『가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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