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

동은이의 영광에 깃든 신의 영광을 바라며

 

글_샤인(우미연 기윤실 청년위원)

 

 

#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예레미야 14:16]

설 명절 마지막 날, 드라마 <더 글로리>를 정주행하고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를 위 문구로 설정했다. 이번 설날 가족 예배를 드릴 때 아빠가 전해주신 말씀 내용 중에 예레미야 14장이 있었기에 해당 성경 본문이 바로 생각난 것 같다.

드라마가 아직 시즌1까지만 공개되어 후반부 내용을 알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리뷰를 쓰는 것은 다소 위험부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으로서, 법조인으로서, 그저 사람으로서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하고 깨닫고 소망하는 묵상의 단편들을 적어보려 한다.

 

#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에스겔 16:16]

<더 글로리>의 주인공 동은이는 극악한 집단폭력 범죄에 몸도 마음도 영혼도 부서져버렸다. 누구 하나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고 오히려 엄마에게도 선생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버림받은 동은이. 말 그대로 피투성이가 된 채 온 몸에 파고드는 고통에 울부짖던 동은이. 그에게 삶의 순간순간은 지옥이었고 자신의 생명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고통 가운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던 욥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동은이는 다른 결심을 하게 된다. 피투성이라도 살겠다고. 피투성이라도 살자고. 악의 무리들에게 이대로 지지 말고 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래서 무참히 짓밟힌 자신의 존엄을, 명예를 되찾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던 것 같다.

자신의 인생을 악인들이 규정지은 대로 바라보지 않고, 악인들의 영원한 번영을 믿지 않고, 원망이든 복수든 다시금 생의 의지를 집어 든 동은이를 향해 무한한 박수와 응원을 보낸 순간이다. 아마도 신이 그와 함께하여 그의 영혼을 살린 순간이었으리라. 구약성서에서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다시금 동은에게도 ‘피투성이라도 살라’ 말씀하신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복수를 다짐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동은이를 매 순간 응원하였으리라 믿는다.

 

#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편 94:14-15]

남의 고통에 앞장서던 그 발과 나란히 걸은 모든 발,

남의 불행에 크게 웃던 그 입과 입 맞춘 모든 입,

비릿하던 그 눈과 다정히 눈 맞춘 모든 눈,

조롱하고 망가뜨리던 그 손과 손 잡은 모든 손.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기뻐하던 너의 영혼.

 

용서는 없어, 그래서 그 어떤 영광도 없겠지만.

용서하지 않는 동은이. 종교가 없어서 죽으면 갈 곳이 지옥으로 정해져 있으니 굳이 용서하지 않고 그 어떤 영광을 바라지도 않겠다고 동은이는 말한다. 그러나 죄를 죄로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도 역시 용서하셨을 리 없다. 끔찍한 악의 희생자들이 부르짖는 절규는 신을 향한 간절한 심판의 호소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영혼을 지탱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신을 향해 부르짖는 인간들의 호소와 저주기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기록으로 남겨두셨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시편 94:1~2)”

쉽게 잊지 않고, 쉽게 용서하지 않는 동은이가 반가웠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 역을 맡은 송혜교 배우가 연기한 영화 <오늘>(2011년)에서의 다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겐 용서하지 않을 자유도 있었는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성급하게 한 용서는 가짜였어요. 수술이 필요한 상처에 붕대만 둘렀죠. 그런 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다혜는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었지만, 자신이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얼굴도 모르는 17세 가해자 소년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 소년은 이후 학교 친구를 살해하고 소년원에 수감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다혜는 절망하고 자신의 섣부른 용서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며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선의로 용서를 선택했으나 괴로워하던 다혜, 가해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그들의 악이 그들의 올무가 되도록 계획을 다져나가는 동은이. 장르도 서사도 모티브도 다르지만, 같은 배우가 연기한 역할이라 더 선명하게 오버랩되었다.

 

동은이를 괴롭히던 그들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탐욕과 쾌락에 눈멀고,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어, 거짓과 기만으로 속이며, 악에 악을 쌓고 있었다. 그 발과 그 입과 그 눈과 그 손과 그 영혼은 더 악랄해졌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보고 듣고 기억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신의 심판(유기)이었으리라.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로마서 1:28)”

동은이는 악의 희생자이자 폭력의 피해자로서 악의 파괴력을 잘 알고 있고 폭력을 끔찍하게도 싫어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은이의 복수는 그들의 악행을 드러나게 할 뿐이고, 그로 인한 악의 열매를 스스로 거두게 하는 것이다. 동은이가 선택한 복수가,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것처럼 가해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살해하는 방법이 아니기에, 직접 손에 피를 묻혀서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방법이 아니기에, 악행을 행하여 또 다른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방법이 아니기에, 우리는 동은이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끝까지 지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신 역시도 이러한 동은이의 여정에 함께하며 동은이의 복수를 돕고, 이를 통해 신의 심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정, 현남, 양호실 선생님, 에덴빌딩 주인 할머니 등 조력자들의 등장과 연대가 단순히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동은이 현남과 조우했을 당시, ‘이봐, 신은 날 돕지 않는다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달리 자신을 돕는 인물이었다.)

 

# 악마의 나팔꽃(세리) vs 천사의 나팔꽃(바리새인) – feat. 누가복음 18장

<더 글로리> 1화에서는 에덴빌딩 주인 할머니가 악마의 나팔꽃(하얀 나팔꽃)과 천사의 나팔꽃(노란 나팔꽃)을 설명하고, 동은에게 악마의 나팔꽃을 건네주는 장면이 나온다. <더 글로리>의 포스터에서는 동은, 여정, 현남, 도영은 모두 하얀 나팔꽃에 둘러쌓여 있고, 동은을 괴롭힌 가해자 5명은 모두 노란 나팔꽃에 둘러쌓여 있다. 여정, 현남, 도영은 모두 아래를 응시하고, 가해자인 연진, 재준, 사라, 명오는 모두 위를 응시하고 있다. 혜정은 하얀 나팔꽃이 살짝 목 뒤쪽에 닿아 있고 정면을 응시한다.

에덴벨딩 주인 할머니는 하얀 나팔꽃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뻗어나가서 악마의 나팔꽃이라 불리고, 노란 나팔꽃은 지면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피는 모습이 하늘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처럼 보여 천사의 나팔꽃이라 불린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나는 정반대로 해석되었다. 끊임없이 하늘에서 소망을 찾으며 신을 구하는 모습의 하얀 나팔꽃이 천사의 나팔꽃이고, 오로지 땅의 것에 마음을 두며 육신의 정욕 ‧ 안목의 정욕 ‧ 이생의 자랑(요한일서 2:16)을 구하는 모습의 노란 나팔꽃(꽃말 : 덧없음, 헛됨)이 악마의 나팔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는 포스터에서 가해자들이 눈과 목을 치켜세우고 노란 나팔꽃에 둘러쌓여 있는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동은이는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인이라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해자인 사라는 자기는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한다. 돈과 마약과 섹스와 거짓말과 위선에 썩어있으면서도 말이다. 피해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복수를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가해자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 폭력을 자행하고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하물며 자신들의 악행과 그 피해자를 잊기까지 한다. 오만방자하게 더욱 악에 악을 쌓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태도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는 것 같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선행을 하였기에 죄의식 없이 악을 일삼는 가해자들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전하시면서,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고개와 목을 뻣뻣이 치켜들고 서서 자신은 의인이라 말하며 감사하다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은, 돈과 권력에 취하여 교만하게 악인의 꾀를 좇으며 죄인의 길을 걷다가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는 가해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 기도하는 세리의 모습은, 악과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에 부르짖으며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동은이와 피해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용서하지 못한 죄인으로서 영광도 없을 것이고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은에게,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마침내 언젠가 결국은 신의 구원이 임하리라 믿는다.

 

# Morning Glory, 나팔꽃, 기쁜 소식(Gospel, 복음)

악행이 버젓이 자행되던 체육관 사이로 스며드는 십자가(거꾸로 된) 모양의 빛. 그 빛을 향해 기어가며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찾았던 동은이. 그렇게 기어가던 동은이 다시금 끌려가면서 신은 어디에 있는 거냐고, 왜 나를 이 악과 고통에서 건져주지 않는 거냐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신은 그 즉시 가해자들의 발을 부러뜨리고 손목을 꺾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지는 않았다. 신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나를 이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는지 반문하게 되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역시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소리치며 질문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시편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예수는 친히 고난당하는 메시야(구원자)로서 핍박받으며 살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당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를 구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길을 마련하셨다. 예수 역시 자신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고통을 온 몸과 영혼으로 감당하면서 죽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엘리 위젤 「나이트」 p.122

자비로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열다섯 살에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가족 모두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유대인 엘리 위젤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담아낸 자서전 격의 저서인 「나이트(흑야, Night)」에서 참혹한 유대인 학살 현장 가운데 절규한다.

욥기 3:3,11,20,2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던 의인인 욥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다.

시편 102:3,5,9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같이 탔음이니이다. …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시편에서,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한다.

윌리엄 폴 영 「오두막」 p.117,119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셨죠? …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요? 어디에도 안 계시는군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한 번도 옆에 계시지 않았죠.”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에서 딸을 살해당한 아버지 맥의 외침이다.

악과 고통의 문제는 성서 전반에서도, 인류 역사에서도, 수많은 저서에서도, 개개인의 인생에서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게 되는 주제이자 지독히 현실적인 오늘의 삶의 일부이다. 이에 대해 수많은 대답들이 있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도 미완의 숙제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하겠지만, 한 가지 내가 믿는 바는 이러하다. ‘하나님은 눈을 지으신 이로서 그 모든 것을 보고, 귀를 지으신 이로서 그 모든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고통받으시며 울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고,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며, 결국은 끝내 완전히 악과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하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아는 성경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압제당하고 학대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셨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애굽기 3:7),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9-10)”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악과 고난 가운데 부르짖고 신음하는 이들과 함께 고통 당하시면서 심판을 계획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날, 신의 진노가 쏟아지는 날, 그 날이야말로 고통의 멍에에 매여 신음하는 자들의 구원이 날이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요한계시록 7:16~17)”

피투성이지만 살겠다고 다짐한 동은이가 자신이 고문당하던 체육관에 제 발로 찾아와 먼 훗날의 복수를 선포한 그 장면에서 다시금 체육관 문틈 사이로 십자가 모앙의 빛이 비춘다. 동은이의 고통 가운데 함께했던 신이 앞으로의 동은이의 여정에도 함께 하리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동은이가 똑같거나 더한 방식의 악행으로 가해자들에게 복수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신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신의 지혜였을 것이다. 제2의 가해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붓는 방식으로 진정한 복수를 이루고, 가해자들이 그들의 악행을 깨닫고 성찰할 기회를 주는 진정한 심판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무너진 존엄과 명예를 바로 세우고 영광을 얻는 길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동은이의 존귀한 영광이 빛을 발하는 그 날에 신의 영광 역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글로리, 기쁜 소식(가스펠, 복음)이 아닐까. 동은이의 영광에 깃든 신의 영광을 소망해본다.

 

 

#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편 1:5]

그 영광의 날에 이르러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동은이와 같이 악과 고통 가운데 있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연대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세상은 불평등하지만 하나님은 평등하시고, 평등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성도의 역할은 분명하다. 세상은 악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성도의 역할은 분명하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우리에게 악인의 길로 갈 것인지, 의인의 길로 갈 것인지, 누구와 연대할 것인지, 참된 영광은 무엇인지, 심판과 구원의 날을 진정으로 기다리는지 질문하고 있다. 내가 연진의 무리처럼 이 땅에서 영원히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면서 살려 한다면 나에게는 더 이상 구원자라는 신적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동은이의 피해자 연대와 같이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그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애쓴다면 누구보다 그 심판과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바랄 것이다.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이 내게도 고통이 되고 있는가. 그 영광의 날을 진정 기다리고 있는가. 애타는 마음으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 자문해본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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