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탈식민주의는 무력 투쟁이나 독립운동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드리운 제국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과거의 제국과 식민주의를 파헤치고, 거기서 오늘날 문제의 뿌리를 발견하며, 여전히 산재한 식민주의의 가능성을 틀어막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과거의 권력과 현재의 권력에 동시에 도전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불온하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책 소개] R. S. 수기르타라자 지음 |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분도출판사 | 2019년 10월 10일 | 272면 | 18,000원

 

 

불화하지 않는 사상을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관련된 논의가 많이 있겠으나, 불화하는 성격을 사상의 요소로 삼는다면 탈식민주의는 여지없이 사상이다.

 

탈식민주의는 지난 세대가 연구하고, 처신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데 끼친 열심과 성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은 잘못되었으며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인다는 불쾌한 진실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탈식민주의라는 단어가 생소할 수 있지만, 의미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 국가나 사회가 다른 국가나 사회에서 가해지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지배를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 주체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행동하려는 주의”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하는데, 이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탈식민주의란 무엇인가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의 선구자이자 권위자인 수기르타라자는 탈식민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탈식민주의는…우리에게 현재의 혼란과 불편의 원인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또한 탈식민주의는 고대와 현대의 제국이 어떻게 작동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반복되고 있는 구시대의 제국주의적 충동에 대항해 어떻게 경계 태세를 취할 수 있는지 충고해 준다.”

 

즉, 탈식민주의는 무력 투쟁이나 독립운동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드리운 제국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과거의 제국과 식민주의를 파헤치고, 거기서 오늘날 문제의 뿌리를 발견하며, 여전히 산재한 식민주의의 가능성을 틀어막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과거의 권력과 현재의 권력에 동시에 도전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불온하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서에 접근하는 것이 바로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이다. 그리스도교와 성서는 제국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성서가 쓰인 정황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성서가 제국의 치하에서 탄생했다. 두 번째 이유는, 역사에서 성서와 성서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 무수한 예가 있다. 성서를 근거 삼아 행동을 정당화한 침략자들, 그리스도와 성서의 우월성을 피력하며 타문화와 타종교를 억압한 성서학자들, 하나님의 이름과 성서 구절로 뒷받침된 전쟁들….

 

두 이유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데, 바로 성서는 지배당하는 입장에서 쓰였지만, 이후엔 지배하는 입장에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복잡한 관계와 양상이 있으며, 이 지점이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의 자리일 것이다. 한 마디로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이 하는 일은…텍스트와 텍스트에 대한 해석들을 고대와 현대의 식민지적 맥락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언제나 현재를 겨냥한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표지, ⓒ분도출판사

 

말년의 양식(style)

 

저자는 6장에서 성서 본문에 대한 탈식민주의 비평을 구체적으로 시도한다. 그중 한 부분에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바울과 요한에 대해 비평하는데, 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말년의 양식이란 말년의 작품에 나타나는 경향성에 관한 것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말년의 작품들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혈기 왕성하고 도전적인 젊음 이후 평온함과 원숙함을 보이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완결된 세계 속에서 살다 끝에 이르러 혼란, 무질서를 보이는 경우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노년에 최후의 저작(로마서)을 쓰는 바울과 선교 여행을 다니던 과거의 바울 사이엔 어떠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서에서는, 세상을 시끄럽게 하던 바울의 “호전성과 대담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고상하고 추상적인 글을, 심지어는 권력과의 관계를 완화하려는 듯한 글을 쓰고 있다. 바울의 인생 동안 강력하게 작용했던 로마 제국의 자기장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질문한다.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바오로의 온화한 분위기는 말년의 양식을 보여 주는 징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요한은 후자에 가깝다. 온화하고 조화로운 요한복음을 썼던 요한은, 밧모섬에서 전혀 다른 문장들을 보여 준다. 최후의 그는 거칠고 낯선 환상과 이야기를 쏟아낸다. 저자는 다시 질문한다. “묵시록의 저자가 말년의 요한이라면 어떻게 될까?…자신이 이전에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분노하고 심란해하는 노인이라면 어떻게 될까?…묵시록이 논쟁과 논란과 소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집필된 말년의 저서라면 어떻게 될까?” 그의 변화 역시 로마 제국의 영향과, 그가 로마 제국을 바라보는 관점의 이동에 기인한다.

 

이러한 해석은 분명 성서학 내에서 비판의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러나 제국의 영향력 아래 탄생한 텍스트를 읽어 낼 방법에 대한 예시와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탈식민주의의 의의

 

탈식민주의가 왜 필요한지, 그 의의와 필요성을 짚어 보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저자는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이 지닌 의의를 나열하는데 그중 세 가지를 들어 본다면, (1) 이제껏 성서학자들이 신학적·영성적·역사적 측면으로 접근해 왔지만,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은 “무시되어 왔던 제국과 제국주의 정치학을 포함시켰다”는 점. (2) 그럼으로 “성서 해석자들이 어떻게 제국을 재현하고 있는지…그들이 제국주의적·신식민주의적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식민주의적 야망을 뒤흔들고” 있는지 질문한다는 점. (3) 외면받고 소외된 계층과 인물들에 주목하고 서사를 회복하는 “회복의 해석학”을 실행했다는 점이다.

 

탈식민주의에 제기되는 문제는 이 사상이 언제까지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업적과 의의와는 별개로 탈식민주의는 여전히 필요할까?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월등하다고 여기고 그래서 더 좋은 삶의 방식을 갖도록 다른 국가가 개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면, 착취당하는 시장이 존재한다면, 종교가 물적·영적 정복을 부추긴다면, 학문이 식민주의적 충동과 오리엔탈리즘1)의 표식을 계속해서 드러낸다면 탈식민주의는 유효할 것이다. 절실히 요청될 것이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던 흑인 여성 시인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제국의 언어와 역사로 덮인 기독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은 그 역할을 할 연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단 하나의 궁극적 목적을 향한다. 그것은 책에서 재인용된 간디의 말처럼,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1) 서양 학자들이 서양의 관점으로 동양을 연구하면서 드러낸 편견과 오해를 비판적으로 일컫는 말(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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