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가치관 가운데서 생명은 상대적 가치로 전락했다. 이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는 돈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돈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자신이 왜 이 사회에서 존재해야 하는지를 돈으로 증명할 수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도, 이제 경제활동에서 제외된 중장년도,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노년도, 스스로를 증명할 길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최근 고독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고독사에 대한 관심은 그동안 이를 독거노인으로 한정하여 살펴보던 것에서 장년층과 청년층의 고독사로 그 범위를 넓히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 전에 노년층의 고독사는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자녀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남겨진 이들의 문제로 보았다. 즉, 가족 해체나 무정(無情)을 원인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불우 이웃 돕기 수준의 대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독사의 범위가 장년층이나 청년층으로 넘어오면서 이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인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몇몇 불행한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 결과물로 보게 된 것이다.

 

고독사의 증가

 

2022년 12월 보건복지부에서는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고독사로 인한 사망자는 3,378명이다. 고독사는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7년 2,412명이던 고독사는 이후 4년 만에 거의 1천 명 가깝게 늘어났다. 전년도 2020년과 비교해도 100명 정도가 늘어났다. 지난 5년간 고독사는 연평균 8.8%의 가파른 증가율을 보인다.

 

고독사는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려졌다. 고독사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기도 하다. 일본의 고독사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 현상의 특징은 그 숫자가 빠르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고독사는 원형을 그리며 완만하게 증가한다면, 한국의 경우는 직선형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의 고독사는 노인층에서 중장년층으로 그 주류가 옮겨 오고 있다. 중장년층, 특히 40대 후반부터 50대에서 고독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대부분이 남성들이다. 고독사의 약 80%가 남성인데, 이 연령층에서 더욱 남성이 많다. 그런데 최근에는 청년들의 고독사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중장년층의 고독사 증가는 특별한 현상인데, 외국의 경우 고독사는 대부분 노년층의 문제로 인식되고, 그 대책 역시 노년층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남성 중장년층의 고독사

 

<복지이슈 Today>의 보도를 보면, 50대 고독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한다. 파산하거나 명퇴를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가족 관계가 나빠지고, 이혼하고, 건강이 악화되고, 계속 일자리를 구하다가, 마침내 고독사하는 것이다.1)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러한 패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은 아버지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 버는 것이 쉽지 않으니 거기에 매이게 되고, 자신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걸고 헌신했다고 생각하는데, 가족 안에서 자신은 소외되어 있다. 어느 순간 경제생활에서 물러나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가족과의 삶이 원활하지 않고 그도 자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가족들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 엇물림 속에서 남자는 점점 괴팍해지고 괴물로 변해간다. 결국 그 집을 떠나게 되고 혼자의 삶으로 내몰린다. 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고 화려한 은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순간 모두의 기피 대상으로, 그리고 돌보아 주어야 할 부담스러운 대상으로 전락한다. 결국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술과 자포자기의 삶으로 죽음에 다가간다.

 

 

나가오 가즈히로가 쓴 『남자의 고독사』라는 책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한다.2) 심지어 중장년층의 고독사를 ‘소극적 자살’이라고 명명한다. “소극적 자살(완만한 자살)의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을 매거나 다량의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살아갈 기력을 잃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병이 들어도 치료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집에서 병약한 자신을 방치해 두고, 술에 취해 주변과 소통을 끊어 버리는…등등의 태도입니다. 경찰이 이런 죽음을 자살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지만, 자살에 가까운 고독사라고 봅니다. 자기 방임(Self-neglect)이라는 말도 최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극적인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는 스스로 죽음을 재촉해 간다는 말이다.

 

고독사로 몰아가는 현대의 가치관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가치관 가운데서 생명은 상대적 가치로 전락했다. 이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는 돈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돈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자신이 왜 이 사회에서 존재해야 하는지를 돈으로 증명할 수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도, 이제 경제활동에서 제외된 중장년도,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노년도, 스스로를 증명할 길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과학이 발전하고, 의료기술이 좋아지면서 인간의 수명은 한없이 늘어났다. 『남자의 고독사』에서 저자는 80, 90세가 된 노인들도 노후를 걱정한다고 지적한다. 즉, 수명이 늘어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 늘어난 인생에 대한 대책이 항상 걱정이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주된 실존적 불안은 죽음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생을 지배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 실존적 불안을 가져온다. 우리가 얼마를 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20대 중반까지 공부하고, 30년 경제생활하고 50대에 은퇴했는데, 아직 살날이 50년 남았다. 지금 벌어놓은 돈으로 자녀들 양육하고, 부모님 공양하고, 노후를 살 수 있을까?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50대에 경제적 실패를 하게 되었다. 50대에 독거노인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50년 더 살아야 한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그래서 셧다운해 버린다. 인생의 가치를, 인생의 의미를 경제, 즉, 돈 하나로 맞추어 놓았는데, 그게 무너지는 순간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다.

 

고독사는 죽음 이전에 관계의 단절이다. 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교회가 할 일이 있다.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대체 가족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어 주고, 소그룹을 통해 서로 기도해 주는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이다. 강서구에 있는 사랑의교회는 작은 교회지만 이러한 역할을 감당한다. 지역보건소와 함께 중년 남성을 위한 쿠킹클래스를 교회 식당에서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이곳에서는 혼자 사는 남성들이 모여 요리도 배우고, 같이 식사도 나눈다.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하니 관계도 열리고 있다.

 

또, 장기적이지만 실질적인 고독사 예방을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단선적인 삶의 목표 또는 가치를 변화시켜야 한다.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가정도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고독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와 방법을 찾고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고독사 예방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물론 여기서도 교회가 할 일이 있다.

 

고독사는 한국 사회의 아주 극단적인 단면이다. 이것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교회가 문을 열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따듯이 맞이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귀한 사역이 될 것이다.

 


1) 김명숙, “고독사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독생’을 돌아보자”, <복지이슈 Today>, Vol. 42: 2016. 9, 9쪽.

2) 나가오 가즈히로, 『남자의 고독사』, 신학희 옮김 (연암서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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