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목적을 이윤 하나로 좁혀버리고 일의 범주를 축소해 버린 문화는 비단 표준 시간표를 따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일의 범주를 축소한 것은 필요의 범주를 한정 짓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이윤만을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필요 또한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규격화한다. (본문 중)

박은영1)

 

자본주의 사회는 오랫동안 경제적 이윤만이 노동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해 왔다. 시장은 이윤을 창출하는 활동만을 노동으로 인정하며, 이윤 창출을 위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설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의들도 꾸준히 쌓여 왔다. 이윤을 내지는 않아도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 많았지만, 이윤이라는 가치 하나에 그 다양한 일과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려져 왔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보다 다양한 일과 많은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노동(일)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시도했다. 그중에는 일을 신학적으로 탐구한 미로슬라브 볼프도 있다. 볼프는 무엇보다 이윤이 아닌, 일하는 사람 본인이나 그와 공생하는 존재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일의 일차적 목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결국 자신과 다른 존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왔다. 필요를 채우는 일은 때로 복잡하고 거의 항상 고되지만,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옆 사람을 지탱하는 존재가 되는 기쁨으로 채워지는 놀라운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다양한 방식의 일과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합당한 가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아 왔다. 자본주의 체제가 이윤 창출 목표로 정해놓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존재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아이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해진 시간표를 지키는 게 불가능했던 여성들과, ‘표준’의 몸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오랫동안 생산적이지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일의 목적을 이윤 하나로 좁혀버리고 일의 범주를 축소해 버린 문화는 비단 표준 시간표를 따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일의 범주를 축소한 것은 필요의 범주를 한정 짓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이윤만을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필요 또한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규격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 듯, 인간의 존재를 규격화할 수는 없다. 천 명의 사람은 천 가지 색으로 빛날 뿐 아니라, 한 사람의 몸과 생각과 마음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곤 한다. 이렇게 다채로운 존재인 우리는 그만큼 다채로운 필요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자신과 타인의 필요를 함께 채워 나간다. 이윤에 대한 계산을 거쳐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를 섬세하게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윤에 가려진 일의 다양한 목적을 되찾고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다양한 일의 가치를 복원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다채로운 색깔을 되찾는 매우 설레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묻는다면, 3년 전 이곳 한국에서 생긴 새로운 일자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2020년, 이제까지 도저히 취직하거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중증장애인들이 취업을 했다! 당시 신설되었던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이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통해서였다. 몸의 움직임이나 인지 방식이 산업 사회가 설정한 표준과는 너무 달라 보이는 그들이 어떻게 취업할 수 있었을까?

 

서울시와 장애 운동계가 논의한 끝에 탄생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일을 하는 장애인 노동자에게 맞는 일을 새롭게 만들었다. 사람이 일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을 사람에게 맞추기로 한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획자들은 노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 이윤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음을 기억했다. 그래서 새로운 공공일자리에서는 장애인 노동자들에게 이윤이 아닌 다른 것을 생산하도록 했다.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일자리에서 장애인 노동자들에게 맡겨진 직무는 크게 권익 옹호 활동, 문화 예술 활동, 장애 인식 개선 강사 활동 세 가지였다. 이를 통해 UN 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장애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에 항의하는 것,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노동의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장애인 노동자들이 이윤 대신 창출해야 하는 가치는 바로 ‘권리’였다. 이들은 표준적인 몸과는 다른 다채로운 몸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동료 시민들과 소통하는 일을 담당했다.

 

산업 사회가 효율을 위해 상정한 특정한 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민으로서의 권리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었고 학교를 다니기도 어려웠으며 심지어는 병원에 가도 기계가 몸에 맞지 않아 제대로 된 검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고용된 장애인 노동자들은, 그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장애인 시민들의 권리를 되찾음으로써,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회를 고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6월 29일 서울시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직무에서 결국 ‘권익옹호 활동’ 항목을 삭제했다. 누군가는 오래 끌었던 장애인들의 시위를 드디어 멈출 수 있는 묘안이라고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서울 마로니에공원에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죽음을 알리는 분향소를 설치하고 이를 애도했다. 장애인 노동자들은 계속 일하고 싶다고, 자신들을 해고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간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온 장애인 노동자들은 그 일을 중단하라는 서울시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서울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사망은 사실 장애인 노동자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애도해야 할 큰 상실이다.2) 서울시는, 노동이 이윤을 생산하는 데 머물지 않고 노동을 통해 지켜지지 못했던 시민들의 권리가 지켜지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제도를 순식간에 무력화시켜 버렸다. 서울시의 결정은 그러니까 이윤의 속박으로부터 노동을 해방시켜 사람을 존중하고 돌보는 활동으로 재구축하려 했던 숱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공교롭게도 장애인들이 분향소를 열어 서울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사망을 애도한 7월 12일은, 여당이 개최한 ‘실업급여제도개선공청회’ 석상에서 나온 여성과 실업자에 대한 폄훼 발언으로 사회가 시끌시끌했던 날이기도 했다. 이 일로 시민들은 (비장애인) 남성 노동자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권리에도 차등을 두는 인식이 얼마나 공고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는 이날 공청회 석상의 발언과 장애인 노동자의 실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두 사건 모두에서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임금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개인들이 모욕당했으며 그들의 의견과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두 사건 모두에서 몸의 특성, 젠더, 그들이 수행하는 일의 종류나 일의 수행 여부 등과 상관없이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존중되고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 공동체는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원칙은 노골적으로 무시되었다.

 

7월 12일 하루 동안 우리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더 나아가 이윤과 인권 사이의 우선순위가 전도된 상황과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자본주의의 가치 평가 기준을 이제는 정말 변화시켜야 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어 무엇부터 바꿔야 할지 생각하다가 더 우울해진 마음으로 잠이 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을 생각하면 나 역시 답답한 마음뿐이다. 다만, 풀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문제 앞에 서서 다시금 ‘고(故) 서울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죽음을 애도한다. 무엇보다 3년간 누구보다 열정을 다해 일한 장애인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일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지며 철저히 배제당했던 이들이 노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가르쳐준 가치, 어느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들의 외침과 수고 하나하나를 다시 기억해 본다. 그들이 꼭 다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그 일을 해줄 수 있기를,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그 소중한 일자리가 속히 부활하길 기도한다.

 

* 참고자료,

미로슬라브 볼프 저, 백지윤 역, 『일과 성령』, IVP, 2019.

박은영, 『소란스러운 동거』, IVP, 2022.

‘중증장애인들, 집회하면 해고하겠다’는 오세훈의 서울시”, 「비마이너」, 2023. 7. 7.

오세훈이 칼로 찔러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죽은 거예요”, 「비마이너」, 2023. 7. 13.

‘샤넬 선글라스 사고’ ‘달콤한 시럽’…실업급여 망언에 ‘부글부글’”, 「경향신문」, 2023. 7. 14.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2) 서울시만 권익옹호 직무를 삭제했을 뿐, 경기도와 춘천 등 다른 지역의 권리중심일자리 제도에는 여전히 권익옹호가 주요 직무로 남아 있다. 다만 현재 시점에 다른 지역 권리중심일자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들어서 있다. 서울시의 사례는 처음으로 시행된 권리중심일자리 제도의 사례인 만큼, 그것이 시행되고 자리 잡는 과정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모델이자 선례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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